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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응칠의 적에서 증언자 된 ‘통감부 경찰 3인방’

등록 2011-06-06 19:42

최서면의 안중근을 찾아서
최서면의 안중근을 찾아서
안응칠 조사·취조·통역맡은 아이바·사카이·소노키
“그는 위대한 적이었다” 안응칠 사상과 인품에 감화
사진·사료 등 역사에 남겨
1909년 10월26일 하얼빈역 의거 직후부터 해방 때까지 안중근 의사와 그 가족의 운명에 깊이 간여한 3명의 일본인이 있다. 아이바 기요시, 사카이 요시아키, 소노키 스에키. 3명 모두 구마모토현 조선어학교 동창생 출신으로 통감부의 통역경찰로 입문해 일제의 조선침략정책을 가장 일선에서 수행한 인물들이다.

아이바 기요시는 의거 당시 통감부 외사경찰로 러시아 쪽에서 넘겨준 이토 저격범의 이름 ‘운치안’을 ‘안응칠’(안중근)로 밝혀냄으로써 안 의사와 첫 인연을 맺었다. 그는 생전에 안 의사를 직접 만난 적은 없지만 1920~30년대 간도와 쉬저우 일본총영사 등을 지내며 상하이로 망명해 있던 안 의사 가족들을 감시했다.

사카이 요시아키는 통감부의 경시로서 의거 직후 뤼순에 파견돼 고무라 주타로 외무대신과 구라치 데쓰키치 정무국장의 지시 아래 안 의사를 취조했다. 그는 안 의사를 회유하고 옥중수기를 쓰게 하며 ‘이토 암살의 배후와 조선병합 반대 세력을 파악해내라’는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소노키 스에키는 통감부 통역관으로서, 역시 의거 직후 뤼순에 파견돼 취조와 재판과 마지막 순국 순간까지 안 의사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입과 귀 노릇’을 했다.

 소노키가 보관한 안응칠 가족사진
하얼빈 의거 다음날인 1909년 10월27일 하얼빈의 일본총영사관에서 일제 경찰이 찍은 안중근 의사 가족사진. 부인 김아려가 둘째아들 준생(3살)을 안고 있고, 큰아들 분도(6살)는 오른쪽에 서 있다. 76년 소노키 스에키 통역관의 딸이 최서면 원장을 통해 처음 공개했고 훗날 안중근의사기념관에 기증했다. 99년 가노 다쿠미 야요이미술관장은 이 사진을 고미술상에서 구입했다며 공개하면서 큰아들 분도의 옷차림이 여자아이 같자 그를 맏딸 현생(9살)으로 소개해 지금도 잘못된 기록이 나돈다. 또 안 의사가 순국 순간에 이 사진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는 얘기도 있으나 전혀 근거가 없는 전언이라고 했다.
소노키가 보관한 안응칠 가족사진 하얼빈 의거 다음날인 1909년 10월27일 하얼빈의 일본총영사관에서 일제 경찰이 찍은 안중근 의사 가족사진. 부인 김아려가 둘째아들 준생(3살)을 안고 있고, 큰아들 분도(6살)는 오른쪽에 서 있다. 76년 소노키 스에키 통역관의 딸이 최서면 원장을 통해 처음 공개했고 훗날 안중근의사기념관에 기증했다. 99년 가노 다쿠미 야요이미술관장은 이 사진을 고미술상에서 구입했다며 공개하면서 큰아들 분도의 옷차림이 여자아이 같자 그를 맏딸 현생(9살)으로 소개해 지금도 잘못된 기록이 나돈다. 또 안 의사가 순국 순간에 이 사진을 가슴에 품고 있었다는 얘기도 있으나 전혀 근거가 없는 전언이라고 했다.
최서면(83) 국제한국연구원장은 “이들 경찰 3명은 공교롭게도 구마모토현에서 한성에 세운 조선어학교 ‘낙천굴’에 파견한 유학 동창생이었다. 그리고 이토 히로부미 암살사건 조사에 실무자로서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다. 그러나 또한 훗날에는 안 의사를 존경하여 안중근 의거의 진상과 안 의사의 인품을 널리 알리는 증언자가 됐다”고 말했다. 최 원장은 1960년대 중반 안중근 연구의 시작 때부터 이들 세 사람과 직간접으로 인연을 맺었다.

