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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이토 저격자 따로 있다? 일본 아직도 ‘안중근 비하’

등록 2011-06-13 19:35

최서면의 안중근을 찾아서
최서면의 안중근을 찾아서
일본의 허설 “바보같은 놈” 유언도 지어낸것
흩어진 탄환이 ‘안중근’ 지목 ‘제3자 저격설’ 거짓말 드러나
한국의 허설 “항일동지 단체로 약지 잘랐다”
12단지 동맹설 실체 못밝혀 십자총알 안중근 제작설도 오류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적으로 위대한 인물에 대해서는 허설과 오류가 쌓이기 마련이다. 안중근 의사도 예외는 아니다. 하얼빈 의거와 뤼순의 순국 1세기가 넘어가지만 안 의사에 대한 잘못되거나 근거없는 정보와 일화들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최서면(83) 국제한국연구원장은 “1969년 <안응칠 역사> 발견 이래 반세기 가까운 안중근 연구 과정은 새로운 사실을 밝혀내는 희열의 순간이었지만, 또 한편으로는 잘못된 근거에 따른 오류와 의도적으로 왜곡된 사실을 바로잡고자 끊임없이 확인하고 지적하는 논쟁의 반복이기도 했다”고 말했다.

그는 특히 안 의사에 대한 상반된 인식과 평가에 따라 한·일 두 나라에서 떠도는 허설의 양상도 대조적인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일본 쪽에서는 주로 안 의사의 위대함을 인정하고 싶지 않거나 비하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왜곡 사례가 나온다면, 한국 쪽에서는 안 의사를 지나치게 영웅시하거나 숭모하려는 시각에서 과장된 이야기들이 떠돌고 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일본 쪽에서는 해방 이전부터 나온 ‘이토의 마지막 유언 바카야로설’과 ‘제3자 저격설’이 대표적이라면, 한국 쪽에서는 ‘십자가 총알’과 ‘12단지동맹’을 둘러싼 오해를 꼽을 수 있다.

‘이토는 총에 맞은 뒤 응급치료를 받았고, 브랜디를 두 잔 마셨다. 조선인이 가해자라는 말을 듣고 “바카야로!”(바보 같은 녀석)라고 읊조리더니 곧 숨을 거두었다. 저격 후 30분이 지난 뒤였다.’

1909년 10월26일 오전 10시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안 의사의 저격을 받고 쓰러질 당시 수행했던 주치의 고야마 젠이 그려서 검찰과 일본 정부에 보고한 주검 검안도. ‘2층에서 제3의 범인이 쏜 총에 맞아 총알 3개가 모두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박혔다’는 무로타의 주장과 달리 거의 수평이다.(왼쪽 사진) 안 의사가 쏜 브라우닝 권총에서 나온 총알로 일본 국회의사당 앞 헌정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끝 모서리에 새겨진 십자 모양은 안 의사가 새긴 게 아니라 ‘엑스프레소’라는 제품의 특징으로 밝혀졌다.(오른쪽 사진)
1909년 10월26일 오전 10시 하얼빈역에서 이토 히로부미가 안 의사의 저격을 받고 쓰러질 당시 수행했던 주치의 고야마 젠이 그려서 검찰과 일본 정부에 보고한 주검 검안도. ‘2층에서 제3의 범인이 쏜 총에 맞아 총알 3개가 모두 대각선으로 비스듬히 박혔다’는 무로타의 주장과 달리 거의 수평이다.(왼쪽 사진) 안 의사가 쏜 브라우닝 권총에서 나온 총알로 일본 국회의사당 앞 헌정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끝 모서리에 새겨진 십자 모양은 안 의사가 새긴 게 아니라 ‘엑스프레소’라는 제품의 특징으로 밝혀졌다.(오른쪽 사진)
2009년 가을 이토의 고향인 일본 야마구치현 히가시에서 열린 이토 히로부미 사망 100주기 특별전시회에 나온 ‘이토의 피묻은 와이셔츠’를 소개한 설명이다. 와이셔츠를 보관한 나무상자의 뚜껑에 적혀 있는 것으로, 당시 이토를 수행한 귀족원 의원 무로타 요시아야의 증언을 인용한 것이다. ‘위키피디아’를 비롯해 한·일 두 나라에서 나온 수많은 안 의사 관련 기록에서도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대목이다.

