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규/자유저술가 저자
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오셀로〉를 통해서 본 ‘사랑’의 의미
질투 없는 사랑이 있을까, 사랑 없는 질투가 있을까? 이런 생각은 지금도 사랑에 빠진 젊은이들 사이를 떠돌아다닌다. 그렇다. 보기에 따라서 사랑과 질투는 동전의 앞뒷면 같다.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걸작 〈오셀로〉를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오셀로는 질투에 눈멀어 아름답고 순결한 아내 데스데모나를 살해했다. 그리고 자신의 질투가 오직 사랑에서 나왔다고 주장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하지만 그것이 과연 사랑이었을까? 대답은 우리가 사랑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려 있다.
사랑에 대한 한 가지 뛰어난 설명이 플라톤의 〈향연〉에 나온다. 에로스의 출생 신화다. 에로스는 풍요의 남신 포로스와 결핍의 여신 페니아의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래서 그는 어머니를 닮아 모든 것에서 가난하고 결핍된 자다. 하지만 아버지의 풍요를 닮으려고 끊임없이 다가가는 자다. 여기에서 상대에 대한 영원한 동경과 열병적 그리움이라는 사랑의 본성이 나왔다. 그런데 중세 신학자 아우구스티누스는 에로스의 이러한 본성을 ‘탐욕적’이라고 표현했다. 에로스는 자신의 풍요로움을 위하여 상대를 동경하고 연모하지만 결국에는 그것을 빼앗아 소유하려는 탐욕이라는 주장이다.
흥미롭게도 진화심리학이라는 최신 학문에서도 같은 주장이 나왔다. 이들 연구를 따르면, 사랑은 짝을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으로서 우선 성적 욕구로 나타나지만 곧바로 더 내면적인 것까지 소유하려는 욕망으로 연결된다. 먼저 육체를 소유한 다음에 마음과 영혼까지도 빼앗아 가지려는 집요한 탐욕이 사랑이다. 이런 소유욕의 바탕에는 짝이 떠날지 모른다는 불안이 언제나 자리하고 있는데, 바로 여기에서 질투가 나온다.
그래서 진화심리학자들은 질투를 ‘짝을 잃을지 모른다는 두려움 또는 짝이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었거나 맺을지 모른다는 불안감으로 인해 나타나는 불편한 감정’이라고 정의했다. 한마디로, 상대를 완전하고 철저하게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서 생기는 감정이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질투는 사랑의 다른 얼굴에 불과하다는 말이 맞다. 또한 오셀로의 주장도 옳다. 그는 아내를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에 캐시오에게 그녀를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불안감과 두려움에서 질투해서 죽였다.
하지만 모든 사랑이 다 그런 것은 아니다.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랑에 대한 설명이 있다. 〈성경〉에 보면,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가르쳤다.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질투와 시기를 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무례히 행하지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행하지 아니하며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고린도 전서 13 : 4~7) 이런 사랑은 상대를 소유하려는 이기적인 욕망이 아니다. 오히려 상대를 위하고 보살피려는 이타적 마음이다. 보통 아가페라고 한다. 아가페는 본래 상대의 존재 자체를 함께 기뻐하고 즐거워하는 사랑이다.
이처럼 사랑에는 적어도 두 가지가 있다. 에로스와 아가페다. 그렇다면 우리가 추구해야 할 사랑은 어떤 것일까? 어려운 질문이다. 왜냐하면 에로스는 너무 탐욕적이지만 자연스러운 데 반해 아가페는 매우 이상적이지만 부자연스럽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의 사랑은 보통 이 둘 사이에서 시계추처럼 진동하며 방황한다. 그런데 귀담아 들어둘 말이 있다. 정신의학자 에리히 프롬이 〈소유냐 존재냐〉에서 한 주장이다. 그는 현대인들의 정신질환적 특징으로 ‘소유욕’을 지적했다. 그것은 지난 이삼백 년 사이에 점점 더 병적으로 변해왔는데, 그 결과 오늘날에는 심지어 사랑하는 사람마저 하나의 소유물로 생각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실로 “너는 내 거야”라는 식의 요즈음 젊은이들의 어법이 그것을 증거한다. 그런데 어떤 대상을 소유한다는 것은 그 대상을 구속하고 지배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사랑하는 사람을 자신의 소유물로 간주한다는 것은 그를 구속하고 지배하려는 일종의 병적 증상이라는 것이 프롬의 주장이다.
그래서 그는 아가페를 권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유양식’으로서의 사랑이 아닌 ‘존재양식’으로서의 사랑이다. ‘갖는 사랑’이 아니고 ‘하는 사랑’이며, ‘받는 사랑’이 아니고 ‘주는 사랑’이다. 청마 유치환이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라고 노래한 바로 그 사랑이다. 프롬은 이것만이 진정한 사랑이라 했다. 그렇다면 비로소 드러나는 진실이 있다. 오셀로는 데스데모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본인은 사랑이라고 느꼈을지라도, 그것은 단지 병적인 소유욕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오셀로〉는 비극으로 끝났다. 그럼 생각해보자. 우리의 사랑은 어떠한가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연인이든 가족이든, 상대를 소유하고 지배하려고 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존재 자체를 기뻐하며 즐거워하고 있는가? 잠시 생각해보자. 자유저술가·〈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저자
그래서 그는 아가페를 권한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소유양식’으로서의 사랑이 아닌 ‘존재양식’으로서의 사랑이다. ‘갖는 사랑’이 아니고 ‘하는 사랑’이며, ‘받는 사랑’이 아니고 ‘주는 사랑’이다. 청마 유치환이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라고 노래한 바로 그 사랑이다. 프롬은 이것만이 진정한 사랑이라 했다. 그렇다면 비로소 드러나는 진실이 있다. 오셀로는 데스데모나를 사랑하지 않았다. 본인은 사랑이라고 느꼈을지라도, 그것은 단지 병적인 소유욕이었을 뿐이다. 그래서 〈오셀로〉는 비극으로 끝났다. 그럼 생각해보자. 우리의 사랑은 어떠한가를.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연인이든 가족이든, 상대를 소유하고 지배하려고 하고 있는가, 아니면 그 존재 자체를 기뻐하며 즐거워하고 있는가? 잠시 생각해보자. 자유저술가·〈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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