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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기이하다, 텍스트 떠도는 소설

등록 2008-07-18 19:56

최재봉의 문학풍경
최재봉의 문학풍경
최재봉의 문학풍경 /

움베르토 에코의 <로아나 여왕의 신비한 불꽃>은 에코만이 쓸 수 있는 소설이다. 공적인 기억은 멀쩡한데 개인적 기억은 통째로 사라져 버린 고서적 전문가라는 설정부터가 에코답다. 파트릭 모디아노의 소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기 롤랑이 낡은 사진 한 장을 근거로 잃어버린 기억을 찾아가는 반면, 에코의 대리인 얌보는 만화와 교과서, 신문, 잡지 같은 텍스트의 안내를 좇아 어두운 망각의 터널을 빠져나가고자 한다.

특히 눈먼 도서관장 보르헤스를 연상시키는 ‘기억의 달인’으로서 에코가 삽입시킨 텍스트들의 향연은 그가 아니면 불가능했을 것으로 보인다. 모국어인 이탈리아어는 물론 영어와 프랑스어, 독일어, 스페인어 등 주요 유럽어들로 된 시와 희곡, 소설, 그밖의 문학 및 학술 텍스트들은 이 소설을 선행 텍스트들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로 만드는 느낌이다.

기억을 잃어버리고 자신이 누구인지 알 수 없어 고통받는 얌보에게는 특히 안개의 이미지가 자주 출몰한다. 에코는 안개에 관한 다양한 텍스트를 곡마단 재주꾼 공 다루듯 자유자재로 끌어다 쓴다. “기이하다, 안개 속에서 떠돌다니”라는 헤르만 헤세의 시 <안개 속에서>의 첫머리가 독일어로 튀어나오는가 하면, “나른한 가을 안개가 흩어져 있다”(<나른한 가을 안개가 흩어져 있다>)는, 벨기에 상징주의 시인 조르주 로덴바흐의 프랑스어 시가 등장하고, “비현실적인 도시/ 겨울 새벽의 갈색 안개에 싸여/ 군중이 런던 브리지 위로 지나가고 있었다”는 엘리어트의 시 <황무지>를 영어로 읊조리는 식이다.

한국 문학에서도 비슷한 사례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부러움 속에 기억을 더듬어 보다가 이인성씨의 소설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1995)이 떠올랐다. 광기의 힘을 빌려서라도 고통스러운 기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인물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학생운동의 절정기였던 80년대의 어느 날, 친구이자 동지의 분신 자살 계획을 경찰에 미리 알린 일 때문에 애인에게 버림받은 이 인물은 그 뒤 시인이 되어 시집도 출간했지만, 지금 당장은 시가 써지지 않아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시가 써지지 않는다”는 문장으로 시작되는 이 소설에는 “나 자신을 단지 남의 시의 시적 정보나 정서로만 알아보는 나”라는 표현이 등장한다(에코 소설의 주인공과 비교할 만하다). 소설은 52개의 짧은 매듭으로 이루어졌는데, 각 매듭의 시작 부분에는 이성복·최승자·송찬호·기형도 등의 시 구절이 에피그램처럼 제시되어 있다. 인용된 시와 매듭 본문은 긴밀한 조응을 이룬다. 가령 유하의 시 <그 옛날의 어린 눈빛> 중 “축제와 죽음이 한몸으로 만나는 각도에서/ 지상의 모든 눈부심이 내 청춘의 나머지를 지워버렸으므로”를 앞세운 37번째 매듭을 보자. 분신 자살을 통해 혁명이라는 축제를 꿈꾸었던 친구들과 애인에게 내쳐진 주인공은 “그 순간부터, 내 청춘은 사그리 삭제되어버렸다”고 말한다.

청춘과 사랑을 잃은 주인공에게 시는 유일한 구원의 가능성으로 다가온다. “가면을 쓰면(…)죽음을 피하고도 축제를 벌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내 가면은 바로 시야.” 동료 시인들의 시와 자신의 소설 사이의 생산적 대화를 시도한 작가의 시에 대한 태도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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