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년 기대작 ] 인문 학술
김상봉, 이정우, 이삼성의 대작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주목
김상봉, 이정우, 이삼성의 대작
커밍스 ‘한국전쟁의 기원’ 주목
시대는 고단하지만 2023년 새해에도 인문 학술 부문 양서들이 풍성하게 독자들을 찾아간다.
국내서 분야에서 가장 눈길을 끄는 것은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의 대작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길)이다. 서양철학 역사에서 ‘신’을 처음으로 철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정립해 형이상학으로 통합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다. 지은이는 아리스토텔레스 주저 <형이상학>의 제12권을 번역해 주석을 달고 서양철학 2000년이 창출한 주석서를 샅샅이 검토해 서양 신학과 맞선다. 이 땅의 주체적 시각에서 서양 신학의 본질을 파헤친 200자 원고지 1만장에 이르는 방대한 저작이다. 또 철학자 이정우 소운서원 원장의 <세계철학사>(길)가 새해에 네 번째 권(‘현대편’) 출간으로 12년에 이르는 대장정을 마친다. 우리 철학자의 손으로 쓴 최초의 세계철학사다. 서양철학 중심의 세계철학사 서술 방식에 맞서 ‘동양철학’을 합당한 지위에 걸맞게 서술하여 진정으로 보편적인 세계철학사를 그려낸다. 200자 원고지 1만5000장 분량의 초대형 저작이다.
정치외교학자로서 동아시아와 한반도의 정치외교사를 드넓은 시야에서 탐사해온 이삼성 한림대 명예교수의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한길사)이 6월에 출간된다. 20년에 걸쳐 천착한 동아시아 대분단체제론의 결산이라 할 만하다. 국문학자 박희병 서울대 교수의 <한국 고전문학사 강의>(전 3권, 돌베개)도 9월중 독자와 만난다. 우리 고전문학을 통해 인간을 탐구하고 이해를 확장하는 대작이다. 중앙아시아사 연구 권위자 정재훈 경상대 교수의 <흉노 유목제국사>(사계절)도 상반기에 나온다. 최초의 유목제국이었던 흉노를 통해 유목국가의 성격을 확인하고 그 유산이 북아시아의 역사 전개와 세계사의 변동에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 고찰한다. 중국정치사상사 전문가 김영민 서울대 교수의 <논어 번역 비평>(사회평론)은 <논어>의 번역본들을 비판적으로 검토한다. 총 45종의 <논어> 번역을 자료로 삼아 번역의 문제를 짚고 대안을 보여준다. 창비는 창립 60돌을 앞두고 한국사상사의 걸출한 인물들을 살피는 ‘한국사상선’ 시리즈 1차분을 내놓는다. 정도전, 최제우, 김옥균, 안창호를 비롯해 주요 사상가 10인의 사상과 저작을 생동감 있는 언어로 전한다.
번역서 분야에서도 주목할 만한 책들이 쏟아진다. 먼저 눈길을 끄는 것이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전 2권, 글항아리)이다. 커밍스의 책은 1980년대에 제1권이 번역된 바 있는데 이번에 20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으로 완역된다. 커밍스가 새롭게 쓴 한국어판 서문도 실린다. 한국전쟁 연구자 정병준 이화여대 교수가 ‘아직도 이 연구를 넘어설 수 없다’고 자괴감 섞어 말했던 대로 한국전쟁의 기원에 관한 최고의 연구서로 꼽힌다. 문장마다 지은이의 깊은 사색이 담겨 있으며 한국 근대사, 해방전후사, 동아시아와 세계 정세, 미국의 당시 국내 사정을 긴밀히 연결해 한국전쟁이 왜 발발하게 됐는지를 규명한다.
미국과 중국의 패권 경쟁이 가속화하는 시대 흐름을 타고 중국 관련 저작들도 계속 출간된다. <중국은 어떻게 무너지는가>(원제 Danger Zone: The Coming Conflict with China, 부키)는 현재 미국 주류의 시각을 보여주는 저작이다. 이 책은 앞으로 10년 안에 미-중 관계가 최대의 위험에 이를 것이라고 전망한다. 핵심은 중국이 미국을 능가하지 못한 채 주저앉으리라는 진단에 있다. 2030년이면 중국은 경기 침체, 국제사회의 반감, 인구 위기, 해외 제공 차관의 부실화에 더해 권력 승계 위기에 직면할 것이라고 이 책은 전망한다. 도널드 트럼프와 조 바이든 정부를 잇는 미국의 패권 유지 전략이 그려내는 중국의 미래상을 엿볼 수 있다.
