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
<하얀 성>을 통해서 본 ‘정체성’의 의미
2006년에 노벨상을 받은 오르한 파묵의 <하얀 성>은 정체성과 연관하여 보면 더욱 흥미로운 작품이다. 이야기 줄거리는 이렇다. 소설의 주인공인 이탈리아 청년이 배를 타고 베네치아로 가다가 터키 해적에게 납치되어 이스탄불로 끌려간다. 청년은 그곳에서 자기와 똑같은 외모를 지닌 ‘호자’라는 사람에게 팔려 그의 노예가 된다. 서양문명에 호감을 품은 호자에게 청년은 르네상스 시대의 화학·의학·천문학 등을 가르쳐 준다. 호자는 그것을 이용해 군주인 파디샤에게 신임을 얻어 둘은 안정된 생활을 한다. 청년과 호자는 매일 한방에 마주 앉아 토론을 하며 지식뿐 아니라 어린 시절의 기억까지 주고받음으로써, 동양과 서양, 주인과 노예, 자아와 타자, 허구와 실재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과정을 서로 경험한다. 그 후 청년과 호자는 파디샤를 설득해 그들이 발명한 무기를 폴란드 원정에 사용하도록 한다. 그러나 무기가 효능을 발휘하지 못하고 원정이 실패로 끝나자, 호자는 청년의 옷을 입고 이탈리아로 넘어가고 청년은 호자의 옷을 입고 그곳에서 호자 행세를 하며 산다. 두 사람이 정체성을 서로 바꿈으로써 삶을 바꿔버린 것이다. 그런데 이런 일이 과연 가능할까? 이에 대한 대답은 우리가 정체성을 어떻게 정의하느냐에 달려 있다.
로크가 <인간 오성론>에서 정체성을 ‘시간과 장소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항상 동일한 인격’으로 정의한 이래로 정체성은 ‘어떤 존재의 고유하고 변하지 않는 속성’을 뜻한다. 곧 개인은 자아정체성을 통해서 자신이 유일하며 어느 누구에 의해서도 대체되거나 혼동될 수 없다는 사실을 확인한다. 물론 민족과 같은 공동체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파묵은 <하얀 성>에서 두 주인공의 삶을 완벽하게 바꿔버림으로써, 다시 말해 정체성을 ‘고유하지도 않고 변할 수 있는 어떤 것’으로 만듦으로써 정체성에 대한 근대적 정의를 정면으로 부정하고 살그머니 탈근대적 사유에 합류했다. 푸코의 <말과 사물>의 종결부에 나오는 “인간은 마치 해변의 모래사장에 그려진 얼굴이 파도에 씻기듯 이내 지워지게 되리라”라는 말이 상징하듯이, 라캉·푸코·데리다 같은 탈근대적 사상가들에 의하면 고유하고 불변하는 정체성을 유지하는 주체적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오직 권력 구조와 제도에 의해 규정당하는 수동적이고 유연한 신체에 불과한 인간들만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들에게 정체성이란 일종의 허구로서 타자를 구분하여 배척하기 위해 만들어낸 발명품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둘 중 어떤 주장이 옳을까? <하얀 성>에서 파묵은 분명 탈근대적 사상가들의 손을 들어주었다. 그리고 그의 이런 입장은 새뮤얼 헌팅턴이 만든 ‘문명의 충돌’이라는 말이 함축하는 모든 상황에서 설득력을 지닌다. 정체성이 아예 없다면 문명의 충돌도 일어날 까닭이 없기 때문이다. 이 점에서 소설 <하얀 성>은 시의에 부합한다.
하지만 생각해보자. 정체성이 탈근대적 사상가들의 주장처럼 단지 ‘배타성’의 미화된 이름에 불과할까? 그래서 “사람이 누구라는 게 뭐 그리 중요합니까?”라는 <하얀 성>의 대사처럼 무시하거나 해체해야 할 대상인가? 그건 아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과 우리가 속한 공동체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알도록 마땅히 ‘고무’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개인으로서나, 대화의 상대자 또는 공동체의 일원으로서 해야 할 말과 행동들을 올바르고 당연하게 판별할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이 고유하고 불변하는 속성으로, 그래서 배척의 도구로, 때로는 분쟁 내지 전쟁의 도구로 사용되도록 ‘충동’되어서는 결코 안 된다. 그래야만 타인들의 속성과 문명을 이해하고 포용하여 공존·공영할 수 있다. 따라서 정체성에 대한 근대적 정의와 탈근대적 사고를 종합한 새로운 인식이 필히 요구되는데, 이에 대해 프랑스 철학자 폴 리쾨르는 <타자로서 자기 자신>에서 ‘이야기 정체성’을, 영국의 사회학자 앤터니 기든스는 <현대성과 자아 정체성>에서 ‘성찰성’을 각각 답으로 내놓았다. 공통점은 둘 모두 정체성을 고유하고 불변하는 ‘닫힌 체계’로 보지 않고 다양하고 복잡하며, 시간, 장소, 그리고 사건에 따라 역동적으로 재구성되는 ‘열린 체계’로 본다는 것이다. 정체성이 열려 있다는 것은 그것에 타자에 대한 이해 가능성이 포함되어 있으며 동시에 외부 세계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잠재해 있다는 것을 뜻한다.
헌팅턴은 “인간은 어떤 문명에 살고 있건 간에 다른 문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과 공유하는 가치관, 제도, 관행을 확대하는 방법을 꾸준히 모색하고 그 방안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고 했다. 그런 노력들이 쌓여야 그가 ‘물음표를 달아 사용한’ 문명의 충돌 가능성이 낮아진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를 위해 요구되는 것이 무엇이겠는가? 바로 열린 체계로서의 정체성이 아니겠는가? 세계화 시대를 맞아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자주 거론되는 자아정체성 내지 민족정체성의 문제와 연관해서 한번 생각해 보자.
김용규 자유저술가·<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저자
김용규 자유저술가·<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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