“한마디로 거짓말이야.”


최 원장은 그 진원지로 <무로타 요시아야 옹의 이야기>(室田義文翁譚·조요메이지기념회 도쿄지부 펴냄)를 지목했다. 이토를 수행한 무로타(1847~1938)가 생전에 했다는 이야기를 모아 42년에 펴낸 이 책에서 처음 나온 목격담이라는 것이다.

“의거 당시 하얼빈역에서 이토의 저격 순간을 목격한 수행원은 모두 9명으로, 무로타를 비롯해 비서 후루타니, 귀화중국인 통역 정영방, 육군소령 마쓰모토, 궁내부 대신 모리, 궁내부 소속 주치의 고야마, 그리고 시종 3명이 있었어. 의거 직후 이들은 모두 증인 신문을 받았고, 귀국한 뒤에는 사건 현장 보고서를 제출했어. 그런데 무로타만 다른 얘기를 했고 그래서 공식 조사에서도 무시됐는데 마치 사실처럼 되살아난 거지.”

무로타의 증언을 근거로 한 이설 중에는 이토가 안 의사의 총알에 맞아 죽은 것이 아니고 진범은 러시아인일 것이라는 이른바 ‘제3자 저격설’도 들어 있다. ‘이토가 맞은 탄환은 안 의사가 들고 있던 브라우닝 권총이 아니라 하얼빈역사 2층 식당에서 진범이 쏜 프랑스제 기마총(카빈총)에서 발사된 것이다. 이 때문에 이토의 몸에 박힌 총탄 세 발은 모두 위에서 아래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최 원장은 “이토가 맞은 총알은 지금까지 누구도 본 적이 없다. 더구나 무로타는 이토가 죽는 순간도 보지 못했다. 그러니 이 모두가 지어낸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고 단언했다.

일본 외교사료관에 보관돼 있는 수행기록과 주치의의 검안 보고서, 당시 뤼순과 일본에서 나온 신문의 보도 내용 등이 반론의 근거다. ‘이토는 3발의 총격을 받고 열차로 옮겨져 30분 만에 숨을 거뒀다. 비서가 유언을 받으려 했을 때는 이미 혼수상태였다. 무로타는 이토 바로 뒤쪽에서 의장대 사열을 하다, 이토가 쓰러진 순간 부축해서 열차로 옮길 때까지만 수행했다. 이토의 주검은 곧바로 일제 관할지이자 일본으로 가는 배편이 있는 다롄항으로 이송됐다. 열차에는 주치의인 고야마 젠이 상비해온 솜으로 출혈을 막으며 동행했다. 다롄에 도착한 뒤 일본적십자병원장, 헌병 군의관, 고야마가 모여 부검 여부를 논의했다. 이들은 총알이 너무 깊이 박혀 빼내려면 또한번 주검을 훼손해야 하는데 잔인한 노릇이어서 그대로 밀봉하기로 합의하고 일본식 관에 염을 했다.’

따라서 누구도 이토를 부검하지 않았다. 그러니 총알은 지금도 주검에 박혀 있다고 봐야 한다. 그러나 당시 이토에 이어 안 의사의 총에 맞은 다나카 세이지로 만철 이사의 구두 안에 남아 있던 총알을 통해 안 의사의 브라우닝 권총에 맞았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안 의사 재판 때 ‘이토 사살의 증거’로 제출된 이 총알은 다나카의 사후 유족들의 기증으로 일본 국회의사당 앞 헌정기념관에 전시돼 있다. “일본의 한 르포작가가 <무로타…> 책을 보고 직접 총알 감식을 의뢰해 그 결과를 책으로 펴내기도 했는데, ‘아무리 입을 놀려도 권총알이 카빈총알이 될 수는 없다’고 인정했어.”

천엔짜리 화폐에 들어 있던 이토의 초상을 20년 만에 바꾸는 논란이 일었던 84년 무렵, 최 원장의 강연회장으로 찾아온 이토의 손자(셋째 아들 신이치의 후손)도 “할아버지는 총격 직후 사망해 유언은 한마디도 없었다고 들었다”고 확인해줬다.