독일의 중국사 전문가 클라우스 뮐한의 <대청제국에서 시진핑까지 중국 근현대 통사>(너머북스)는 오늘의 중국을 만든 현대화 과정을 역사적으로 살피는 1000여쪽에 이르는 대작이다. 오늘날 중국과 세계가 직면한 문제들을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라고 할 만하다. 중국의 신좌파 학자로 명성이 높은 왕후이의 거작 <현대 중국사상의 흥기>(전 4권, 돌베개)는 현대 중국을 사상의 관점에서 깊숙이 들여다본다. 세계제국 몽골의 라시드 앗 딘이 쓴 최초의 세계사이자 역사학의 고전인 <집사>(사계절)도 제5권 ‘이슬람의 제왕’ 편 출간으로 마침내 완간된다. 김호동 서울대 동양사학과 교수가 러시아와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페르시아어 원본을 번역했다.
인류사의 고전으로 꼽힐 만한 저서들의 한국어판 출간도 눈에 띈다. 고대 스토아학파의 윤리학에 강력한 영향을 끼친 에픽테토스의 저작 전체가 서양 고전철학 전공자 김재홍 정암학당 연구원의 번역을 통해 그린비 출판사의 ‘고전의 숲’ 시리즈로 출간된다. 에픽테토스 자신은 저서를 출간하지 않았으나, 제자 아리아노스가 스승의 강의를 기록해 ‘강의’라는 제목으로 펴냈다. 김재홍 번역본은 이 강의록과 함께 아리아노스의 에픽테토스 철학 요약본 <엥케리디온>을 포함해 ‘강의’ 전체를 두 권에 담는다. 근대 물리학의 대명사인 아이작 뉴턴의 <프린키피아: 자연철학의 수학적 원리>(휴머니스트)도 4월에 출간된다. 이 책은 근대 과학 발전에 압도적 공헌을 한 책으로 평가받지만 국내에 변변한 번역서가 없었다. 이번 한국어본은 3권으로 된 원서 전체를 한 권으로 묶는다.
현대 서양 철학과 사상을 이끄는 저자들의 주요 작품도 잇따라 나온다. 칠레의 생물학자 움베르토 마투라나의 <자기생성과 인지>(갈무리)가 한국어 독자를 만난다. 마투라나는 ‘자기생성 체계’(autopoietic system)라는 개념으로 생물학을 혁신했고, 이후 인문사회과학 전반에 큰 영향을 주었다. 프랑크푸르트학파의 제3세대를 대표하는 악셀 호네트의 대작 <자유의 권리>(사월의책)도 눈여겨볼 만하다. 사회적 통합의 원리로서 자유를 재정초한 역작이다. 호네트는 평등의 민주적 원리에 기초한 자유야말로 진정한 자유임을 역설한다. 이 책을 통해 독자는 ‘자유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라는 이념의 가능성을 가늠해볼 수 있다.
인류학에 새바람을 불어넣고 있는 프랑스 인류학자 필리프 데스콜라의 <자연과 문화를 넘어서>(사월의책>는 자연과 인간을 분리하는 서구식 인식론을 비판한다. 레비스트로스의 <구조인류학> 이후 등장한 프랑스 인류학의 최고 걸작으로 꼽힌다. <우리는 결코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로 유명한 철학자 브뤼노 라투르의 <존재양식의 탐구>(사월의책)는 우리가 근대인이었던 적이 없다면 우리는 과연 무엇이었으며 어떤 가치를 계승해야 하는가 하는 물음에 답한다. 우리 시대의 독창적 사회철학자 낸시 프레이저의 <좌파의 길: 식인자본주의에 반대한다>(서해문집)는 자본주의를 새롭게 해석해 ‘식인자본주의’로 명명하고 이 자본주의의 식인성에 맞서는 이론적‧정치적 기획을 펼쳐낸다.
<역사의 종말>로 유명한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자유주의와 그 불만>(21세기북스)은 신자유주의의 문제점을 통렬히 비판하며 자유주의가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한다. 영국의 문화비평가 테리 이글턴의 <비극>(을유문화사)은 서양 고대 이후 현대까지 비극의 역사를 살피며 비극이 왜 필요한지를 이야기한다. <낭만적 거짓과 소설적 진실>의 저자인 프랑스 비평가 르네 지라르가 폭력의 구조를 이야기하는 묵시록적인 대담집 <클라우제비츠 완성하기>(한길사)도 나온다. 또 근대 경제학의 창시자 애덤 스미스 탄생 300돌을 맞아 자유주의 좌파의 시각으로 스미스를 재해석한 이언 로스의 평전 <애덤 스미스>(글항아리)가 독자를 맞는다.
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한겨레> 자료사진
김상봉 전남대 철학과 교수.
이정우 소운서원 원장.
미국의 정치학자 브루스 커밍스. <한겨레> 자료 사진
독일 철학자 악셀 호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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