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국 5분전 안중근 의사한복 입은 모습이 진짜>
뤼순형무소에서 1910년 3월26일 오전 10시 교수형이 집행된 안중근 의사의 순국 5분 전 모습. 최서면 원장이 안 의사 재판 당시 통역관이었던 소노키 스에키의 후손으로부터 입수해 1976년 2월 공개한 사진으로, 유일하게 ‘사형 5분 전’이란 메모가 적혀 있다. ‘어머니(조마리아)가 진남포에서 지어 전날 늦게 들여보낸 흰색 명주 두루마기와 검정 바지에 검정 고무신 차림이었다’는 당시 형무소 기록과 일치한다.(왼쪽)
국내 한 출판사에서 2000년 펴낸 <안중근 의사 자서전>에 실려 있는 ‘안 의사 순국 5분 전’ 사진.(오른쪽) 중국옷 차림에 발목까지 올라오는 장화를 신은 모습을 그린 것인데도 ‘한복으로 갈아입었다’는 설명과 함께 지금껏 수정되지 않고 있다. 최 원장은 “당시 뤼순 지역의 일본 신문에서 순국 이튿날 보도한 것으로, 현장 취재가 금지됐던 까닭에 형무소 관계자들의 전언을 토대로 그려서 만든 사진”이라며 안 의사에 대한 잘못된 정보와 기록이 여전히 많다고 지적한다.
1969년 첫 발굴한 일어 필사본 ‘임나일본부설’ 스에마쓰가 줘
원 소유자는 조선총독 비서…
평화사상가 ‘인간 안중근’ 실체 명확하게 알려줘야
한문 친필 원본과 유해 찾기 필생의 업이자 미완의 과제
원 소유자는 조선총독 비서…
평화사상가 ‘인간 안중근’ 실체 명확하게 알려줘야
한문 친필 원본과 유해 찾기 필생의 업이자 미완의 과제
최서면의 안중근을 찾아서 (1)
“녹음 준비됐나?”
최서면 원장은 순간 자세를 바로잡고 강연하 듯 증언을 시작했다. 지난달 30일 서울 광화문의 자택이자 연구실에서 진행된 구술 인터뷰 자리였다.
“1969년 <안응칠 역사>를 처음으로 내게 건네준 사람은 스에마쓰 야스카즈 당시 일본 가쿠슈인(학습원)대학 교수였다. 그러나 당시에는 물론 이후 40년 가까이 이 사실을 밝히지 않았다. 그가 바로 일본의 한반도 지배를 정당화하는 이론을 제공한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주창한 식민사학의 원조인 까닭에 혹여 안중근 의사에게 흠이 될까 염려한 까닭이다.”
최 원장은 오늘날 ‘안중근 연구’의 원전이 된 자필 옥중 수기 <안응칠 역사>의 발굴 비화와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해 3시간에 걸쳐 털어놓았다.
그가 지난해 10월부터 시작된 10여차례의 구술에서 안 의사의 옥중 수기를 가장 먼저 입수해 순국 반세기 만에 한국과 일본 두 나라에서 동시에 공개하게 된 비화를 구체적으로 밝힌 것도, 직접 녹음을 요청한 것도 처음이었다.
