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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박경리 선생의 마지막 산문

등록 2008-05-23 21:36

최재봉의 문학풍경
최재봉의 문학풍경
최재봉의 문학풍경 /

<토지>의 작가 박경리 선생이 타계한 지 얼추 스무 날이 되었다. ‘국민장에 가까운 문인장’을 거쳐 선생을 떠나 보내면서 그이의 문학적 위의와 인간적 매력에 새삼 눈뜨게 되었다는 이들이 많았다. 그들은 생전의 박경리 선생과 그의 소설을 좀 더 가까이에서 접하지 못한 것을 뒤늦게 아쉬워했다. 다음주에 발간되는 <현대문학>과 <문학사상> 6월호가 나란히 박경리 추모 특집을 마련한 것은 남은 이들의 그런 아쉬움을 조금이나마 달래고자 하는 것일 테다.

후배 소설가 박완서씨는 영결식장에서 읊은 조사를 보완한 글 ‘신원(伸寃)의 문학’을 <현대문학>에 기고했다. 이 글에서 그는 80년대 말 참척의 고통에 허덕이던 자신을 선생이 원주 집으로 불러 손수 지은 밥과 국을 먹이며 위로했던 따뜻한 기억, 그리고 지난해 당신의 마지막 생일 때 서울의 초특급 호텔에서 점심을 먹은 뒤 호텔 현관에다 원주에서 거둔 채소며 통영에서 올라온 해산물을 풀어 놓고 일행에게 나눠 주던 통쾌한 일화를 회고했다.

여성 소설가 오정희씨는 소설을 쓰지 않는다고 나무라며 장편을 쓰라고 다그치다가도 “그냥 행복하게 살아라, 그게 제일 중요한 것이지”라고 얼핏 모순되는 조언을 건네던 선생의 깊은 속을 이제는 헤아릴 길이 없어졌노라며 안타까워했다.

평론가 김병익씨와 소설가 김훈씨는 나란히 70년대 기자 시절 박경리 선생을 접한 일화를 털어놓았다. 김병익씨는 동아일보 문학 담당 기자로 있던 1973년 봄, <토지> 1부가 간행된 뒤 기사를 쓰고자 작가의 정릉 집으로 이틀에 걸쳐 찾아갔지만, 선생이 집에 있으면서도 만나 주지 않았던 이야기를 소개했다. 젊은 기자는 작가의 매정한 처사에 섭섭함을 넘어 앙심을 품을 정도였지만, 나중에야 선생이 영향력 큰 신문사 기자를 부러 피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듣고 비로소 오해를 풀었다. 이런 자존과 독립정신은 선생이 숱한 권유에도 불구하고 예술원 회원 되기를 끝내 사양한 것과도 통하는 대목이라고 그는 이해했다.

1994년에 쓴 글을 재수록한 ‘1975년 2월 15일의 박경리’에서 김훈씨는 사위 김지하 시인이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수감되었다가 출감하던 날, 채 한 돌이 되지 않은 손주를 업고 형무소 맞은편 언덕 위에서 기다리던 선생을 멀리서 지켜본 일을 회고한다.


한편 <문학사상>에 실린 ‘인간 박경리의 풍모’라는 글에서 최유찬 연세대 국문과 교수는 스스로에게는 엄격했으면서도 주변 사람들에게는 자애로웠으며, 그러면서도 문학적 판단에서는 단호했던 선생의 면모를 구체적인 일화를 곁들여 가며 소개했다.

선생의 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상실이자 슬픔임에 틀림이 없다. 그러나 <현대문학>에 실린 추모글에서 소설가 윤흥길씨가 쓴 대로 선생의 장례 과정은 “(상실감과 슬픔보다)훨씬 더 큰 자랑과 기쁨”을 후배 문인들에게 선사했다. 숲 속 큰 나무는 목숨이 다해 쓰러져서도 벌레며 이끼며 버섯 같은 뭇 생명이 깃들 보금자리요 터전으로 구실한다.

남은 이들의 슬픔과 아쉬움을 미리 헤아렸던 것일까. 막 배달된 계간 문예지 <아시아>에는 선생의 산문 ‘물질의 위험한 힘’이 실렸다. “살아 있다는 것, 생명이 가장 아름답다는 생각이 요즘처럼 그렇게 소중할 때가 없습니다.” 뇌졸중으로 쓰러지기 직전, 아마도 선생이 마지막으로 쓴 글일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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