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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스포츠 중계 끝나면 시가 찾네 술이 찾네

등록 2006-11-30 23:53수정 2006-12-01 00:12

이도윤 피디의 서재는 99% 시집으로 채워져 있다. 시인이니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어디 시인이라고 시만 읽고 쓰겠는가. 그러니 ‘순도높은 콜렉션’이라고 부를 수밖에. 하지만 그의 시집들은 대기실의 신부처럼 잠시 그의 서재에 머무를 따름이다. 내년쯤 곡성의 시집박물관으로 두번째 시집보낼 계획이다. 나머지는 아마도 언젠가 모습을 드러낼 시집카페에 전시할 생각이다.
이도윤 피디의 서재는 99% 시집으로 채워져 있다. 시인이니 그러려니 할 수 있지만 어디 시인이라고 시만 읽고 쓰겠는가. 그러니 ‘순도높은 콜렉션’이라고 부를 수밖에. 하지만 그의 시집들은 대기실의 신부처럼 잠시 그의 서재에 머무를 따름이다. 내년쯤 곡성의 시집박물관으로 두번째 시집보낼 계획이다. 나머지는 아마도 언젠가 모습을 드러낼 시집카페에 전시할 생각이다.
오월 아픔으로 80년대 등단한 자칭 ‘삼류시인’
월드컵 자막에 자작시 내보내 이색 중계
스승 조태일 시인 추모 ‘시인’지 사비 털어 재복간
“나는 보관자”…사모은 희귀본 ‘시집박물관’에
한국의 책쟁이들/⑭ ‘시집 모으는 시인PD’ 이도윤씨

(…) 우리는 지지 않았다/북소리 높여라 장미 같은 피들아/너는 이미 낡은 역사 위를 딛고 선/나의 젊은 발/새 이파리로 하늘을 걷는/나의 푸른 발/우리 언제 이처럼 하나로/뜨겁게 서로를 부른 적 있었더냐/ (…) 머리 떨구지 마라/네 뜨거운 피가/나를 젊게 하느니/우리 모두 젊어졌느니/너는 결코 지지 않았다/우리 붉은 함성으로/더 뜨거운 세상을 울리자/흔들어놓자/우리의 푸른 아들아.

2002년 월드컵축구 4강전. 한국이 독일에 패한 뒤 중계를 마친 엠비시 텔레비전에는 ‘우리들은 지지 않았다’는 제목의 시가 자막으로 흘렀다. 화면은 똑같지만 엠비시가 월드컵경기 중계방송 시청률에서 다른 두 방송사를 압도한 데는 여러 요인이 있을 터. 그 가운데 경기 전후 화면에 시편을 덧붙인 것이 승리의 감격과 패배의 아쉬움에 품격을 더한 것도 한몫했다. 당시 제작팀 차장이었던 이도윤씨의 아이디어로 삽입한 시들은 중계와 중계 사이에 이씨 자신이 밤을 도와 쓴 것이었다.

이런 상상력의 힘은 2006년 월드컵에도 이어져 차범근 감독에다가 아들 차두리까지 해설자 자리에 앉혔다. 2대에 걸친 경험과 입심은 시청자를 엠비시 채널에 붙들어 두었다. 특히 차두리의 솔직한 실수담, 뒷얘기 등 신세대다운 말투는 젊은 층을 쓸다시피 끌어들였다.

엠비시 스포츠제작단의 스포츠제작팀장 이도윤(49)씨의 명함에는 ‘시 전문지 <시인> 편집인’이 병기돼 있다. 직업은 방송 피디지만 신분은 자칭 ‘삼류시인’이다. 1985년 <시인>을 통해 등단한 이씨는 1993년 첫 시집 <너는 꽃이다>(창비)를 내고 2005년 12년 만에 두번째 시집 <산을 옮기다>(시인)를 냈다. 치렁치렁 은색머리에 개량한복 차림의 그는 사무실 안에서 단연 튄다. “보도국 근무 2~3년을 빼면 17년동안 줄곧 스포츠 제작단에서 근무했어요. 스포츠 중계는 시간이 정해져 있어 그 시간이 끝난 다음에는 나만의 생활을 가질 수가 있지요.” 낮이 피디의 시간이라면 아침과 저녁, 그리고 그 사이의 밤은 시인의 몫이었다.

