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석 / 영산대 교수
김용석의 대중문화로 철학하기 / 아트 슈피겔만 〈쥐2〉
아트 슈피겔만의 〈쥐〉 제1권은, 앞으로 다가올 공포를 예고하는 어린 시절의 회상으로 시작한다. 그 안에는 아버지의 과거 경험이 전하는 명시적 공포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기묘한 관계에 묵시적으로 존재하는 섬뜩한 느낌이 병행 공존한다. 아버지는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해 울면서 집으로 돌아온 어린 아들에게, “친구? 네 친구들? 그 애들을 방 안에다 먹을 것도 없이 일주일만 가둬놓으면 그땐 친구란 게 뭔지 알게 될 거다”라고 냉담하게 말한다. 〈쥐 1〉은 또 다른 억압의 주체로서 아버지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성장한 아들의 뒷모습으로 끝난다. 그 뒷모습의 은유는 ‘억압을 경험한 자아가 억압을 재생산한다’는 피상적이고 상투적인 해석에 머물도록 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의 경험과 관계없이도 억압의 가능성이 편재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이에 비해 〈쥐 2〉는 훨씬 부드럽게 시작해서 감동적으로 끝난다. 아트가 프랑스인 아내와 유대인 사회의 차별과 편견에 관해 풍자적인 대화를 나누는 오늘의 이야기로 시작해서, 아버지가 아우슈비츠를 빠져나온 뒤 어머니와 감격의 재회를 하는 것으로 부친의 회고를 끝맺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화 전체를 관통하는 이야기는 아우슈비츠에서 겪은 것들이다.
그 경험은 너무도 끔찍해서 쥐와 고양이라는 작은 동물 캐릭터로 묘사된 만화의 ‘미니어처 효과’가 아니라면 도저히 눈뜨고 볼 수 없을 것이라는 느낌을 준다. 이런 점에서 아트는 만화에 담을 수 없는 주제를 다룬 게 아니라(“휴. 내 칠흑 같은 꿈보다 더 비참했던 현실을 재구성하려는 게 얼토당토않게 여겨지는 때도 많아. 그것도 만화로 말야!”), 그 주제를 만화에 담음으로써 소통의 곤혹스러움을 이겨낼 수 있었는지 모른다.
아우슈비츠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고통의 극치를 보여준다. 그 고통의 현장은 아버지의 회고에서처럼 동료의 죽음을 무덤덤하게 말하게 할 정도이다. “난 그를 다시 보지 못했어. 아마 굴뚝으로 나간 것 같아.”(그것은 시체 소각장의 굴뚝을 가리킨다). 철학자 테오도어 아도르노는 그 고통의 의미를 이렇게 말한 바 있다. “고문당하는 자가 비명 지를 권리를 지니듯이, 끊임없는 고통은 표현의 권리를 지닌다. 따라서 아우슈비츠 이후에는 시를 쓸 수 없으리라고 한 말은 잘못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보다 덜 문화적인 물음, 즉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살아갈 수 있겠는가, 우연히 그것을 모면했지만 합법적으로 살해될 뻔했던 자가 제대로 살아갈 수 있겠는가 하는 물음은 잘못이 아니다.”
누구보다도 ‘아우슈비츠 이후’의 문제에 대해 치열한 성찰을 했던 이 철학자에게 “고통을 명백히 들추어내고자 하는 필요성이 모든 진실의 조건”이라는 명제는 당연하다. 그는 칸트의 정언명령을 “아우슈비츠가 되풀이되지 않고 그와 유사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생각하고 행동하라!”는 히틀러 이후의 새로운 정언명령으로 변형시키기까지 한다.
그런데 만화가 아트에게는 ‘아우슈비츠 이후’에도 이런 정신적 단호함이 없다. 그는 우울한 표정으로 아내에게 말한다. “내 자신이 아버지와의 관계에 대해 아무 의미도 찾지 못하고 있으면서 어떻게 아우슈비츠의 의미를 찾을 수가 있지? 대학살에 대해서도 말야?” 더구나 그는 〈쥐 1〉의 대성공 이후 몰려든 기자들이 만화의 메시지에 대해 물을 때도 “메시지요? 모르겠는데요. 저, 전 이걸 어떤 메시지 하나로 축소하려는 생각이 없었습니다”라고 답한다.
〈쥐 2〉에 그려 넣은 이 인터뷰 장면은 고통의 역사에 대한 피상적 해석들을 단박에 날려 버린다. 얼굴에 ‘쥐 가면’을 쓰고 만화 제도판 앞에 앉아 있는 작가의 밑에는 비쩍 마른 시체들이 수북이 쌓여 있지 않은가! 그것은 아우슈비츠에서나 볼 수 있는 시체들이다. 그 위로 파리들이 붕붕 날고 있다. 그런데 기자와 카메라맨들은 그 시체들을 밟고 서서 인터뷰 공세를 펼친다. 아트의 몸집은 점점 작아져서 어린아이만해진다.
기자들이 모두 가 버리자, 아트는 정신과 의사 파벨을 찾아간다. 그는 아우슈비츠의 생존자다. 아우슈비츠가 어땠었냐는 아트의 질문에 파벨은 개처럼 달려들며 이 한마디로 답한다. “왕!” 그러고는 차분히 말한다. “휴우. 당신 만화 얘길 하는 건 아니지만 지금까지 대학살에 대해 얼마나 많은 책들이 쓰여졌는지 봅시다. 무슨 소용이 있었죠? 사람들은 변하지 않았어요. 어쩌면 더 새로운 대규모의 학살이 필요할지 모르지요.” 아우슈비츠의 가능성은 편재한다. 우리는 역사적 경험 때문에 또 다른 아우슈비츠를 우려하는 게 아니다. 아트가 만화에서 재치 있게 표현했듯이, 그가 그려낸 것은 ‘쥐’들이 억압당하고 학살당하는 ‘마우슈비츠’(Mauschwitz)인 것이다. 쥐 가면 뒤에 숨어 있는 인간의 얼굴이 품고 있는 어두운 진실을 그 누가 다 알겠는가.
김용석 / 영산대 교수 anemos@ys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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