최 원장이 아이바를 만난 것은 60년대 중반 일본 아세아대학 교수 시절이었다. 그가 일한친화협회에서 발간하는 회보에서 육당 최남선의 <조선상식문답>(1986년 출간)을 번역·연재한 것을 보고 찾아간 것이다.

아이바는 1919년 3·1운동 때 ‘독립선언문’ 문체만 보고도 작성자가 최남선이라는 것을 지목해낸 일화로 식민지 조선에서 ‘악명’을 얻은 인물이었다. 43년까지 조선에서 활동하다 귀국한 그는 최 원장을 만났을 때도 외무성 고문으로서 <외무성 경찰사>의 편집을 담당하고 있었다. “외사경찰은 일제가 이른바 ‘불령선인’으로 지목한 항일 조선인들에 대한 취조를 전담시키고자 만든 기구인데 아이바는 초창기 창설자이자 산증인이었어. 바로 그 외사경찰의 행적과 기록을 뒤집으면 고스란히 ‘항일독립운동사’가 되는 셈이지.”

실제로 이후 최 원장이 외무성 외교사료관에서 찾아낸 ‘불령선인단’ 관련 문서들은 항일운동의 증거로 평가받아 독립유공자 200여명을 발굴해내는 데 기여했다.


“아이바에게 들은 가장 새롭고도 슬픈 얘기는 바로 그 자신이 상하이에 있던 안 의사의 가족을 ‘감시’(그의 표현으로는 보호)했다는 것과 39년 10월 안 의사의 둘째아들 준생으로 하여금 이토 히로부미의 둘째아들 분키치와 함께 이토의 사당이었던 박문사(신라호텔 자리)를 참배하고 기자회견을 하게 만든 장본인이란 사실이었어.”

32년 윤봉길 의사가 상하이 훙커우공원에서 도시락 폭탄을 투척해 일본군 사령관을 비롯한 수뇌들을 폭살하자 일제는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에 대한 대대적인 보복 검거에 나섰다. 먼저 난징으로 몸을 피한 김구 주석은 임시정부 외무차장을 지낸 안 의사의 둘째 동생 공근에게 프랑스 조계에서 살고 있던 부인 김아려와 아들 준생 등 형님네 가족을 도피시킬 것을 지시했다. 그러나 공근이 부주의하게 일을 처리하면서 때를 놓쳐 안 의사의 가족은 일제의 관할 아래 들어가버리고 말았다. 이후 임시정부가 난징을 거쳐 충칭(중경)으로 옮겨간 뒤 아이바는 그 길목인 쉬저우에서 거류민단 회장으로 위장한 채 조선인을 체포하는 한편 상하이에 남은 독립지사나 그 가족을 대상으로 이른바 내선일체 선무공작을 지휘했던 것이다. 안 의사 가족에 대한 회유와 협박은 딸 현생의 남편인 황일청을 통해서 이뤄졌고, 돈과 지위를 보장받으며 ‘밀정 노릇’을 했던 황일청은 해방 이후 암살당한 것으로 전해진다.

아이바는 상하이에서 준생을 데려올 때 ‘보안유지를 위해서 상하이에서 곧장 인천으로 오는 배편 대신에 베이징~만주~두만강을 거쳐 금강산으로 먼저 데려가는 한편, ‘상해 재류동포 향토 만선시찰단’들도 전향이나 협력 조건 없이 동반시켜 심신을 안정시키는 치밀한 작전을 폈다’는 증언도 남겼다.