“한 권 낼 때마다 1천만원 깨져요”

첫 시집은 민중시풍. 등단작인 ‘오월의 꽃’에 닿아있다. 그것은 사랑이었다 노여움/깊이 심장을 열고 떨리는/이파리 모두어 컴컴한 밤의/가늠자 위에 개화한 함성/끝내 굳은 입술에 패인/이빨자욱 피의 목소리 죽어/머리 풀고 끌려간 형제들/향기 뒤섞인 꽃이파리/손목에 질끈 이마에 질끈/아아 죽음에 질끈 동여맨/피묻은 죽음의 그리움 다시/피어날 오월의 꽃. 86년 입사와 더불어 방송파업에 연루되고 91년에는 4~5개월동안 잠수를 탔다. 광주의 연합문학서클인 ‘용설난’ 출신인 그는 광주항쟁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살아남은 자의 죄책감은 민중시풍으로 고스란히 첫 시집에 박혔다. “민중시는 특이한 현상이었죠. 시는 근본적으로 울림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속박에서의 자유 특히 틀에 갇힌 현대인의 고뇌 등을 형상화하는 게 시인의 몫이죠.” 일제 때에는 해방이 최고 목표라면 분단시대인 지금은 통일이 지향점이 돼야 한다고 본다.

지난해는 북에서 열린 6·15민족문학인대회를 다녀왔다. 문인들과 함께 평양, 백두산, 묘향산 등을 둘러본 그는 돌아와서 60분 다큐 ‘백두산에 바치는 시’를 만들었다. 1990년에는 사하라를 다녀왔다. 그 곳에서 그는 하늘, 땅, 물 외에 사막을 하나 더 보았다. 쏟아질 듯한 왕별, 뒹구는 나무화석, 금새 생겼다 없어지는 모래언덕 등. 마치 무엇에 홀린 듯했다. 평양도 사막도 그로 하여금 시를 쓰게 하지 못했다. 첫시집과 두번째 시집 사이를 120년이라고 표현하는 이면에는 시적방황이 잠재돼 있다.


어쩌면 그의 시한(詩恨)은 다른 방식으로 표출됐는지 모를 일이다. 그는 2003년 9월7일자로 시 전문지 <시인>을 재복간했다. 85년 <시인>의 편집인이었던 조태일 시인이 이씨를 시의 세계로 끌어올렸다. 무뚝뚝하지만 속정 깊은 조 시인은 그의 ‘문학적 부친’이었다. 조 시인이 20대인 1969년에 창간한 월간 <시인>은 1년 뒤 강제 폐간되고 83년 무크지로 복간되었다가 87년 또다시 같은 운명을 겪었다. 1999년 타계 때까지 조 시인은 재복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이씨가 재복간 날짜를 조 시인의 타계일인 9월 7일에 맞춘 것은 <시인>의 재복간이 조 시인에 대한 헌사임을 보여준다. “애초 추모집으로 내려다 아예 잡지를 복간하자고 뜻이 모아졌어요.” 조태일, 신동엽, 김남주, 김현승, 박봉우 등 권마다 시인특집을 싣고 생명, 평화, 남북작가회의 등의 주제를 조명했다. 특히 신작시들은 모두 육필 원고를 영인해 실었다. “컴퓨터화 시대에 인터넷이 판을 칠수록 정신적인 작업인 시는 손맛이 느껴지는 육필이 제격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껏 다섯 권을 내고 여섯 권째를 준비 중인 그는 줄곧 하드커버에 호화장정을 고집해왔다. 매호 제호는 시단 원로의 휘호를 받아 펴냈다. ‘개성있게 가자’, ‘망하더라도 화려하게 망하자’의 생각에서다. “한 권 낼 때마다 일천만원씩 깨져요.” 처음에는 5천부를 찍다가 셋째 권부터는 2천부로 줄였다.

