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꽃들에게 희망을〉을 통해서 본 ‘희망’의 의미
새해다. 우리도 희망을 이야기하자. 트리나 폴러스의 〈꽃들에게 희망을〉을 골랐다. 1972년 출간된 이래 줄곧 세계적 베스트셀러이자 스테디셀러인 이 우화에는 희망의 원리가 들어 있다. 이야기는 이렇다. 더 나은 삶을 꿈꾸는 한 호랑 애벌레가 어느 날 수많은 애벌레들이 뒤엉켜 쌓아올린 ‘애벌레 기둥’을 발견한다. 꼭대기는 너무 높아서 보이지 않고 왜 위로 올라가는지조차 모르지만 모두들 기를 쓰고 올라간다. 호랑 애벌레도 자기가 찾고 있는 더 나은 삶이 그 위에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생각으로 이 대열에 낀다. 애벌레 기둥을 오르려면 다른 애벌레들을 밟고 올라가야만 한다. 아니면 자기가 짓밟힐 뿐이다. 서로 먼저 올라가려고 경쟁하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것은 작가가 협동보다는 경쟁을 사회발전의 원리로 삼는 사회구조를 서로를 짓밟아야만 올라갈 수 있는 ‘애벌레 기둥’으로 묘사한 점이다. 그런데 애벌레 기둥의 꼭대기에는 ‘사실’ 아무것도 없기 때문에 온갖 고난을 무릅쓰고 마침내 정상에 오른 애벌레들은 절망과 분노만을 간직한 채 올라간 차례대로 떨어져 내린다. 그리고 여전히 꼭대기에 올라가려고 애쓰는 다른 애벌레들에게 ‘나중에 알게 되겠지만 꼭대기에는 아무것도 없다’는 말을 남기고 죽는다. 상황과 모습이 신자유주의라는 무한 경쟁체제에 휩쓸려 의식 없이 살다 이내 허망하게 전락하는 오늘날 우리들의 그것과 꼭 닮았다. 이러한 모든 일들에 혐오를 느낀 호랑 애벌레는 사랑하는 노랑 애벌레와 함께 기둥에서 내려온다. 그리고 우여곡절 끝에 노랑 애벌레가 먼저, 호랑 애벌레는 후에, 각각 고치를 만들고 들어가 마침내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아름다운 나비들이 되어 꽃들에게 희망을 전한다.
독일의 철학자 에른스트 블로흐는 그의 〈희망의 원리〉에서 “우리는 누구인가? 우리는 어디에서 오는가? 우리는 어디로 가는가? 우리는 무엇을 기대하는가? 이러한 물음에 대해 많은 사람들은 혼란을 느끼리라. 문제는 희망을 배우는 일이다”라고 했다. 그렇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도 희망을 배우는 일이다. 그럼 들어보자. 나비가 된 애벌레들이 전하는 희망의 원리를. 주목해야 할 장면이 있다. “어떻게 하면 나비가 되죠?”라고 묻는 노랑 애벌레에게 늙은 애벌레가 대답한다. “날기를 원해야 돼. 하나의 애벌레로 사는 것을 기꺼이 포기할 만큼 간절하게”라고. 그러자 노랑 애벌레는 “고치 속에 틀어박히는 건 생각만 해도 끔찍해! 날개를 가진 멋진 존재로 변할 수 있다는 확신도 없는데, 하나뿐인 목숨을 어떻게 위험에 빠뜨릴 수 있단 말인가?”라며 망설인다. 하지만 이내 용기를 내어 고치 만들기를 시작하고 마침내 나비가 된다. 그렇다. 이처럼 희망이란 우선 어떤 것을 간절히 바라고 원하는 것이다. 그 대상은 구체적이지 않을 수도 있다.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원함이나 바람은 소망 또는 욕망이라 한다. 따라서 희망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소망을 가질 수 없는 사람들까지도 가질 수 있는 일종의 축복이다. 그렇다고 해서 희망이 누구나 단순히 바라고 원하는 것만으로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희망은 언제나 그것을 향해 자신의 존재를 송두리째 던지는 행위를 요구한다. 애벌레로 사는 안락을 기꺼이 포기하고 자신의 새로운 가능성을 위하여 목숨마저 위험에 빠뜨리면서 고치를 만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그래야 비로소 나비가 된다.
이런 의미에서의 희망은 또한 ‘기획 투사’다. 자신의 ‘존재 가능성’을 향해 스스로를 던져 새로운 자기를 구성하는 행위라는 뜻이다. 물론 여기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하지만 용기는 투사들이 갖는 용맹과는 다르다. 용맹이란 소망이나 욕망을 이루려는 투지로서, 일찍이 볼테르가 적절하게 언급했듯이 “미덕이 아니며 악당이든 위인이든 공통적으로 갖는 하나의 성질이다.” 그러나 용기는 희망을 향하는 모든 사람들이 갖는 것으로서, 삶의 무의미성, 자신의 유한성, 그리고 스스로에 대한 후회와 죄책감 등, 삶을 위협하는 ‘모든 절망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긍정하는 힘’이다. 그래서 신학자 폴 틸리히는 그의 〈존재에의 용기〉에서 용기를 ‘자아 긍정’이라고 정의하고 “자기의 참된 본질, 자기의 내적 목표, 혹은 생명을 긍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늙은 애벌레를 따라 고치를 만들기 시작한 노랑 애벌레가 가졌던 용기가 바로 이것이었다. “어마나! 나도 이런 일을 할 수 있다니! 용기도 생기는걸. 내 속에 고치의 재료가 들어 있다면, 나비의 재료도 틀림없이 들어 있을 거야.” 노랑 애벌레의 말이다. 그는 애벌레로서의 삶을 버리고 고치 속으로 들어가는 용기를 통해 자기의 참된 본질이자 내적 목표인 나비를 향한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이런 뜻에서의 희망은 우리의 삶을 만들어가는 힘이다. 숱한 절망에도 불구하고 갖는 존재에 대한 용기다. 우리가 희망을 만들고 희망이 또한 우리를 만든다. 그러니 용기를 내자. 희망을 갖자. 나비가 되자. 그리고 날자. 날자.
김용규 자유저술가·〈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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