-스에마쓰 교수는 어떻게 ‘안응칠 역사’를 갖고 있었을까요? “1969년 겨울 어느날 도쿄 간다의 고서점가 진보초의 한 서점(지금은 없어짐)에서 평소처럼 단골들에게만 보내주는 ‘도서목록’이 왔어. 거기서 ‘안응칠 역사’란 제목을 발견했지. 곧바로 서점에 연락해보니 누군가 이미 사갔다고 해. 이름있는 일본의 고서점에서는 구매자의 신상에 대해서 절대 비밀을 지키는 전통이 있어. 그래도 곧장 서점으로 달려가 주인(작고)에게 매달렸지 뭐. ‘안응칠은 한국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의인이자 영웅으로 서울 남산에 기념관도 세우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의 일대기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아 전기조차 한 권 없다’는 사정을 설명하고, 이름만 말해달라고 호소했어. 그 이름이 바로 스에마쓰 교수였어.” -가쿠슈인대학이라면 메이지시대 왕실 귀족학교로 출발한 일본 우익사상의 본산으로, 유신 시절 박정희 대통령이 그것을 본떠 정신문화연구원을 만들었다고 해서 유명한데, 스에마쓰 교수와는 그전부터 어떤 인연이 있었나요? “그가 일제 말기까지 경성제대 교수였고, 나는 아세아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던 시절이어서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안면은 전혀 없었지. 그래도 무작정 연구실로 찾아갈 수밖에. ‘안 의사 전기는 일본인에게는 지식으로 필요할 뿐이지만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역사 교과서로 꼭 필요한 책이니 양보해달라’고 얘기했지. 그러자 스에마쓰는 의외로 반기며 이렇게 말하더라구. “안응칠이 안중근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을 만난 것만으로도 기쁘다. 난, 한국인들에게는 썩 좋지 않은 인물이겠지만, 한국의 발전을 위해 기꺼이 양보하겠다.” 그 시절만 해도 내가 한창때였잖아? 내 박력이 맘에 든다고도 하더군. 허허.” -스에마쓰도 안중근 연구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건가요? “훗날 답례 인사를 한번 갔더니 얘기하더군. 경성제대 때부터 친분이 있는 황수영(지난 2월 작고) 당시 동국대 교수이자 박물관장한테 부탁을 받았다고. 황 교수가 마침 안중근숭모회에서 이사를 맡아서 ‘안중근에 대한 자료를 뭐든 구해달라’고 편지를 보내서 ‘안응칠’ 이름을 기억했다고 말이야.” -그러면 그 고서점에 ‘안응칠 역사’를 넘긴 원 소유자가 있었을 텐데요. “스에마쓰 교수한테 책을 받자마자 다시 고서점으로 달려가서 주인에게 또 매달렸지 뭐. 역시나 ‘비밀 원칙’을 내세우며 곤란해하더니 ‘목적이 성스러우니 얘기해주겠다. 단, 내가 말해줬다는 사실은 비밀로 해달라’며 입을 열더군. 원 소유자는 1919년 사이토 총독 때 비서관과 서무부장 등을 지낸 모리야 에이후로 해방 이후 일본으로 돌아와 중의원 의원 등을 거쳐 도쿄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었어. 내가 찾아가자 그 역시 깜짝 놀랐지만 ‘자신의 신분은 절대 비밀로 해달라’는 조건으로 ‘안응칠 역사’를 지니게 된 경위를 설명해주더군. 3대 통감으로 한일 강제병탄을 주도하고 1910년 10월 초대 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치 때부터 일어로 번역된 옥중수기의 필사본을 등사로 프린트해 총독부 고급 관료들에게 나눠주고 숙독하도록 했던 거야. ‘조선 통치를 위해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유와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했어. 모리야가 선배들로부터 그 필사본을 물려받아 보관해온 거야.” -‘안응칠 역사’를 구한 뒤 한국과 일본에서 공개한 과정은 어땠나요? “제일 먼저 당시 안중근숭모회 이사장인 노산 이은상에게 보냈어. ‘안 의사의 사상을 정확하게 파악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물론 반향이 뜨거웠지. 구전으로만 떠돌던 ‘옥중 수기’가 60년 만에 실제로 확인된 거니까. 