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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바울은 특권에 저항한 인간해방 투사

등록 2008-02-22 20:48수정 2008-02-22 20:54

사도 바울(왼쪽)과 알랭 바디우. 사진 재물결 제공.
사도 바울(왼쪽)과 알랭 바디우. 사진 재물결 제공.
〈사도 바울〉
알랭 바디우 지음·현성환 옮김/새물결·1만7900원

‘유물론적 해석’ 선두 철학자 바디우
차별·차이 넘어선 ‘보편적 개별성’ 에 주목
2000년 전 인물을 현대에 맞게 부활시켜

기독교 세계의 실질적 정초자 사도 바울을 유물론적·급진적·혁명적으로 재해석하려는 철학적 시도는 프랑스를 중심으로 한 최근 유럽 철학의 뚜렷한 특징 가운데 하나다. 기독교 보수주의의 규범을 만든 사람이라는 바울의 오래된 이미지를 뒤집어 인간해방을 위해 싸운 혁명 투사로 재탄생시킨 이론적 작업의 선두에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사도 바울>이 있다. 1998년 이 책이 출간된 뒤 바디우의 관심을 비판적으로 이어받은 이탈리아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의 <남은 시간>(2000년)이 출간됐고, 다시 슬로베니아 출신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죽은 신을 위하여>(2003년)에서 바울을 새롭게 해석했다. ‘바울 3부작’이라고도 할 이 책 가운데 지젝의 저작이 지난해 우리말로 옮겨졌고, 이번에 바디우의 저작이 우리말로 나왔다.

1937년 생인 바디우는 질 들뢰즈(1925~1995) 이후 프랑스 철학계를 주도하는 생존 학자들 가운데 맏형 뻘이다. 들뢰즈의 ‘차이의 철학’에 대립해 보편성·주체·진리와 같은 전통적인 철학적 주제를 사유의 과녁으로 삼아 작업해왔다. 낡은 주제를 우리 시대의 조건들 속에서 생생한 문제로 부활시키는 것이 바디우의 목표라고 해도 좋을 것인데, <사도 바울>에서 그의 그런 관심을 확인할 수 있다.


〈사도 바울〉
〈사도 바울〉
이 책에 드러난 바디우의 심중 생각은 2000년 전의 인물인 사도 바울을 현대의 투사로 되살려내는 것이다. 더 직설적으로 말하면, 자본주의의 제국주의 질서에 맞서 볼셰비키당을 이끌었던 혁명가 레닌의 상을 이 열성적 전도자에게서 찾아내는 것이다. 바울과 레닌이 연결된다면, 십자가에서 죽은 예수는 <자본>을 쓴 마르크스와 연결된다. 이 책에서 바디우가 특히 주의 깊게 분석하는 것이 바울의 텍스트(편지들)인데, 그 텍스트들은 조직이 처한 구체적 상황에 개입하는 일종의 투사적 문건들이라는 점에서 레닌의 글들과 닮았다.

예수와 거의 같은 시대를 살았던 바울은 막 등장한 이단(기독교)을 열정적으로 박해한 바리새파 유대인이었다. 서기 33~34년께 기독교 박해라는 사명감에 들떠 다마스쿠스로 가던 중 그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계시체험을 했다. 개종과 회심을 불러온 그 체험을 통해 그는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박혀 죽었다가 부활했음을 깨달았다. 그때부터 바리새파 유대인 사울은 기독교 사도 바울이 되었다.


그 계시체험이 말하자면, 바디우가 말하는 ‘사건’이다. 길 위에서 우연히 신의 목소리가 난데없이 자기 안으로 들이친 것인데, 여기서 그는 진리와 소명에 눈뜨게 됐고 자기 자신을 주체로 일으켜 세웠다. 그때 진리란 예수 그리스도가 하느님의 아들로서 죽었다가 부활했다는 사실이고 소명이란 그 진리를 모든 사람에게 전파하는 일이다.

바디우가 강조한는 것은 바울이 차별 없는 평등을 이 진리의 핵심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성별이든 민족이든 신분이든 진리에 참여하고 진리를 공유하는 데는 조금도 장애가 되지 않았다. “할례를 받거나 받지 않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창조되는 것이 중요합니다.”(갈라디아서 6장 15절) “유대 사람도 그리스 사람도 없으며, 종도 자유인도 없으며, 남자도 여자도 없습니다.”(갈라디아서 3장 28절)

그 점이 베드로 중심의 ‘유대-기독교인’과 바울의 차이였다. 당시 베드로가 이끌던 초기 기독교는 할례받은 사람, 곧 유대인만을 개종 대상으로 삼았는데, 바울은 오직 ‘진리’만을 앞세움으로써 기독교가 유대 울타리를 뛰어넘도록 했다. 바울은 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에 참여함으로써 모든 사람들이 평등한 신의 자식이 된다고 선포했다. 어떤 특권도 어떤 지배도 허락하지 않았다. “특권을 부여받은 모든 것들에 대한 반란자”가 바울이었다.

바울의 선교운동은 오늘날로 치면 혁명가들의 전위운동이었다. 바울은 가는 곳마다 교회=당을 조직하고 세포를 만들어냈다. 조직 건설은 진리를 전파하고 실천하려면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문제는 교회의 조직화가 역사의 시련을 견뎌내는 과정에서 거의 필연적으로 자기목적화하고 권위주의화했다는 사실에 있다. 진리를 실천하려는 운동이 진리를 배반하는 과정이 되고 만 것이다.

이 배반에서 벗어날 길은 없을까. 바디우는 직접적 해답을 제시하는 대신에 바울이 보여준 ‘보편적 개별성’의 차원에 주목한다. 진리의 보편성은 개별성과 특수성을 뛰어넘을 것을 요구한다. 다시 말해 모든 차이와 차별을 초월해야 한다. 그러나 그 보편성이 차이의 억압이나 부정이 되어서도 안 된다. 차이가 보편을 부정하지도 않고 차별을 용인하지도 않는 차원을 바디우는 ‘보편적 개별성’이라고 지칭한다. 진리를 깨닫는 주체로서 개인의 개별성이 훼손되지 않으면서도 그 개인들이 모든 차이를 넘어 보편적 진리의 지평에 나란히 서는 것, 이것이 보편적 개별성이다. 바울의 텍스트는 바로 그 차원을 보여준다고 바디우는 말한다.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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