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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직접행동 없는 눈물은 무의미한 비폭력

등록 2007-09-28 19:23

김용규 / 자유저술가· 저자
김용규 / 자유저술가· 저자
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바리데기〉를 통해서 본 ‘비폭력’의 의미

황석영의 〈바리데기〉는 전지구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이주민들에게 가해지는 폭력을 고발한 작품이다. 이야기는 탈북소녀 바리가 중국을 거쳐 영국까지 흘러가면서 직간접적으로 겪는 온갖 참담한 폭력들을 다룬다. 작가는 인터뷰에서 이 소설이 바리공주 설화라는 우리네 형식과 서사에 현재의 세계가 마주하고 있는 현실을 담았다고 했다. 그가 말하는 현실이란 신자유주의라는 새로운 체제에 적응하지 못한 주변부 나라들에서 행해지는 전쟁, 굶주림, 죽임 등과 같은 각종 폭력이라는 것도 밝혔다. 따라서 이 작품은 우리 문학이 한국이라는 테두리를 벗어나 인류 보편적 문제로 시야를 넓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다.

그런데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 있다. 바리공주 설화에서는 바리가 서천에 가서 약수를 구해다가 죽은 부모를 살린다. 하지만 〈바리데기〉에서는 바리가 찾는 생명수가 무엇인지조차 나타나 있지 않다. 혹시 ‘눈물’이 아닐까라는 생각은 든다. 소설의 마지막 부분에 “사람은 스스로의 구원을 위해서도 남을 위해 눈물을 흘려야 한다. 어떤 지독한 일을 겪을지라도 타인과 세상에 대한 희망을 버려서는 안 된다”라는 말이 나오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작품은 런던 버스폭발 사고를 목격한 바리와 그의 남편이 ‘눈물을 흘리면서’ 서둘러 그곳을 피해 떠나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하지만 눈물이 과연 생명수일까? 각종 끔찍한 폭력으로 희생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한줄기 연민조차 없다면야 그 어떤 대처방안도 없겠지만, 눈물만으로 굶주림, 구타, 집단강간, 죽임, 테러와 전쟁이 전염병처럼 번져가는 21세기 지구촌을 구할 수 있을까? 심히 의심스럽다. 작가도 “글쎄요. 이 작품에서 생명수는 과연 무엇일까요? 그리고 바리는 그것을 찾기라도 했을까요?”라고 우리에게 되물었다. 오래전부터 폭력에 관한 정당한 대처 방안은 비폭력이다. 폭력에 폭력으로 맞서면 그 역시 폭력이기 때문에 폭력의 확산과 악순환을 막을 길이 없다. ‘올바른 폭력은 없다’는 말이 여기에서 나왔다. 그런데 ‘직접행동’이라는 용어와 함께 비폭력의 새로운 형태가 최근 주목받고 있다. ‘오른뺨을 치면 왼뺨도 돌려대라’는 식의 전통적인 비폭력은 ‘폭력을 가하는 자가 승리하는 사회’를 만들기 때문에 옳지 않다는 것이 이 주장의 시발점이다. 그러한 사회는, 그것이 국가든 집단이든 개인이든, 폭력을 가하는 자의 지배와 폭행에 의한 ‘사이비 비폭력 상태’가 유지되는 사회로서 폭력을 오히려 정당화하고 비대화한다. 따라서 폭력을 줄이려면 적극적으로 맞서 전략적으로 싸워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직접행동이다. 그 결과 직접행동은 때로 과격해질 수도 있지만 그 목적이 비폭력에 있다는 점에서 테러와는 다르다. 대표적인 예로 ‘간디의 소금행진’을 들 수 있다.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에서는 소금의 생산과 판매를 영국이 독점하는 내용의 소금세법이 실시되고 있었다. 간디는 이와 같은 영국의 폭력적 억압들을 폐기하기 위해 11개 항목의 요구안을 제출했다. 이 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그는 제자들과 함께 아마다바드에서 출발하여 무려 388㎞를 걸었다. 그리고 단디 해안에 도착하자 소금을 만들었다. 바로 이것이 인도 독립의 견고한 발판이 되었다. 간디는 이렇게 말했다. “직접행동이라는 표현 없이는 비폭력은 무의미합니다. 직접행동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가장 행동적인 힘입니다. 사람은 소극적으로는 비폭력적일 수 없습니다.” 오직 직접행동이라는 적극적 저항에 의해서만 폭력을 줄이고 비폭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가르침이다.

오늘날 직접행동은 벌목을 막기 위해 나무에 자기 몸을 묶고, 핵폐기물을 실은 열차 앞에서 연좌농성을 벌이며, 유전자 조작 농산물을 뽑아버리는 등의 다양한 시민운동으로 세계 곳곳에서 전개되고 있다. 〈직접행동〉을 쓴 에이프릴 카터는 직접행동은 민주주의의 실천이며, 바로 여기에 민주주의의 미래가 달렸다고 단언했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소설 〈바리데기〉에서 버스폭발 사고를 목격한 바리와 그의 남편이 ‘눈물을 흘리면서’ 서둘러 그곳을 피해 떠난 것은 너무 소극적인 대처 방안이 아니었을까? 그 대신 부상자들을 도우려고 참사의 현장으로 달려가거나, 아니면 다음날 테러에 반대하는 시위에 참가하는 것으로 끝을 맺을 수는 없었을까? 최근 신경림 시인도 〈바리데기〉와 똑같은 문제를 다룬 〈그분은 높은 데서〉라는 시를 발표했다. 시는 다음 같은 한탄으로 끝난다. “그러나 무얼 하랴, 그분은 세상을 바로 고칠 의지도 뜻도 없는 데야.” 신마저도 세계에 만연하는 폭력들을 그냥 보고만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또 무얼 해야 할까? 단지 눈물만 흘리며 돌아서야 할까, 아니면 어떤 식의 직접행동으로든 나서야 할까? 지금 우리 사회 안에도 바리처럼 각종 폭력에 시달리는 이주노동자들이 있다는 것도 감안하고, 한번 생각해 보자.

김용규 / 자유저술가·〈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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