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규/ 자유저술가· 저자
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 <고도를 기다리며〉를 통해서 본 ‘권태’의 의미
여름이다. 권태롭다. 뭔가를 하려 해도 너무 더워 할 수 없고, 어디론지 떠나려 해도 막상 갈 곳이 없어 그렇다. 휴가를 떠나본 지가 언제인지 기억조차 아련하다. 처지가 그래서인지 생각나는 작품이 있다.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다. 권태가 무엇인지를 더 잘 보여주는 문학작품을 나는 아직 모른다.
막이 오르면, 텅 빈 무대 위에 말라 비틀어진 나무가 한 그루 덩그러니 서 있다. 그 밑에서 주인공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어디에서 오는지, 왜 오는지, 언제 오는지, 누구인지도 모르는 ‘고도’를 하염없이 기다린다. 이들의 처지는 다음 대화에 잘 나타나 있다. “자, 그만 떠나자./ 안 돼./ 왜?/ 고도를 기다리고 있으니까./ 참, 그렇군.” 그러나 온다던 고도는 끝내 오지 않는다. 그래서 두 사람은 영영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한다. “자, 그럼 가볼까?/ 응, 가세나.” 하지만 그들은 꼼짝도 하지 않고, 부질없이 막이 내린다. 그럼으로써 작품은 우리에게 권태의 속살을 그대로 보여준다.
그렇다. 이것이 독일의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가 그의 〈형이상학의 근본 개념〉에서 밝힌 권태의 속성이다. 그는 권태의 근본구조가 ‘붙잡고 있음’이자 동시에 ‘공허 속에 놓아둠’이라 했다. 하이데거는 예를 들어 우리가 어느 초라한 시골기차역에서 빨라야 네 시간이나 지나서야 오는 기차를 기다린다고 가정하자 한다. 이때 우리는 기차시간에 붙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공허 속에 놓인다. 여기에서 권태라는 ‘근본적인 기분’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근본적인 기분은 언제나 불안과 연결되어 있다. 하이데거에 의하면, 인간은 그 어떤 특별한 의미 없이 세계로 ‘내던져진 자’이다. 이 ‘내던져짐’에는 거룩한 신의 섭리도, 정해진 운명도 없다. 모든 것은 오직 자신의 선택과 결단에 맡겨져 있다. 그런데 인간은 자신의 ‘내던져짐’에 대해서, 그리고 모든 것이 자신에게 ‘맡겨져 있음’에 대해 권태로워하며 동시에 불안해한다. 베케트는 이러한 인간의 실존적 상황을 ‘텅 빈 무대’ 위에 내던져진 ‘대본 없는 배우’로 구성해 표현했다. 가히 천재적이다.
한번 무대에 오른 배우는 아무리 무대가 비었더라도 또 설사 대본이 없더라도, 그가 무대에 서 있는 한,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 한편 권태롭고 한편 불안하지만, 연극이 끝나 그가 무대에서 내려가기 전까지는 어쨌든 시간을 때워야 한다. 그래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시간 죽이기’를 시작한다. 그런데 바로 이것이 ‘세계 안에 붙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공허 속에 놓여’ 있는 우리가 세상을 사는 방식이다.
우리의 시간 죽이기는 보통 ‘호기심이 가는 대로 하기’와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하기’로 요약된다. 곧 우리는 호기심을 따라 또는 남들을 따라 관광, 관람, 쇼핑, 패션, 레저, 인터넷 서핑 등으로 분주하게 옮겨 다니며 애써 시간 죽이기를 한다. 그럼으로써 일상에서 오는 권태와 실존적 불안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그러나 하이데거는 이것을 ‘오인된 자유라는 편안함’ 속으로의 도피라 했다. 이렇게 해서 벗어나는 권태는 단지 ‘표면적 권태’일 뿐이라고 했다. 그래서 실존적 불안에서는 벗어나지 못하며, 결국 한층 심각한 권태와 마주 서게 된다는 것이다. 소위 그가 말하는 ‘깊은 권태’다.
〈고도를 기다리며〉에서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이, 그리고 현실에서 우리 모두가 근원적으로 끌어안고 있는 권태가 바로 ‘깊은 권태’다. 이 권태는 어디에서 오는지, 왜 오는지, 언제 오는지, 무엇인지도 모르는 ‘죽음’에 의해 붙잡혀 있으면서도 동시에 공허 속에 놓여 있는 인간적 상황이 가진 근원적이면서도 숙명적인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권태와 불안에서는 그 어떤 ‘시간 죽이기’로도 벗어날 수 없다.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의 모든 ‘시간 죽이기’가 실패로 끝나는 것도 그래서이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할까?
하이데거는 방법은 오직 하나, 곧 ‘실존하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어려운 말이 아니다. 실존이란 단순히 호기심을 좇아 또는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을 기획하고 그것을 따라 산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그는 ‘기획투사’라 했다. 기획투사는 단순히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운다는 말이 아니다. 기획투사는 자신의 ‘존재 가능성’에 스스로를 던져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새로운 자기를 구성하는 적극적인 행위다. 그렇다면 휴가를 가고 못 가고는 문제될 것이 없다. 실존하느냐 못하느냐가 문제다. 휴가를 간다 해도 단순히 호기심을 좇아 또는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서 간다면 결코 깊은 권태와 실존적 불안에서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설사 휴가를 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매순간마다 기획투사하여 새로운 자기로 산다면 절대 권태롭지도 불안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어떤가? 한번 생각해 보자. 김용규 / 자유저술가〈문학카페에서 철학 읽기〉 저자
하이데거는 방법은 오직 하나, 곧 ‘실존하는 것’이라고 잘라 말했다. 어려운 말이 아니다. 실존이란 단순히 호기심을 좇아 또는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 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을 기획하고 그것을 따라 산다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그는 ‘기획투사’라 했다. 기획투사는 단순히 미래에 대한 계획을 세운다는 말이 아니다. 기획투사는 자신의 ‘존재 가능성’에 스스로를 던져 그것을 자신의 것으로 만듦으로써 새로운 자기를 구성하는 적극적인 행위다. 그렇다면 휴가를 가고 못 가고는 문제될 것이 없다. 실존하느냐 못하느냐가 문제다. 휴가를 간다 해도 단순히 호기심을 좇아 또는 남들이 하는 대로 따라서 간다면 결코 깊은 권태와 실존적 불안에서는 벗어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설사 휴가를 가지 못한다 하더라도 매순간마다 기획투사하여 새로운 자기로 산다면 절대 권태롭지도 불안하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금 당신은 어떤가? 한번 생각해 보자. 김용규 / 자유저술가〈문학카페에서 철학 읽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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