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봉/문학전문기자
최재봉의 문학풍경
〈나그네〉 〈윤사월〉의 ‘청록파’ 시인 박목월이 맨발에 ‘난닝구’ 바람으로 마루에 퍼질러 앉아 겸연쩍은 듯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다. 그 앞 봉당에는 남녀 흰 고무신 몇 켤레와 구두가 놓여 있고, 신발들 사이에는 개 두 마리가 주인과 비슷한 표정을 짓고 앉아 있다. 이 사진을 찍은 육명심(74)씨는 박목월의 시 〈가정〉을 사진에 대한 설명 삼아 제시했다.
“지상에는/ 아홉 켤레의 신발./ 아니 현관에는 아니 들깐에는/ 아니 어느 시인의 가정에는/ 알 전등이 켜질 무렵을/ 문수(文數)가 다른 아홉 켤레의 신발을.//(…)// 미소하는/ 내 얼굴을 보아라./ 얼음과 눈으로 벽을 짜올린/ 여기는/ 지상./ 연민한 삶의 길이여./ 내 신발은 십구문반.”(〈가정〉 부분)
〈육명심의 문인의 초상〉(열음사)은 육씨가 촬영한 문인 71명의 사진과 그에 덧붙인 짧은 글들로 이루어졌다. 대학 스승이었던 박두진의 시집용 사진을 찍은 것이 계기가 되어, 주로 70년대 초중반 시인들의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구상 김춘수 김종삼 박봉우 박재삼 오규원 등 작고 시인들과 신경림 정진규 박제천 강은교씨 등 여전히 현역으로 활동하는 시인들이 섞여 있다. 소설가 박종화 선우휘 이범선, 그리고 이호철 송기숙 천승세씨가 포함됐는가 하면, 국어학자 이희승과 ‘국보’ 양주동, 극작가 오태석씨도 들어 있다.
고은 시인은 원고지와 재떨이, 이불과 베개가 한껏 널린 방 안에 앉아 호탕하게 웃는 모습으로 카메라에 잡혔다. 육씨의 설명으로는 두 사람이 동갑이므로 서로 말을 놓기로 해 망설이던 끝에 그가 먼저 “야! 고은. 고은아!”라고 크게 외치자 시인이 방 안이 떠나가도록 파안대소하는 장면을 포착한 것이라 한다. 웃는 시인의 얼굴 뒤로 벽에 붙여 놓은 ‘금주(禁酒)’ 두 글자가 인상적이다.
뒷간에서 볼일을 보듯 쭈그리고 앉은 미당 서정주의 사진에 대해서는 동료 문인의 항의도 있었노라고 육씨는 밝혔다. 그렇지만 예술가의 후광을 벗어던지고 인간의 속살을 내보이는 문인들의 사진은 독자들에게 큰 즐거움을 준다. 얼마 전 작고한 수필가 피천득 선생이 강아지풀들 사이에서 소녀처럼 곱게 포즈를 취한 사진은 고인의 생전 품성을 손에 잡힐 듯 보여준다. 놀이터 벤치에 널브러진 사내를 뒤로 한 채 그네의 쇠사슬 사이에 서서 굳은 표정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장발의 조태일 시인, 모교인 연세대 교정에 선 ‘청년 시인’ 신대철씨의 모습은 세월의 무상함을 실감케 한다.
‘눈물의 시인’ 박용래는 어떤가. 술 한잔을 마셨다 하면 어김없이 훌쩍거리며 울었고, 술을 마시지 않은 적이 드물었던 그가, 아마도 술이 들어가지 않은 상태에서, 양복에 넥타이까지 잡숫고 수줍은 듯 다소곳하게 찍힌 사진이 정겹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압권은 〈귀천〉의 시인 천상병이다. 이른바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정보부에 끌려가서는 혹독한 고문 끝에 온몸이 만신창이가 된 채 풀려난 뒤 한동안 실종되었다가 행려병자 시설에서 발견되었던 그다. 육씨의 카메라에 잡힌 그는 번듯한 옷차림에도 불구하고 한껏 풀이 죽은 채 눈을 내리깐 것이 흡사 넋이 나간 몰골이다. “이 사진을 똑똑히 보아라. 이렇게 폐인이 되어 망가진 모습을…. 누가 천상병 시인을 이 지경으로 만들어놓았는가!” 카메라를 든 육씨가 절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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