1년에 한번 ‘108일 금주’하는 술꾼

돈벌이나 문단권력과 무관한 반년간 잡지를 생떼같은 돈을 들여 펴내는 것은 그의 대책없음과도 무관치 않다. 82년 결혼해 지난 1999년 여의도 시범아파트를 구입하기까지 청파동, 포일리(평촌), 여의도를 17~8년 전세로 떠돌았다. 그동안 책값, 술값으로 나간 돈이면 집 두어 채는 샀을 거라는 게 부인 강문자(48)씨의 말이다. 술을 마시면 스스로 전생에 황제였다고 뻐길 만큼 남들과 비교해 결코 빠질 게 없다는 그한테 단 한 가지 빠진 게 적금통장일 정도이니…. 좋은 책을 만나면 값의 고하를 안 따지고 호주머니를 턴다. 인사동 고서경매장을 멋 모르고 따라갔던 아내는 ‘쥐똥 묻은 책’이 1만원으로 시작해 백여만원에 이르도록 남편이 계속 손들어 응찰하는 걸 보고 속이 뒤집히기도 했단다. 이사할 때 책짐을 싸던 한 인부는 짐옮길 걱정에 끊었던 담배를 빼물더란다. 인터넷을 애용하는 지금과는 달리 이씨는 얼마 전까지 헌책방을 순례했다. 헌책방에서 박봉우의 <겨울에도 피는 꽃나무>를 싼 값에 사고는 책자랑에 술값이 더 들기도 했다. 아내는 두세 시간 괴로운 벌을 선 뒤로는 ‘절대’ 따라가지 않는다. 엠비시 구내서점에서는 그가 가장 큰 손님이다. 장기출장 때면 초판을 놓칠세라 특별히 부탁해둔다.

그렇게 모아진 시집들은 2003년 <시인> 복간과 더불어 개관한 조태일기념관 부설 시집박물관에 내려보냈다. 그 가운데는 최남선, 이용악, 정지용, 설정식 등 희귀본이 많이 포함돼 있다. 13억이 든 기념관은 전남 곡성군 태안사 경내 4680㎡ 터에 지상 2층 419.49㎡ 규모로 세워졌다. 그 절은 조 시인의 부친이 주지로 있던 곳으로 조 시인은 거기서 소년 시절을 보냈다. 이씨가 시집, 특히 초판 시집에 빠져있는 것을 아는 지인들은 그에게 시집을 아낌없이 넘겨준다. 보람있게 쓰일 것을 알기 때문이다. 내년께 또 한번 박물관으로 책짐을 실어내릴 예정이다.

고쳐 쓴 시가 완성되었다고/술 취한 시인이 전화를 해온 흐린 저녁/낯 모르는 여인이 내 휴대폰에 문자를 보내왔다/‘네가 시인이냐?’/‘너 같은 녀석이 시인이냐?’/단호한 그 글씨를 바라보며/나도 나에게 묻는다/‘너는 세상을 울고 있는가?’(‘나의 스승’ 부분) 쓰여지지 않는 시로 불면의 밤을 보낸 날은 인사동 술집에서 빈 술병을 늘어놓는다. 그즈음 주머니 속 글씨들은 거리로 도망쳐 시가 되고 그는 시에 대고 방뇨를 한다. 언젠가 대낮에 광화문 이순신 동상에 오줌을 눠 경범죄로 붙들려 가기도 했다. 고광헌 시인은 이씨를 책쟁이라기보다 술꾼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는 일년에 한차례 ‘108일 금주’를 한다. 스승 조태일을 따라.

고서경매장서 100여만원 응찰도

초겨울 밤 은행나무가 잎을 마구 떨구는 여의도 이씨의 집. 서재는 꺼멓게 세월이 더께앉은 시집들이 책꽂이에 꽂히고 바닥에 쌓여 아우성이다. 그 흔한 사인볼 하나 없는 거실 책장에는 시집 귀중본이 곱게 모셔져 있다. 일고여덟 권 남았다는 서정주의 <화사집> 초판을 비롯해 이용악의 <낡은 집>, 임화의 <현해탄>, 임학수의 <후조> 등을 조심스럽게 펴보였다. 일일이 비닐 포장을 했다. ‘한잔 하세 노래가 사람이더군’. 고은 시인의 휘호가 문인끼리의 교유를 짐작케 한다.

“책을 모으다 보면 굉장히 책을 아끼게 됩니다. 나는 보관자일 뿐입니다. 그중에서 잘 보관하는 사람이죠. 나에게 온 책들은 주인을 잘 만난 셈이구요.” 표지가 떨어져나간 신동엽의 <아사녀>. 하드커버 제본하고 김지하의 글씨와 그림으로 표지를 만들었다. 문우서림 김영복씨가 선본인 자기 것과 바꾸자는 것을 거절했단다.

“우리 같은 사람이 있으니, 책이 세대를 건너 전해지는 거죠.”

아시안 게임 중계차 도하로 떠나는 그는 틈틈이 읽을 거라고 최근에 나온 문태준, 김사인, 황동규의 시집을 챙겼다. 그는 아무래도 서울을 비우는 스무날 동안 어떤 시집 초판이 나올까 궁금해 할 것이다. 어쩌겠는가. 깊이 든 병인 것을.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기사작성 도움 이시내(서강대 영문과 4학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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