이 사건을 계기로 ‘변절자’로 낙인이 찍힌 준생은 해방 이후 귀국해서도 환영받지 못하다 52년 전쟁 와중에 부산에서 병사했다. 그 후 그의 가족(부인 정옥녀와 1남2녀)은 또다시 이국땅 미국으로 이민을 떠났다.

아이바는 안 의사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을까. “하루는 정색을 하고 물었더니, ‘나라를 위해 헌신한 안 의사는 존경해야 마땅한 인물이다. 비록 서로 지배와 피지배자로 적대적 관계이지만 위대하다고 생각한다’고 했어. 그는 ‘안’자만 나와도 자세를 가다듬으며 일종의 교주를 숭배하는 듯한 인상까지 풍겼으니까.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는 알 수 없지만 준생을 내선일체의 선전도구로 이용한 것도, 그 가족의 생계를 지원한 것도 정략적 목적이 아니라 동정과 사명감이었다고 그 자신은 믿고 있더군.”

70년 84살로 사망한 아이바는 말년에 신변을 정리하면서 최 원장을 따로 불러 유언 같은 부탁을 했다. ‘내가 언제 떠날지 몰라서 모아온 자료를 외무성에 기증하기로 했다. 모리타 요시오(총독부 관리 출신·전 서울 성신여대 교수)에게 정리하라고 모두 줬으니, 안 의사 관련 기록을 복사해서 서울의 안중근기념관에 전달해달라.’

그때 그가 건네준 자료 중에는 친구인 통역관 소노키한테서 전해받았다는 안 의사 관련 사진 30여장이 포함돼 있었다. “아이바 말로는 안 의사 재판 당시 법정이나 형무소 안에서 사진 촬영은 금지돼 있었지만 소노키가 몰래 찍거나 수집해놓은 것이라더군. 뤼순에서 돌아온 소노키는 이 사진의 원판(유리건판)을 당시 남대문 밖에 있던 아사히사진관에 맡겨두고 안 의사를 존경하는 이들에게 복사해서 나눠줬다고 했어.”

 아이바와 안응칠의 ‘대물림 악연’
1939년 10월16일 조선호텔에서 안중근 의사의 둘째아들 안준생이 이토 히로부미의 둘째아들 이토 분키치를 우연을 가장해서 만난 장면으로, 당시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등에 대서특필된 사진이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 30주기에 맞춰 조선총독부가 짜놓은 각본과 이를 충실히 실행한 아이바 기요시의 연출에 따라, ‘아들 준생이 부친의 죄를 대신 사과했다’는 내선일체 선전에 이용했다. 이 장면을 계기로 안 의사 가족의 비극은 시작된다. 맨 왼쪽부터 안준생, 소노키 스에키 통역관, 마쓰자와 다쓰오 총독부 외사부장, 아이바 기요시 총독부 외사경찰관, 이토 분키치 일본광업사 사장.
아이바와 안응칠의 ‘대물림 악연’ 1939년 10월16일 조선호텔에서 안중근 의사의 둘째아들 안준생이 이토 히로부미의 둘째아들 이토 분키치를 우연을 가장해서 만난 장면으로, 당시 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보> 등에 대서특필된 사진이다. 이토 히로부미 암살 30주기에 맞춰 조선총독부가 짜놓은 각본과 이를 충실히 실행한 아이바 기요시의 연출에 따라, ‘아들 준생이 부친의 죄를 대신 사과했다’는 내선일체 선전에 이용했다. 이 장면을 계기로 안 의사 가족의 비극은 시작된다. 맨 왼쪽부터 안준생, 소노키 스에키 통역관, 마쓰자와 다쓰오 총독부 외사부장, 아이바 기요시 총독부 외사경찰관, 이토 분키치 일본광업사 사장.
하얼빈 총영사관 때부터 마지막 순간까지 150여일 동안 안 의사의 귀와 입이었던 소노키는 순국 이후 <안응칠 역사> 발견 이전까지 전해진 안 의사 관련 모든 긍정적인 일화의 원 제공자였다고 최 원장은 평가했다.

