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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복제인간’의 애틋한 권리장전

등록 2008-04-04 22:01

〈전갈의 아이〉
〈전갈의 아이〉
장르소설 읽기 /

〈전갈의 아이〉
낸시 파머 지음·백영미 옮김/비룡소·1만4000원

여러분은 혹시 복제인간이라면 ‘2류 인간, 짝퉁 인간’이라는 편견을 갖고 있지는 않은지 궁금하다. 몇 해 전에 꽤 저명한 어느 원로 과학자가 사석에서 ‘대통령의 복제인간을 만들어 두었다가 경호용으로 활용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을 듣고 충격을 받은 적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시험관 아기’를 차별하지 않듯이, 복제인간이 만일 태어난다 해도 그는 우리와 똑같은 영혼을 지닌 하나의 온전한 인간으로 대접받아야 한다. 일부 영화에서 마치 붕어빵 찍어내듯 복제인간을 만들어내는 모습은 과학적으로도 말이 안 되지만 그 이전에 윤리적으로 위험천만한 선입감을 대중들에게 퍼뜨리고 있는 것이다.

<전갈의 아이>는 이제껏 나온 모든 인간복제 테마의 작품들 중에서 가장 세련되고 설득력 있는, 그리고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담고 있는 소설 중 하나이다. 청소년도서로 나왔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성인이 읽어도 만만한 책이 전혀 아니다.


주인공 마트는 근미래의 미국에서 국경지대에 건설된 ‘마약 왕국’의 지배자를 모체로 하여 태어난 복제인간이다. 그런데 악마 같은 인물인 모체의 생물학적 특성은 물론 강한 정신력과 의지까지도 고스란히 물려받았지만 영혼만큼은 전혀 다른 경로로 성장해 나간다. 그는 자신의 모체에게 애증의 감정을, 아니 엄밀히 말해서 애정의 감정을 끝까지 놓지 않으면서도 마지막에 가서는 극적인 사건 전개 끝에 복제가 아닌 모체로 공인받게 된다.

이 책에는 청소년 독자들을 대상으로 할 때 흔히 떠올리게 되는, 틀에 박힌 ‘교육적 건전함’과는 거리가 먼 냉정함과 담담함이 진하게 배어 있다. 멀쩡한 사람의 머리에 칩을 박아 좀비 노예로 만들고, 복제인간이 태어나자마자 지적 성장을 못하게 하는 약물을 주사하고, 모체가 나이 들면 그의 복제인간에서 장기를 떼어내어 교체하는 등등. 이런 지옥 같은 디스토피아적 근미래의 잔혹한 풍경들을 너무나 일상적으로 묘사하는 정공법을 택했기에 오히려 더 설득력이 느껴진다. 이 소설을 읽은 뒤에 든 생각 중 하나가 ‘내가 어렸을 때 이런 책이 있었더라면…’이었는데, 문명의 모순과 부조리들을 미화된 이야기로 가리거나 실체 없는 장밋빛 환상으로 위무하려 들지 않는, 이런 종류의 에스에프는 적어도 내가 소년 시절에는 접해보지 못했던 것이다. 설정 하나하나, 묘사 하나하나가 쉽게 책장을 넘기지 못하고 골똘히 생각에 잠기게 하는 화두들이다. 이와 같은 작품을 읽을 수 있는 요즘의 청소년 독자들은 행운아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주인공의 성장소설인 동시에 인류의 미래와 신인류의 탄생을 사실적으로 전망한 ‘인류성장소설’인 이 작품은 미국의 내셔널북어워드나 뉴베리상 같은 유명한 상들을 받으며 에스에프의 테두리를 넘어 주류문학계로부터 폭넓은 인정을 받았다. 700쪽이 넘는 두툼한 분량이지만 편집이 시원시원해서 그리 부담스럽지는 않다.

박상준/월간 <판타스틱>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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