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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책&생각] 모든 소리는 자서전이다

등록 2023-04-14 05:00수정 2023-04-14 10:40

이주혜가 다시 만난 여성

유리, 아이러니 그리고 신
앤 카슨 지음, 황유원 옮김 l 난다(2021)

‘로우’(Law)라는 이름의 남자에게 실연을 당한 ‘나’는 북부 황야에 사는 어머니를 만나러 간다. ‘나’는 <에밀리 브론테 전집>을 챙겨가는데, 에밀리는 ‘나’가 가장 좋아하는 작가이자 가장 두려워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어머니를 찾아갈 때마다 나는 에밀리 브론테로 변하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나’는 어머니의 집 부엌에서 에밀리 브론테를 읽으면서 동시에 어머니를 읽고, 창밖으로 보이는 ‘얼음으로 마비된 황야’를 읽는다. ‘나’가 읽는 책 속에서 히스클리프는 폭풍이 불어오는 와중에 덧창에 매달린 채 진심으로 사랑하는 연인의 유령을 향해 “들어와! 들어와!”라고 외치며 흐느끼지만, 책 밖의 ‘나’는 황야에서 불어오는 미친 바람을 막아주는 유리창 안쪽의 이 공간이 사실은 에밀리가 그토록 벗어나고자 했던 우리(cage)임을 깨닫는다.

에밀리 브론테는 감옥에 갇힌 여자를 화자로 삼아 이런 시를 쓴 적이 있다. “희망의 전령, 그가 매일 밤 내게로 오네/ 그리고 내 짧은 인생을 위해, 영원한 자유를 주네” ‘나’는 에밀리가 말한 이 자유가 무엇인지 궁금하지만, 비평가들이 흔히 해석하는 ‘죽음’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비평가나 주석가들은 에밀리의 감옥을 19세기 잉글랜드 북부의 차가운 황야에 있는 외딴 교구에서 살아가야 하는 목사의 딸에게 지워진 한계로 이해하지만, 어머니 앞에서 에밀리로 변하곤 하는 ‘나’는 그의 자유와 감옥을 그토록 납작하게 해석하고 싶지 않다.

시인이자 에세이스트, 번역가이자 고전학자인 앤 카슨은 시와 소설과 비평과 번역이라는 장르를 넘나드는 거침없는 창작활동으로 어느새 앤 카슨이라는 하나의 고유한 장르를 확립했다. 다섯 편의 장시와 한 편의 산문으로 이루어진 <유리, 아이러니 그리고 신>은 여는 시 ‘유리 에세이’에서 실연의 기억을 간직한 화자와 에밀리 브론테의 삶을 교차시키며 과연 자유란 무엇인가, 무엇에서 무엇이 해방되고자 함인가라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그러나 카슨은 다소 난해하게 구성된 것처럼 보이는 책 곳곳에 자신의 대답을 숨겨두었다(이는 에밀리가 거실에서 카펫을 비질하다가 자신을 향한 세상의 질문들을 카펫 아래로 밀어 넣는 장면과 겹쳐진다).

특히 책의 마지막에 수록된 산문 ‘소리의 성별’은 앤 카슨이 모처럼 직설적으로 써 내려 간 통렬한 주장이고 고전학자이자 번역가인 카슨만이 쓸 수 있는 글이기도 하다. 카슨은 그리스 신화와 문학, 종교의식에 나타나는 여성적 ‘비명’ 혹은 ‘올롤뤼가스’에 대해 남성 중심 사회가 얼마나 불안을 느껴왔는지 그 흔적을 파헤치고 그리하여 여성이 ‘입을 닫을 수밖에’ 없었던 사회적 배경을 소개한다. 카슨이 보여주는 고대의 문헌을 접한 현대의 독자들은 그 낯익음에 깜짝 놀랄지도 모른다. “감정에 휘둘리고 이성적인 자제력이 부족하다”며 침묵을 강요받아온 여성의 목소리에 대해 카슨은 “우리가 내는 모든 소리는 작은 자서전이다. 소리의 내면은 완전히 개인적인 것이지만 그것이 그리는 궤적은 공적이다”라는 문장으로 목소리를 뺏긴 이들의 감옥과 자기 목소리를 내는 자유에 대해 말한다. “모든 소리는 작은 자서전”이라는 카슨의 말을 알게 된 후라면 이제 에밀리 브론테의 <폭풍의 언덕>도 앤 카슨의 <빨강의 자서전>도 다르게 읽힐 것이다.

이주혜/소설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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