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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빛바랜 민중가요, 너를 부르마

등록 2008-04-18 19:06

최재봉의 문학풍경
최재봉의 문학풍경
최재봉의 문학풍경 /

지하철 안에서 그 노래를 듣게 되리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여덟 장에 만 원짜리 편집음반을 파는 행상의 시디플레이어에서 천연덕스럽게 흘러나오고 있는 건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였으니, 잠시 얼떨떨해질 수밖에. 뿌듯한가 싶으면 어쩐지 모욕을 당한 것도 같은 착잡한 심사가 순간 내 안에서 소용돌이쳤다. 이 노래까지 ‘추억 마케팅’의 대상이 되다니! 적어도 이건 혁명과 투쟁의 노래가 아니었던가. “…창살 아래 네가 묶인 곳/ 살아서 만나리라~.” 시위 때나 술자리에서나 비장한 각오를 다지며 부르곤 했던, 한 시대의 상징과도 같았던 노래가 흡사 벌거벗은 채 저자에 나앉은 형국이었다.

그러나 한편 생각해 보면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다. <솔아 솔아…>를 부르지 않은 지 하마 몇 해였던가. 한때는 하루에도 몇 번씩 목이 터져라 부르고는 했던 그 노래를 어느새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던 것 아닌가. 내가 노래를 부르지 않으니 노래가 이렇게 나를 찾아왔구나!

<솔아 솔아…>만이 아니었다. <해방가>와 <농민가>에서 <파업가>와 <반전반핵가>까지, <민중의 아버지>와 <타는 목마름으로>에서 <오월의 노래>와 <임을 위한 행진곡>까지, 그 시절 우리는 얼마나 많은 노래를 부르고 또 불렀던가. 노래는 그때 일용할 양식과도 같았다. 세상이 잘못되어 있고, 그 잘못을 바로잡는 데에 미력한 이 한 몸이나마 기꺼이 바치겠노라는 각오와 결의를 다지는 데에 노래들은 큰 힘이 되어 주었다. 각오는 노래를 찾고 노래는 각오를 격려해 주었다. 그 노래들을 이르는 이름이 여럿 있지만, ‘민중가요’는 그중 가장 보편적인 명칭일 것이다. 마침 <한국현대민중가요사>(정경은 고려대 한국학연구소 연구조교수 지음, 서정시학 펴냄)라는 연구서가 나왔길래 반가운 마음으로 들춰 보았다. 민중가요도 이젠 연구 대상이 되는구나 생각하니, 이 역시 착잡한 심사를 불러일으키긴 마찬가지. 연구를 할 정도로 두툼한 실체를 지니게 되었다는 점은 고무적이되, 생성·변화·발전하는 살아 있는 생명체가 아니라 이제는 연구 ‘대상’으로 고착화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 쓸쓸한 마음이 드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었다.

아무려나, 책 안에는 그 시절 듣고 불렀던 많은 노래들이 반가운 얼굴들처럼 들어앉아 있었다. 흡사 수십 년 전 학교 동창을 만난 듯했다. 이제는 곡조마저 가물가물해진 노래들도 적지 않았다. 달도 차면 기운다지만, 세월의 마모력이 새삼 야속했다. 그러면서도, 노래는 같은 노래이되 역시 예전만큼의 흥분과 떨림을 불러일으키지는 못한다는 사실 또한 분명했다. 묵은 치통처럼 묵직한 동통이 ‘왼쪽 가슴 아래께’(장석남)를 지나가는 느낌이었다.

?이 노래들을 다시 부를 날이 올까. 그런 날이 온다면, 그날은 좋은 날일까 나쁜 날일까. 직답을 하기보다는 그때 불렀던 노래 하나를 다시 불러 본다. 4·19 때 희생된 이들을 기린, 이영도 시 한태근 곡 <진달래>다. 마침 오늘은 48주년 4·19 기념일이다.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멧등마다,/ 그날 스러져 간/ 젊음 같은 꽃사태가,/ 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 그렇듯 너희는 지고/ 욕처럼 남은 목숨,/ 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 연연(戀戀)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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