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우리 안에 아이히만 있다

등록 2006-11-02 21:14수정 2006-11-02 21:44

유대인 학살 실무책임자 아이히만 재판 취재
그의 양심은 나치 명령을 따른 것일 뿐이지만
다른 사람 처지를 판단 못하는 ‘무사유’가
얼마나 가공할 일 빚는지 ‘악의 평범성’ 보여줘
커버스토리/한나 아렌트 대표작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출간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는 한국에서는 비교적 최근에 발견된 사상가다. 그의 지적 계보를 잇는 독일 철학자 위르겐 하버마스가 ‘의사소통행위 이론’으로 1980년대에 널리 알려진 데 반해, 아렌트는 1990년대 후반에 들어서야 그의 저작이 번역되기 시작했다. 아렌트의 사상에 알게 모르게 기대고 있는 ‘시민의 정치참여’가 이 땅에서 대중적 슬로건이 된 것을 감안하면, 그를 발견하기까지 시간이 너무 걸렸다고 해야 할 정도다. 그 뒤늦음을 만회하려는 듯 그의 주요 저작이 속속 우리말로 옮겨지고 있고, 탄생 100돌을 맞아 지난 달에는 아렌트 학술 심포지엄이 열리기도 했다.

그의 저작 가운데 가장 최근에 번역된 것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김선욱 옮김, 한길사 펴냄)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난이도 높은 그의 사상서 중에서 유일하게 대중적 저작이다. 1961~1962년 예루살렘에서 열린 나치 시대 유대인 학살 실무책임자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의 재판 과정을 이야기체로 풀어 쓴 것이 이 책이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아렌트에게 대중적 명성을 안겨 주었고 동시에 그를 엄청난 논란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었다. 이 저작은 책의 대중적 성격과는 상관없이 아렌트 정치철학의 핵심 주제를 포괄하고 있어 그의 사상을 살필 수 있는 용이한 통로를 제공한다.

감정 앞세우지 않은 이야기체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의 원고는 애초에 잡지 <뉴요커>에 연재한 기사였다. 1960년 5월 아르헨티나에 숨어 지내던 아이히만이 이스라엘 비밀경찰에 체포돼 예루살렘으로 압송되자 아렌트는 대학 강의를 중단하고 <뉴요커> 특파원 자격으로 그의 재판을 취재했다. <뉴요커>는 지식인들, 특히 교육 받은 뉴욕 사람들을 주요 독자층으로 삼은 대중 잡지였다. 독일 출신으로 나치 박해를 피해 미국에 정착한 유대인이라는 아렌트의 ‘신분’이 유대인 학살자 아이히만 재판의 현장 취재 기자라는 ‘신분’과 만나는 것만으로도 독자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아렌트의 글은 연재되자마자 유대계 사회의 거친 분노에 휩싸였다. 아렌트가 홀로코스트라는 참극의 희생자인 유대인의 고통에 동참하지 않고 있으며, 마치 자신은 유대인이 아니라는 듯 국외자처럼 사건을 대하고 있다는 것이 분노의 이유였다. 실제로 글 안에서 아렌트는 홀로코스트에 유대인 사회가 어떻게 협력했는지 밝혔을 뿐만 아니라, 그 야만의 집행자 아이히만을 묘사할 때도 감정을 앞세우지 않고 그를 이해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1961년 예루살렘 법정 피고인석에 선 아돌프 아이히만. 신변 보호용 유리관이 눈길을 끈다. 왼쪽은 1933년 27살 때의 한나 아렌트. 한길사 제공
1961년 예루살렘 법정 피고인석에 선 아돌프 아이히만. 신변 보호용 유리관이 눈길을 끈다. 왼쪽은 1933년 27살 때의 한나 아렌트. 한길사 제공
아렌트는 아이히만을 홀로코스트 범죄의 책임자라기보다는 희생자에 가까운 사람으로 그렸다. 그도 그럴 것이 아이히만은 ‘유대인 절멸’을 기획하고 교사한 사람들, 곧 히틀러를 정점으로 한 나치 지도부의 명령을 받은 처지에 있었던 사람이다. 그는 나치당의 강령도 알지 못했고 히틀러의 <나의 투쟁>도 읽지 않았다. 그의 직급은 나치 친위대의 중간관리자(중령급)에 지나지 않았다. 히틀러는 그를 대면할 기회가 없었을 가능성이 크며, 설령 대면했다 해도 아이히만의 이름은커녕 얼굴도 기억하지 못했을 가능성이 높다. 법을 준수하는 ‘건실한 시민’이었던 아이히만은 명령받은 일을 이행하는 것을 의무라고 느꼈고, 유대인 전문가로서 그들을 수용소에 배분하는 일을 착실히 수행했다.

‘양심’의 문제가 여기서 불거졌다. 아이히만은 자신이 범죄를 저지른다고는 생각하지 못했으며, 그의 양심은 상부의 명령을 정확히 행동에 옮기라고 요구했다. 그는 피고석에서 “명령받은 일을 하지 않았다면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대목에서 아렌트는 양심이란 타고난 것이 아니라 사회적 여건에 제약되고 자신을 둘러싼 환경 속에서 형성되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이상주의적 열정도 한몫

이상주의적 열정도 아이히만의 정신을 점유하고 있었다. 그는 유대인 독립국가 건설 운동인 시온주의에 열렬히 공감했으며, 그들이 이상주의자라는 점에서 자신과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다. 다만 그의 이상주의는 관념이 아니라 실천의 문제였고, 그것도 과격한 실천이라는 점에서 독특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이상주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이상주의자란 자신의 이상을 삶을 통해 실천하는 사람이었고, 자신의 이상을 위해서라면 어떤 사람이라도 희생시킬 각오가 된 사람이었다. 필요하다면 자신의 아버지마저도 죽음으로 보냈을 것이라고 경찰 심문에서 말했을 때, 그는 자신이 얼마나 이상주의자로서 살아왔는가를 보여주려 한 것이었다.”

