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규 / 자유저술가· 저자
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 <소송〉을 통해서 본 ‘양심’의 의미
더위가 계속되고 있다. 이런 여름에는 추리소설이 제격이다. 그래서 추리소설 같이 ‘섬뜩해지는’ 고전을 하나 소개한다. “누군가 요제프 K를 중상한 것이 분명했다. 왜냐하면 그는 아무런 나쁜 일도 하지 않았는데, 어느 날 아침 체포되었으니까 말이다.”로 시작하는 카프카의 미완성 장편소설 〈소송〉이다. 이 작품은 시종 미스터리하다. 전화와 임대아파트가 있는 현대도시에서, 그것도 어느 화창한 날 아침에 평범한 은행원인 K가 자기도 모르는 죄로 체포된다. 그리고 법률도 절차도 모르는 불가해한 사무국과 법정에 의해 소송이 진행된다. 그는 우선 자기가 도대체 어떤 죄를 저질렀는가 알기 위하여 백방으로 손을 쓰지만 도저히 그 실마리를 잡을 수가 없다. 그러니 자신을 변호하려는 노력들은 모두 실패하고 만다. 그리고 서른한 살 되는 생일 전날 밤 처형당한다. “개 같구나”가 그가 한 마지막 말이다.
따라서 독자들도 이 소설이 끝날 때까지 누가 무엇 때문에 K를 고발했는지, 그를 체포하고 소송을 진행하는 법정의 정체가 무엇인지, 또 그의 죄가 무엇이며 소송의 목적은 무엇인지를 알 길이 전혀 없다. 참으로 미스터리하다. 그래서 카프카의 대부분의 작품들이 그렇듯이, 이 작품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 추측과 해석들이 분분하다. 그 가운데 흥미로운 것이 독일 출신 정신의학자 에리히 프롬이 한 해석이다.
프롬은 자신의 저서 〈자기를 찾는 인간〉에서 이 이야기는 일상적 삶에 갇혀 자기 발전과 성장이 멈춰버린 한 사람의 ‘죄의식’을 표현하고 있다고 했다. 곧, K를 고발하고 체포하여 소송을 진행하는 법정은 바로 그 자신의 ‘양심’이며, K의 비생산적인 일상생활이 곧 그가 체포된 죄이고, 그런 생활을 청산하라는 것이 이 소송의 목적이라는 것이다. 프롬이 주목한 K의 일상생활은 대강 다음 같았다.
“그해 봄에 K는 저녁 시간을 늘 이런 식으로 보내곤 했다. 곧, 작업 후에는 (그는 보통 9시까지 사무실에 있었다) 가능할 때마다 혼자서 또는 몇몇 동료들과 함께 산책을 하곤 했으며, 그 후 맥주홀에 가서 대개는 나이든 손님들이 단골인 테이블에 11시까지 앉아 있었다. … 그리고 일주일에 한번 K는 엘자라고 부르는 여자를 방문했는데, 그녀는 새벽까지 카바레에서 여급으로 일하고, 낮에는 손님을 침대에서 맞아들였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스피노자를 따라서, 프롬은 인간이 자신의 본성을 실현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선이고 그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들이 악이라 규정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자기 발전과 성장을 저해하는 무의미하고 비생산적인 K의 일상적 생활은 분명 죄가 된다. 물론 이 죄는 법률적인 죄가 아니다. 때문에 K는 “나는 죄가 없다”고 반복해서 외치는 것이다. 이 죄는 오직 도덕적 또는 실존론적 죄이며, 바로 이 죄에 대해 그의 양심이 고발하고 비난한다는 것이 프롬의 해석이다. 그는 K가 “오직 자기 죄책감의 진정한 원인을 이해하는 것과 그리고 자기 자신의 생산성을 개발시키는 것만이 자기를 구할 수 있는데도 불구하고 자신으로부터 도피하여 타인의 도움을 얻는 데에만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지적했다. K는 끝까지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이해하지 못하고 오직 자신에게 법적인 죄가 없다는 것만을 주장하다가 결국 파멸당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섬뜩한’ 죄책감과 파멸이 소설이 아닌 우리의 현실생활에서도 가능할까? 독일의 철학자 하이데거에 의하면, 그렇다. 하이데거는 인간이 K처럼 일상적으로 사는 것을 ‘비본래적으로’ 산다고 표현했다. 진정한 자기로 살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리고 여기에서 죄책감이 나온다고 했다. 곧 ‘본래적 자기’로 살지 않는 그 자체에 이미 죄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양심은 ‘본래적 자기’로 돌아가라고 ‘스스로에게 꾸짖는 소리’이다.
정리하자면, 양심이란 ‘인간의 자기 회귀성’이다. 누구든 진정한 자기 자신으로 돌아가려는 자는 자신의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여야만 한다. 수천 리 바닷길을 돌아 강을 거슬러 회귀하는 연어는 언제나 후각을 따른다. 인간에게 있어 그것이 양심이다. 그래서 프롬은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오직 자신의 양심의 소리를 이해하기만 한다면, 자기 자신에게로 돌아갈 수 있다. 그런데 만일 그것이 불가능하다면 그는 파멸할 것이다. 아무도 그를 도울 수 없으며 그 자신만이 도울 수 있다.”
K는 양심의 소리를 이해하지 못해 파멸했다. 그는 비생산적인 일상생활을 통해 생을 낭비했기 때문에 죄책감을 느꼈으나 자신의 죄를 결코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스스로를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말인데, 우리도 어느 화창한 날 아침에 자신도 모르는 죄로 갑자기 체포되지 않을까? 그리고 “개 같구나”라고 중얼거리며 속수무책으로 파멸당할 수 있지 않을까? 진정한 자기로 살라고 지금도 꾸짖고 있는 양심의 소리를 이해하지 못한다면 말이다. 섬뜩하지 않은가? 한번 생각해보자.
자유저술가
〈철학카페에서 문학읽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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