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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소나기’를 좀비물로 개작하다니, 왜

등록 2022-10-14 05:00수정 2022-10-14 11:42

아폴론 저축은행
차무진 지음 l 요다(2022)

10월 초인데, 벌써 내년의 트렌드 예측이 나왔다. 김난도 교수가 이끄는 서울대 소비 트렌드 분석 센터의 <트렌드 코리아 2023>에서는 앞으로 올 위기 상황에서는 ‘교토삼굴’의 태도로 버텨나가야 한다고 충고한다. 꾀 많은 토끼가 굴을 세 개 뚫듯이 빠져나갈 길을 여럿 가져야 한다는 뜻이다. 2022년에도 아직 이룬 게 없는데, 2023년이라니. 게다가 돌파구 한 개를 마련하기도 빠듯한데, 세 개나 필요하다니. 올해도 글렀지만 내년이라고 트렌드에 맞게 살아갈 수 있겠는지 쓸쓸한 마음부터 드는 가을이다.

차무진의 <아폴론 저축은행>을 읽으면 이것이 장르 문학의 ‘교토삼굴’인가 싶은 생각이 든다. “라이프 앤 데스 단편집”이라는 부제의 소설집에는 섬세한 문체의 영리한 단편 여덟 편이 실렸다. 모두 도입에서는 예측할 수 없는 반전이 있는 멀티 장르 소설들이다. 산사에 맡겨진 어린 형제의 애틋한 사연을 다룬 서정적 단편인가 싶었던 ‘그 봄’은 막바지에 이르러 오컬트적인 색채를 띤다. 마포대교의 자살 시도자들을 감시하는 경찰의 이야기인 ‘마포대교의 노파’에는 영화 <식스 센스>처럼 죽은 자들을 볼 수 있는 인물이 나온다. 표제작인 ‘아폴론 저축은행’은 스티븐 킹 소설 같은 느낌의 환상 은행을 만난 가장이 가족을 지키려고 애쓰는 이야기이며, ‘상사화당’은 임진왜란 이후를 배경으로 저주 주술의 도구였던 염매를 소재로 한 역사 소설이다. ‘서모라의 밤’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떠났다는 서복 전설을 한국인의 소울푸드 떡볶이와 결합한 에스에프(SF)이며, ‘비형도’는 신라 시대 비형랑 설화와 한국 군대의 가혹 행위, 고어한 살인극을 접합한 환상 소설이다. ‘이중선율’은 시신을 싣고 달리는 구급차 속 삶과 죽음이 교차하는 순간을 음악적으로 묘사하며, ‘피, 소나기’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황순원 작가의 <소나기>를 좀비물로 개작하였다. 이제 한 가지 장르만으로는 웬만큼 단련된 독자들의 관심을 끌 수 없다. 하나의 작품이 여러 장르적 특성을 통합할 수 있을 때 돌파구가 마련된다. 이것이 첫 번째 굴이다.

부제처럼 모든 단편은 삶과 죽음의 문제를 다룬다. 더 정확히는 죽음으로써 삶의 형태를 그려낸다. 살아 있다는 것은 죽음과 맞닿아 있다는 뜻이며, 이 소설집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그 경계선에 서 있다. 오컬트를 전혀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할지라도 실감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다. 죽음 앞에서 삶은 더 선명해진다는 것, 이 성찰이 차무진 작가가 마련한 두 번째 굴이다.

작가의 장편 <인 더 백>과 유사하게 이 소설집도 현대 가부장제의 잔해 속 어른 남성의 책임을 강조한다. ‘그 봄’의 노스님, ‘비형도’의 중대장, ‘상사화당’의 옹기장이, ‘이중선율’의 구급차 운전사는 죽음의 문턱에서 헤매는 이들을 구하려는 대리 아버지이고, ‘아폴론 저축은행’과 ‘서모라의 밤’은 자식을 살리려는 아버지가 주인공이다. 새로운 형식 속에서 전통적 가족관은 더 강화된다. 뒤표지에 적힌 추천사의 표현처럼 이를 애잔하다고 할 수도 있겠다. 어떤 이는 보수적이라고 할 수 있겠다. 어느 쪽이든 과거의 가치가 그리웠던 독자들이 있다면 이것이 미묘하지만 세 번째 굴이 될 수도 있겠다.

박현주/작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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