그러니까 아이히만은 난데없이 나타난 악마가 아니라 자신의 삶을 규칙과 명령과 ‘주어진 이상’에 맞추려고 노력한 특별하지 않은 사람이었던 것이다. 아이히만이라는 인간형이 이렇게 분석되고 난 뒤, 이 책으로 하여 결정적인 의미를 띄게 된 ‘악의 평범성’이라는 말이 튀어나왔다. 아이히만은 스스로 악인이 되려고 한 적도 없었고, 반듯하고 올바른 사람으로 살려고 노력하기까지 했다. “아이히만은 이아고도 맥베스도 아니었고, 리처드 3세처럼 ‘악인임을 입증하기로’ 결심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전혀 깨닫지 못한 것이다.”

아렌트는 이 ‘순전한 무사유’, 곧 사유하지 않음이야말로 아이히만의 진정한 특성이라고 말한다. 그의 ‘생각 없음’은 바꿔 말하면, ‘다른 사람의 처지에서 사유하고 판단할 능력이 없음’을 뜻한다. 사회적 환경에 제약된 양심을 품고 이상주의로 무장하고서 이 ‘무사유’를 실천할 때 얼마나 가공할 일이 벌어지는지를 아이히만은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다. 아렌트는 다른 글에서 이렇게 밝혔다. “그의 행위가 아무리 괴물 같다고 해도 그 행위자는 괴물같지도 또 악마적이지도 않았다. 그의 유일한 특징은 어리석음이 아니라, 사유의 진정한 불능성이었다.”

아렌트는 정치의 영역을 시민들이 저마다 인격을 걸고 의견을 표출하여 경쟁하는 장으로 여겼다. 그 정치 공간에서 사람들은 상대방의 처지에서 사유하고 판단하는 훈련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말하자면 이상적인 공론장이다. 그런 정치의 장이 마련되고 강화할 때 아이히만과 같은 사례가 반복되지 않을 것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아이히만이 평범한 것은 우리가 언제든 그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렌트는 말한다. “우리 안에 아이히만이 있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차이와 평등의 정치철학’ 한나 아렌트 따라읽기 붐

한나 아렌트 저작의 한국어판은 10년 전인 1996년 처음 얼굴을 내밀었다. 그의 대표작인 <인간의 조건>(이진우·태정호 옮김)이 ‘한길그레이트북스’ 시리즈의 하나로 출간된 것이다. 1958년에 미국에서 나온 <인간의 조건>은 아렌트를 정치철학자로서 우뚝 세운 저작이다. 아렌트가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정치사상가로 평가받는 데 이 책이 기여한 바가 적지 않다.

이 책에서 아렌트는 그의 스승이자 연인이었던 마르틴 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실존주의를 재해석해 자신의 정치철학의 밑돌로 삼았다. 그는 인간에게 부여된 실존적 조건을 ‘복수성’ 혹은 ‘다양성’에서 찾았다. 인간은 서로 다른 차이의 존재이며 따라서 인간들의 삶은 전체로 볼 때 언제나 복수일 수밖에 없다. 다만 이 차이는 인간이라는 보편성의 지평 위에 놓여 있다. 그것을 아렌트는 평등이라고 불렀다. 다름이 없다면 인간은 교류하고 소통할 이유가 없으며, 평등하지 않다면 진정한 소통은 불가능할 것이다.

<인간의 조건> 출간 뒤 2000년대에 들어 ‘아렌트 르네상스’라 할 만한 현상이 벌어졌다. <혁명론>(홍원표 옮김, 한길사 펴냄) <과거와 미래 사이>(서유경 옮김, 푸른숲 펴냄)이 잇따라 나왔고, 1971년 저작 <정신의 삶1-사유>(홍원표 옮김, 푸른숲 펴냄)과 <칸트 정치철학 강의>(김선욱 옮김, 푸른숲 펴냄)도 출간됐다. 아렌트는 애초에 <정신의 삶>을 ‘사유’ ‘의지’ ‘판단’이라는 칸트의 세 기획에 맞추어 3부작으로 내려고 했는데, 그 중 ‘정신’편만 완성했다. 유고를 갈무리한 <칸트 정치철학 강의>는 이 기획의 ‘판단’ 편에 해당한다.

‘의지’편은 현재 번역중이며 또 아렌트에게 학자로서 첫 명성을 안겨준 1951년 저작 <전체주의의 기원>도 한국어판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이밖에 <정치의 약속> <공화국의 위기> 등이 푸른숲에서 나올 예정이다. 이들이 빛을 보면 한나 아렌트 르네상스의 명실상부한 실체를 갖추게 되는 셈이다. 김선욱 숭실대 교수가 쓴 <정치와 진리>(책세상 펴냄) <한나 아렌트 정치판단이론>(푸른숲 펴냄)은 국내 아렌트 전공자가 쓴 아렌트 해설서로서 아렌트 사상을 이해하는 데 길잡이 노릇을 해준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