노산이 이를 한글로 번역해서 당시 <한국일보>에 장기 연재를 했거든. 그랬더니 말이야, 우선 안 의사의 고향인 황해도 해주 출신 실향민들이 속속 나타나 새로운 증언들을 하기 시작했어. 동학농민혁명 때 부친 안태훈의 도움으로 백범 김구 선생 가족이 청계동에서 피신했다는 얘기도 사실로 확인되고…. 노산은 1978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안응칠 역사’의 한문 필사본이 발견되자 두 수기를 대조하고 참조해 이듬해 9월2일 안 의사 탄생 100돌을 기념해 <안중근 의사 자서전>을 펴냈어. 개인적으로는 지금까지 나온 여러 안 의사 자서전 가운데 가장 신뢰할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해. 일본에서는 외무성에서 내는 관보인 <외교시보>에 내가 직접 기고 형식으로 전문을 발표했어. 학술잡지나 언론매체가 아닌 관보를 택한 것은, 안 의사에 대한 인식을 일본인들에게 정확하게 알리려면 일본 정부의 권위와 신뢰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 그러자 예상대로 언론에서 큰 관심을 보이고 인터뷰 요청이 몰려들더군. 이를 계기로 ‘최서면’이란 이름도 일본 사회에 널리 알려졌고, 덕분에 사진과 유묵을 비롯한 안 의사 관련 사료와 증언들을 계속 발굴할 수 있었어. 지금까지도 일본에서 ‘가짜 유묵이나 유물’이 심심찮게 나도는데, 그때마다 나한테 들고 와 감별을 해달라고 하니까.” -개인적으로도 그때부터 ‘안중근 연구’를 시작한 셈인가요? “돌이켜보면, ‘안응칠 역사’가 내 인생을 바꿨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아. 그로부터 ‘안중근 연구’가 내 필생의 업이 됐고, 안 의사가 애초 썼던 순한문 친필 수기 원본과 유해 발굴은 아직도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잖아. 무엇보다도 ‘안응칠 역사’를 통해서 ‘인간 안중근’의 진면모가 명확하게 알려지면서 안 의사가 나라의 원수를 죽인 한 명의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동아시아는 물론 전세계의 미래를 구상한 정치철학자이자 평화사상가로 거듭 태어나 새로운 평가를 받을 수 있었어. 안 의사는 알면 알수록 큰사람이거든.” 구술정리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도움말: 안중근연구모임 장규식(중앙대) 장석흥(국민대) 최기영(서강대) 한시준(단국대) 한철호(동국대) 교수
-스에마쓰 교수는 어떻게 ‘안응칠 역사’를 갖고 있었을까요? “1969년 겨울 어느날 도쿄 간다의 고서점가 진보초의 한 서점(지금은 없어짐)에서 평소처럼 단골들에게만 보내주는 ‘도서목록’이 왔어. 거기서 ‘안응칠 역사’란 제목을 발견했지. 곧바로 서점에 연락해보니 누군가 이미 사갔다고 해. 이름있는 일본의 고서점에서는 구매자의 신상에 대해서 절대 비밀을 지키는 전통이 있어. 그래도 곧장 서점으로 달려가 주인(작고)에게 매달렸지 뭐. ‘안응칠은 한국 사람들이 가장 존경하는 의인이자 영웅으로 서울 남산에 기념관도 세우고 있지만, 아직까지 그의 일대기가 제대로 알려져 있지 않아 전기조차 한 권 없다’는 사정을 설명하고, 이름만 말해달라고 호소했어. 그 이름이 바로 스에마쓰 교수였어.” -가쿠슈인대학이라면 메이지시대 왕실 귀족학교로 출발한 일본 우익사상의 본산으로, 유신 시절 박정희 대통령이 그것을 본떠 정신문화연구원을 만들었다고 해서 유명한데, 스에마쓰 교수와는 그전부터 어떤 인연이 있었나요? “그가 일제 말기까지 경성제대 교수였고, 나는 아세아대학에서 교수로 일하던 시절이어서 이름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안면은 전혀 없었지. 그래도 무작정 연구실로 찾아갈 수밖에. ‘안 의사 전기는 일본인에게는 지식으로 필요할 뿐이지만 새로운 나라를 건설하려는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역사 교과서로 꼭 필요한 책이니 양보해달라’고 얘기했지. 그러자 스에마쓰는 의외로 반기며 이렇게 말하더라구. “안응칠이 안중근이란 사실을 아는 사람을 만난 것만으로도 기쁘다. 난, 한국인들에게는 썩 좋지 않은 인물이겠지만, 한국의 발전을 위해 기꺼이 양보하겠다.” 그 시절만 해도 내가 한창때였잖아? 내 박력이 맘에 든다고도 하더군. 