도쿄 국제한국연구원장으로 있던 76년 최 원장은 소노키의 외동딸 요시코(당시 일본 가정재판소 조정위원)를 만났다. 신문에 소개된 최 원장의 기사를 보고 직접 찾아온 그는 소노키가 죽는 날까지 안 의사를 흠모했다는 사실을 확인해줬다. “52년 사망한 소노키는 딸에게 안 의사 관련 사진과 유묵, 신문 기고문 등 모두 41점의 유품과 사료를 남기면서 소중하게 보관하라고 당부했어. 이후 86년 외동딸이었던 요시코는 후손이 없다며 그 사료들을 모두 국제한국연구원을 통해 한국에 기증했지.”

그때 기증 사료 중에는 유독 비단 보자기에 따로 싸서 보관한 사진이 한 장 있었다. 바로 1909년 10월27일 하얼빈의 일본총영사관에서 찍은 안 의사의 부인과 두 아들의 가족사진이었다. 또 소노키가 순국 이후 뤼순에서 발간되던 <만주일일신문> 등에 기고한 ‘안중근의 최후’를 비롯한 중요 기록들도 포함돼 있었다. 1909년 12월14일 사형선고를 받은 뒤 안 의사가 히라이시 요시토 뤼순고등법원장을 만나 항소를 포기하는 이유를 밝힌 면담록, 순국 때까지 1부만 쓴 채 미완성인 <동양평화론>의 나머지 내용에 대한 구상 등 그의 자료들은 안 의사의 사상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단서를 제공하는 사료로 평가됐다. “만약 사형 대신 무죄로 특사를 시켜주면 일제를 위해 얼마나 기여할 수 있느냐는 재판장의 질문에 안 의사는 ‘러시아로 가서 조선인을 교육·훈련시켜 독립민족국가를 세우겠다’고 답했는데 소노키는 이를 두고 또 한번 안 의사의 기개에 놀랐다고 기록해놓기도 했지.”

최 원장은 또 사카이 경시의 후손들을 통해 그 역시 안 의사를 적대시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한국의 의인이므로 우리도 존경해야 한다’는 얘기를 남겼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78년 나가사키에서 사카이가 소장했던 <안응칠 역사> 한문필사본이 나온 직후 그 지역 아사히신문 지국에서 ‘안 의사 유묵’을 입수했다며 감별 요청이 왔어. 사카이의 직계는 없고, 신용금고에 근무한다는 조카가 들고 왔었는데, 안 의사는 잘 모르지만 사카이가 생전에 소중하게 지닌 유품이어서 간직해왔다고 했어.”

지난 62년 공개된 안 의사의 공판 기록을 보면, 사카이는 애초 뤼순형무소장의 통역이라고 자신의 신분을 속인 채 안 의사에게 유치하고 민족을 비하하는 질문을 던졌다. 그에 맞서 안 의사 역시 거짓 증언을 계속했다. 따라서 다섯번째 취조 때까지 안 의사의 증언은 만들어낸 얘기가 많다는 걸 유념할 필요가 있다. 그러다 안 의사는 여섯번째 취조 때 “당신이 본국에서 온 고관인 줄 알고 있다. 그래서 나도 너를 속여왔다. 이제부터는 내 얘기를 하겠다”고 털어놓았다.

최 원장은 “식민지 조선에서 일했던 일제의 지배층 중에는 패망 이후 ‘일제의 도움으로 조선의 근대화가 이뤄졌다’는 우익들의 침략 합리화 논리를 따르면서도 한편으론 ‘한국을 좋아하고 한국이 잘되길 바란다’는 이중적인 인식을 지닌 사람이 많다”고 전제하고, 이들 3명의 통역경찰도 그런 범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지만, 안 의사의 인품과 사상에 깊이 감화돼 진심으로 존경했다는 것 또한 사실이라고 평가했다. 오늘날 안 의사를 숭모하는 일본인들이 적지 않은 데에는 이들의 영향이 크다는 것이다.

구술정리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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