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규 / 자유저술가· 저자
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
<대심문관>을 통해서 본 ‘이성’의 의미
<대심문관>은 1879년 발표된 도스토예프스키의 마지막 장편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한 장으로 소개된 이래 독립된 단편소설로, 문학적 에세이로, 신학 또는 철학 논문으로 다루어져왔다. 이야기는 종교재판이 극성을 떨던 16세기 스페인 세빌리아의 한 광장에 그리스도가 나타나는 것으로 시작된다. 바로 전날 그곳에서는 고관대작들과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대심문관인 추기경의 지휘 아래 ‘하느님의 영광을 위하여’ 백 명 가까운 이단자들의 화형이 있었다. 인육 타는 냄새가 채 가시지도 않은 그곳에 그리스도가 다시 나타나 한없이 거룩한 미소와 손길로 축복하고 병을 고쳐주며 죽은 여자아이를 다시 살린다. 그러자 지켜보던 대심문관이 그를 체포한다. 그리고 감옥에 감금한 뒤 불평과 협박을 퍼붓는다.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요? … 아니 그리스도든 아니든 상관없소. 어차피 내일 나는 당신을 사악한 이단자로 몰아 화형에 처할 테니까.” 이렇게 시작하는 대심문관의 주장은 매우 장황하고 한편 심오하며 상당히 합리적이지만, 그 안에는 그리스도를 위해 그리스도를 배척하고 인류를 위하여 인류를 죽음과 파멸로 이끌려는 자기모순이 들어 있다. 다양한 해석이 가능하겠지만, 이 이야기는 인간 이성의 어떤 ‘특별한’ 단면을 확연히 보여준다.
이성이 어떻게 광기를 낳는가? 계몽이 어떻게 야만적일 수 있는가? 물질적·기술적 진보가 어떻게 문화적·도덕적 퇴보로 이끌 수 있는가? 과거 어느 세기보다 더 많은 문명의 해택을 누리며 휴머니즘을 외치던 20세기에 어떻게 그 많은 집단학살들이 있었는가? 예컨대 혁명기의 러시아나 2차대전 중 나치점령지에서 행해진 일천만 명이 넘는 인간학살들이 어떻게 가능했는가? 발칸반도에서 1941년부터 계속되어 그때마다 수십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세르비아인들과 크로아티아인들 사이의 인종청소가 또 어떻게 가능했던가? 20세기 안에 벌어진 집단학살 가운데 백만 명이 넘는 규모만도 열 건이 넘지 않는가? 한마디로, 도대체 어떻게 사람의 가죽을 벗겨 구두를, 체지방으로 비누를, 머리털로 담요를 만드는 일이 20세기 문명국가에서 가능한가?
아도르노와 함께 프랑크푸르트학파를 이끌며 <계몽의 변증법>을 쓴 호크하이머는 그의 <도구적 이성 비판>에서 바로 이런 고통스런 물음들에 대해 어렵게 답했다. 이성이 ‘도구화’하면 맹목적이 되어 오류를 막는 비판적 기능을 상실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 말을 “이성이 자기 스스로를 도구화한다면, 이성은 일종의 물질성과 맹목성을 갖게 되고, 정신적으로 경험하기보다는 단지 수용할 뿐인 마술적 실재, 곧 물신이 된다”라고 표현했다. 무슨 말인가? 예를 들어보자. 가령 어떤 운전사가 오직 교통법규에 따라 운행하기 위하여 무단으로 도로를 횡단하던 어린이를 치었다고 하자. 이때 그 운전사를 이끈 것이 마술적 실재, 곧 ‘도구화된 이성’이다. 호크하이머는 그가 법정에 섰을 때, 재판관이 그에게 ‘이성적으로 운전했는지 여부’를 묻는다면, 그것은 그가 단지 교통법규대로 운전했는지를 묻는 것이 아니라 “운전자가 자신과 다른 사람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 위해, 그리고 법률을 지키기 위해 그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는지 여부”를 묻는 것이라고 했다. 곧 이성이란 목적을 이해하지 못한 채 단지 합당한 수단만을 계산하는 능력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성은 목적과 수단을 포괄적으로 이해하고 계산하며 또한 그 모두를 비판하는 능력이어야 한다. 호크하이머는 현대사회를 횡행하는 광기와 야만성이 자연과 인간 그리고 문화 모두를 유용성을 산출하기 위한 대상으로만 파악하는 도구적 이성에서 비롯되었다고 본다. 도구적 이성은 규범의 상실, 이념의 상실, 가치의 상실과 사물화를 가져온다고도 했다. 따라서 이성은 자기부정과 자기비판을 통해 도구적 이성에 의해 왜곡된 ‘계몽을 계몽하는 것’만이 현대사회를 지배하는 각종 폭력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1846년 발표한 <지하로부터의 수기> 이후,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렇듯 스스로의 이성을 도구화함으로써 자기모순에 빠진 악마적 인간들을 창조해냈다.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 <백치>의 이폴리트, <악령>의 스타브로긴, 키릴로프, 쉬갈로프, <미성년>의 아르카지, 베르실로프,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이반 등이 그들이다. 그리고 이들 모두를 대변하는 인물이 대심문관이다. 러시아 출신 철학자 베르자예프는 “대신문관은 역사상 여러 형상으로 나타났고 또 나타날 것이다”라고 경고했다. 양심의 자유를 거부하고 이교도를 처형하는 종교에, 풍요로운 삶을 미끼로 인간의 존엄성을 훼손하는 과학에, 그것을 옹호하는 실증주의 철학에, 인간성을 말살하는 각종 국가형태와 사회제도에 대신문관이 어김없이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생각해보자. 오늘날 우리 사회 어디에 그가 흉흉한 눈빛을 하고 웅크리고 있는지를.
김용규 / 자유저술가·〈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저자
김용규 / 자유저술가·〈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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