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시점에서 5·18 다룬 강풀의 ‘26년’
전두환은 여전히 호사 누리며 살고
일부에선 계속 ‘빨갱이’ 책동으로 믿고
광주의 모욕은 현재 진행형이고
아벨의 피는 여전히 울부짖는다
전두환은 여전히 호사 누리며 살고
일부에선 계속 ‘빨갱이’ 책동으로 믿고
광주의 모욕은 현재 진행형이고
아벨의 피는 여전히 울부짖는다
젊은 만화가 강풀이 5.18 민주항쟁을 주제로 한 만화 <26년>을 다음넷에 연재 중이다. 그는 인터넷 만화가 1세대로 젊은 감성에 강한 호소력을 행사하면서 <순정만화>, <바보> 등의 작품을 히트시킨 바 있다. 발표하는 작품마다 모두 영화화나 드라마 제작의 대상이 될 정도로 그의 작품은 뛰어난 대중성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그의 작품은 만만치 않은 작품성 또한 확보하고 있다. 그가 대사를 배치하는 방식, 등장인물들을 조명하는 방식 등은 기존의 만화 문법에서는 찾아보기 어려웠던 예술적 지향을 지니고 있다. 거기에 이 작가의 독특함은 탄탄한 내러티브에 실려 있다. 이 점은 이 작가가 반짝 인기를 누렸다가 사라지는 작가가 아니라 장수할 것이라는 것을 기대하게 한다.
그는 매우 일상적인 주제들과 평범한 인물들을 택한다. 굳이 표현한다면, 그의 주인공들은 모두 반영웅들이다. 그러나 그 일상성과 평범함은 그 이전 세대 만화가들처럼 어떤 결핍과 실패, 또는 낙오의 기호가 아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자리에 매우 건강하게 서 있다. 건강하게 서 있을 뿐 아니라, 이전 세대 만화가들이 이런 주제를 다루면서 흔히 빠져들어갔던 자학의 기호로부터 완전히 자유롭다. 그들은 빛나는 영웅이 될 능력이 없어서 반영웅이 된 것이 아니라, 의지를 가지고 그 위치를 선택하고, 기꺼이 그 위치에 만족하고, 적극적으로 의미부여를 하고 있는 듯하다. 그런 점에서 강풀은 매우 탈근대적인 작가이다.
그러나 이 익명의 개인들(강풀이라는 필명이 이미 암시하듯이)의 시시한 일상은 그 밑바탕에 존재의 어떤 기층에서 솟아오르는 근원적인 시정(詩情)의 빛으로 둘러싸여 있다. 그것은 우리가 산업사회를 살아오면서 어느 듯 잃어버린 어머니 대지의 따뜻한 감각을 떠올리게 한다. 그의 등장인물들은 거창한 관념을 나열하지 않는다. 그들은 단지 인간이 근원적 영감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았을 때, 생에 대해 저절로 확보하고 있는 비전에 대한 확신으로 조용조용 움직일 뿐이다. 어쩌면 그것이 더 확실한 인간 구원의 가능성이 아닐까? 어떤 철학도 어떤 이데올로기도 어떤 종교 독트린도 인간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이 확실해진 현대사회 안에서. 강풀의 주인공들은 지극히 평범하지만, 자신에게 다가온 문제들 앞에서 실존적 결단력을 발휘한다. 그들은 어떤 지식인보다도 더 확고하게 자신이 무엇을 해야 할지 알고 있다. 그것은, 어쩌면, 그들이 3공화국의 개발 이데올로기 이래 우리가 상실해버린 한국인의 건강한 대지적 상상력을 기억하고 있는 드문 영혼의 소유자들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우리가 영화 <웰컴 투 동막골>에서 즐겁게 확인할 수 있었던 빛나는 원초적 감성, 또는 자신의 선량함에 대한 확신에서 솟아나오는 사랑스러운 낙천성.
이제 몇 회 되지 않아서 <26년>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제목이 암시하고 있는 것처럼, 그리고 지금까지의 연재분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이 작품은 5.18 항쟁 당시가 아니라, 그후 26년이 흐른 현재의 시점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1980년에 그런 비극적인 일이 있었다. 그런데 그 비극은 그해 그 일로 끝나버린 것인가? 종신형을 받았던 전두환은 2년을 감옥에서 살고 사면되었다. 그는 통장에 29만원밖에 없다면서도 너무나 부유하게 잘 살고 있으며, 추징금을 낼 돈은 없지만, 그의 집 근처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 경찰들에게마저 촌지를 뿌릴 정도로 돈을 쓰는 품도 남다르게 크다. 시민들을 향해 총을 발사하라는 명령을 내린 책임자도 누구인지 밝혀진 바 없다. 5.18 항쟁에 참여한 시민들을 북한의 사주를 받은 불온세력으로 몰아붙였던 언론사들도 한마디 사죄의 말도 정식으로 한 바 없다. 어떤 특정한 지역에서는 여전히 5.18은 ‘빨갱이’들의 책동이었다고 믿고 있다. 그들은 무고한 시민들을 죽이고 정권을 찬탈했던 전두환을 아직도 칙사처럼 대우하고 있다. 경찰은 그가 타고 가는 자동차가 신호에 걸리지 않도록 신호를 조작하는 일마저 해준다. 대체 무엇이 끝났다는 말인가?
만화의 전면에 당시 계엄군이었던 김일병이 등장한다. 그는 자신이 쏘아 죽인 시민에 대해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을 지니고 살아왔다. 그는 이창동 감독의 <박하사탕>의 김영호와 비슷하게 설정된 인물이다. <박하사탕>의 김영호는 광주에서의 살인이라는 자신의 행위를 결단력있게 대면하지 못하고 죄의식 안에서 위악적으로 회피하는 방식을 택한다. 그는 오히려 고문 경찰관이 되어, 자신의 때묻은 영혼을 더욱더 타락시킨다. 파멸은 예정되어 있었다. 관객은 <박하사탕>을 보면서 어떤 찜찜함을 느껴야 했다. 김영호에 관해 명쾌한 해석을 내릴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는 대체 가해자인가, 피해자인가. 그러나 이 세련된 선/악의 분리선 뭉개기는 썩 마음편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과연 광주는 그렇게 존재의 본질적 모호성이라는 형이상학적 관점에서 세련된 질문을 던져도 좋을 정도로 충분히 조명된 사건인가.
연재가 진행되는 것을 지켜보아야겠지만, 강풀의 선택은 좀더 단순 명확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그는 아마 좀더 막바로 문제를 향해 돌진할 것 같다. 어쩌면, 광주를 직접 겪은 세대가 아니라는 점이 그에게 좀더 과단성있는 포지션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26년 뒤에도, 사건은 끝나지 않았다. 광주의 직접적 피해자들은 조용히 땅 밑에 누워 있지만, 그 후손들은 아버지 어머니 세대의 고통을 이어받아 신음하고 있거나, 설명받지 못한 비극 앞에서 지극한 소외감에 시달린다. 광주의 모독은 여전히 진행형이기 때문이다. 광주의 모독이 끝나지 않는 한, 우리는 후손들 앞에 떳떳할 수 없다. 아벨의 피는 여전히 땅에서 울부짖고 있다.
김정란/상지대 교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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