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10월의 노래’와 ‘시인들의 10월’

등록 2008-10-23 18:40수정 2008-10-23 19:08

최재봉의 문학풍경
최재봉의 문학풍경
최재봉의 문학풍경/

오래 지체했던 여름이 때 늦은 가을비의 재촉에 쫓겨 비로소 물러간 것인가. 출퇴근길 공기에서는 어느덧 오슬오슬 한기마저 느껴진다. 왁자지껄한 술자리를 뒤로 하고 집에 돌아오니 어쩐지 마음이 스산해진다. 질정 없이 흔들리는 마음을 달래려 ‘가을 노래’를 듣는다. 사티의 <짐노페디>도 좋지만, 때가 때이니만치 차이콥스키의 <10월> 쪽으로 손이 간다.

쓸쓸하도록 깨끗한 타건은 가지에서 떨어져 나와 지상으로 내려 앉는 나뭇잎의 하강을 묘사하는 것 같다. 땅에 내리기 전 나뭇잎은 한 줄기 바람에 실려 공중을 나부끼며 제 추락의 운명을 탄식하는 듯도 하다. 그러나 결국은 순한 짐승처럼 바닥에 몸을 눕히고 자연의 섭리를 받아들인다. 그럴 수밖에 없으리라.

차이콥스키의 <10월>에서는 그리고 절집의 새벽 목탁 소리가 들린다. 황동규의 시 <시월>이 떠오른다.

“아늬,/ 석등 곁에/ 밤 물소리// 누이야 무엇하나/ 달이 지는데/ 밀물지는 고물에서/ 눈을 감듯이// 바람은 사면에서 빈 가지를/ 하나 남은 사랑처럼 흔들고 있다.// 아늬,/ 석등 곁에/ 밤 물소리.”

이 시에 한동안 빠져 지냈다. 술자리에서 노래를 시키면 “내 사랑하리 시월의 강물을/ 석양이 짙어가는 푸른 모래톱/ 지난날 가졌던 슬픈 여정들을, 아득한 기대를/ 이제는 홀로 남아 따뜻이 기다리리”로 시작하는 이 시를 노래 대신 읊기도 했다. 정작 시인 자신은 이 시를 두고 ‘젊은이의 작품’이라고 평한 바 있다. 젊음 특유의 겉멋에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뜻이다. 하긴 시인이 아직 갓 스물의 대학 신입생이던 1958년 2월, <현대문학>에 실린 데뷔작이다. 그러니까, 50년 전이다.

“화자(話者)가 강가에서 시작해 마을로 들어갔다가 절로 올라가고, 다시 마을로 내려오는 구조”(황동규 <시가 태어나는 자리>)를 지닌 이 시의 마지막 줄은 다시 차이콥스키의 <시월>로 연결된다: “창 밖에 가득히 낙엽이 내리는 저녁/ 나는 끊임없이 불빛이 그리웠다./ 바람은 조금도 불지를 않고 등불들은 다만 그 숱한 향수와 같은 것에 싸여가고 주위는 자꾸 어두워갔다./ 이제 나도 한 잎의 낙엽으로, 좀더 낮은 곳으로, 내리고 싶다.” 여기에서 낙엽의 하강은 추락의 비참함보다는 ‘하화중생(下化衆生)’이나 ‘강림(降臨)’의 성스러운 이미지를 수반한다.


내친 김에 10월을 노래한 시들을 몇 더 읽어 본다.

“아직도 푸른 것들은 그 속이 시린 시월/ 내 몸 안에서 무성했던 상처도 저렇게/ 노랗게 말랐으리, 뿌리의 반대켠으로/ 타올라, 타오름의 정점에서/ 중력에 졌으리라, 서슴없이 가벼워졌으나/ 결코 가볍지 않은 시월”(이문재 <시월> 부분)

“단풍 곁에 서 있다가 나도 따라 붉어져/ 물 위로 흘러내리면/ 나 여기 다녀간 줄 당신은 아실까/ 잎과 잎처럼 흐르다 만나질 수 있을까/ 이승이 아니라도 그럴 수는 있을까”(나희덕 <시월> 부분)

황동규 시의 화자가 낙엽의 숙명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반면, 이문재와 나희덕의 시적 화자들은 그러지 못한다. 가벼움은 결국 무거움을 떨치지 못하며, 물을 따라 흐르는 자유는 그리움의 간섭에 덜컥거린다. 그런 점에서 두 후배 시인들의 ‘시월’은 황동규 ‘시월’의 세속 버전이라 할 수도 있겠다. 아무려나, “헐린 제비집 자리 같”(문태준 <시월에>)은 10월도 어느덧 저물어 간다.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