허허.” -스에마쓰도 안중근 연구에 관심을 갖고 있었던 건가요? “훗날 답례 인사를 한번 갔더니 얘기하더군. 경성제대 때부터 친분이 있는 황수영(지난 2월 작고) 당시 동국대 교수이자 박물관장한테 부탁을 받았다고. 황 교수가 마침 안중근숭모회에서 이사를 맡아서 ‘안중근에 대한 자료를 뭐든 구해달라’고 편지를 보내서 ‘안응칠’ 이름을 기억했다고 말이야.” -그러면 그 고서점에 ‘안응칠 역사’를 넘긴 원 소유자가 있었을 텐데요. “스에마쓰 교수한테 책을 받자마자 다시 고서점으로 달려가서 주인에게 또 매달렸지 뭐. 역시나 ‘비밀 원칙’을 내세우며 곤란해하더니 ‘목적이 성스러우니 얘기해주겠다. 단, 내가 말해줬다는 사실은 비밀로 해달라’며 입을 열더군. 원 소유자는 1919년 사이토 총독 때 비서관과 서무부장 등을 지낸 모리야 에이후로 해방 이후 일본으로 돌아와 중의원 의원 등을 거쳐 도쿄에서 변호사로 일하고 있었어. 내가 찾아가자 그 역시 깜짝 놀랐지만 ‘자신의 신분은 절대 비밀로 해달라’는 조건으로 ‘안응칠 역사’를 지니게 된 경위를 설명해주더군. 3대 통감으로 한일 강제병탄을 주도하고 1910년 10월 초대 총독으로 부임한 데라우치 때부터 일어로 번역된 옥중수기의 필사본을 등사로 프린트해 총독부 고급 관료들에게 나눠주고 숙독하도록 했던 거야. ‘조선 통치를 위해서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이유와 배경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 그 이유라고 했어. 모리야가 선배들로부터 그 필사본을 물려받아 보관해온 거야.” -‘안응칠 역사’를 구한 뒤 한국과 일본에서 공개한 과정은 어땠나요? “제일 먼저 당시 안중근숭모회 이사장인 노산 이은상에게 보냈어. ‘안 의사의 사상을 정확하게 파악해달라’는 부탁과 함께. 물론 반향이 뜨거웠지. 구전으로만 떠돌던 ‘옥중 수기’가 60년 만에 실제로 확인된 거니까. 노산이 이를 한글로 번역해서 당시 <한국일보>에 장기 연재를 했거든. 그랬더니 말이야, 우선 안 의사의 고향인 황해도 해주 출신 실향민들이 속속 나타나 새로운 증언들을 하기 시작했어. 동학농민혁명 때 부친 안태훈의 도움으로 백범 김구 선생 가족이 청계동에서 피신했다는 얘기도 사실로 확인되고…. 노산은 1978년 일본 나가사키에서 ‘안응칠 역사’의 한문 필사본이 발견되자 두 수기를 대조하고 참조해 이듬해 9월2일 안 의사 탄생 100돌을 기념해 <안중근 의사 자서전>을 펴냈어. 개인적으로는 지금까지 나온 여러 안 의사 자서전 가운데 가장 신뢰할 만한 내용이라고 생각해. 일본에서는 외무성에서 내는 관보인 <외교시보>에 내가 직접 기고 형식으로 전문을 발표했어. 학술잡지나 언론매체가 아닌 관보를 택한 것은, 안 의사에 대한 인식을 일본인들에게 정확하게 알리려면 일본 정부의 권위와 신뢰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지. 그러자 예상대로 언론에서 큰 관심을 보이고 인터뷰 요청이 몰려들더군. 이를 계기로 ‘최서면’이란 이름도 일본 사회에 널리 알려졌고, 덕분에 사진과 유묵을 비롯한 안 의사 관련 사료와 증언들을 계속 발굴할 수 있었어. 지금까지도 일본에서 ‘가짜 유묵이나 유물’이 심심찮게 나도는데, 그때마다 나한테 들고 와 감별을 해달라고 하니까.” -개인적으로도 그때부터 ‘안중근 연구’를 시작한 셈인가요? “돌이켜보면, ‘안응칠 역사’가 내 인생을 바꿨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아. 그로부터 ‘안중근 연구’가 내 필생의 업이 됐고, 안 의사가 애초 썼던 순한문 친필 수기 원본과 유해 발굴은 아직도 풀어야 할 숙제로 남아 있잖아. 무엇보다도 ‘안응칠 역사’를 통해서 ‘인간 안중근’의 진면모가 명확하게 알려지면서 안 의사가 나라의 원수를 죽인 한 명의 테러리스트가 아니라, 동아시아는 물론 전세계의 미래를 구상한 정치철학자이자 평화사상가로 거듭 태어나 새로운 평가를 받을 수 있었어. 안 의사는 알면 알수록 큰사람이거든.” 구술정리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도움말: 안중근연구모임 장규식(중앙대) 장석흥(국민대) 최기영(서강대) 한시준(단국대) 한철호(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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