이미 66년 3월 일본의 권위있는 종합잡지인 <문예춘추>에서 무로타의 설을 인용한 수기를 실어 우리 학계에서 반박과 항의를 한 적도 있다. 그럼에도 순국 100돌을 계기로 지난해 일본에서는 ‘이중저격설’을 내세운 새 책들이 또 출간됐다. “일제 당국도 터무니없어 무시한 낭설임이 명명백백한데도 이런 왜곡된 주장을 계속하는 배경에는 ‘안 의사와 한국인’을 비하하려는 일본의 극우적 시각과 흥미 위주의 상업성이 깔려 있다”고 최 원장은 분석했다.

그런가 하면 국내에서는 한동안 바로 이 총알이 안 의사의 독실한 신앙을 상징하는 증거로 잘못 풀이되기도 했다. 총알의 끝 모서리에 십자 모양이 새겨져 있는데, 이를 가톨릭 신자로서 안 의사가 일부러 만들었다고 오해한 것이다.

당시 재판 기록을 보면, 검사가 동지 우덕순에게 ‘총알의 십자 모양은 원래 그런 것이냐, 안중근이 만든 것이냐’고 거듭 묻자, ‘연해주와 시베리아 일대에서 흔히 파는 것으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구했다’고 답하는 대목이 나온다.

“‘엑스프레소’란 이름의 십자 총알은 몸에 맞았을 때 회전을 하면서 살을 파고드는 특징이 있었어. 그래서 1899년 네덜란드에서 열린 제1차 만국평화회의에서 끝 모서리에 납을 묻혀 살을 썩게 하는 ‘덤덤탄’과 더불어 비인도적 살상기구란 이유로 사용금지를 결의해 놓았거든.” 그는 “일제 재판부는 이미 이런 국제규약을 알고 있었으면서도 안 의사가 이토를 잔인하게 죽이고자 일부러 총알을 그렇게 만들었다는 진술을 끌어내려 했던 것”이라고 꼬집었다.

하얼빈 의거 101돌과 순국 100돌을 맞아 지난해 10월26일 새로 개관한 서울 남산의 안중근의사기념관 전경.(왼쪽 사진) 1909년 3월 안 의사와 11명의 동지가 모여 왼손 약지의 첫마디를 잘라 혈서로 ‘대한독립’(오른쪽 사진)을 쓰며 항일 결사를 했다는 ‘12단지동맹’을 상징해 12개의 기둥 모형을 살렸다. 그러나 안 의사와 더불어 11명의 동지들 모두 단지를 했다는 흔적은 지금껏 확인되지 않고 있다.
하얼빈 의거 101돌과 순국 100돌을 맞아 지난해 10월26일 새로 개관한 서울 남산의 안중근의사기념관 전경.(왼쪽 사진) 1909년 3월 안 의사와 11명의 동지가 모여 왼손 약지의 첫마디를 잘라 혈서로 ‘대한독립’(오른쪽 사진)을 쓰며 항일 결사를 했다는 ‘12단지동맹’을 상징해 12개의 기둥 모형을 살렸다. 그러나 안 의사와 더불어 11명의 동지들 모두 단지를 했다는 흔적은 지금껏 확인되지 않고 있다.
최 원장은 마지막으로 ‘12단지동맹’과 관련해서도 의문점과 함께 오류의 가능성을 제기했다. ‘동의단지회’로도 불리는 단지동맹은 안 의사가 재판 과정과 <안응칠 역사>에서 언급하면서 처음 등장한다. ‘1909년 연추 방면으로 돌아와 동지 12명이 모여 단체를 만들기로 하고 각각 왼손 약지를 끊어 태극기에 ‘대한민국’을 혈서로 쓴 다음 대한독립만세를 세번 부르고 흩어졌다’는 내용이다.

사형이 확정된 뒤 1910년 3월 안 의사는 뤼순형무소로 면회를 온 두 동생에게 ‘왼손 약지를 잘라낸 단지와 몇가지 유품을 백규삼의 집에 보관해뒀다’고 일러줬고, 순국 이후 동생 정근은 이를 찾아 얼굴사진·태극기·단지사진 등을 넣은 ‘안 의사 엽서’를 2000부 제작해 항일운동 자금을 모으기도 했다.

그런데 당시 안 의사는 동지들을 보호하고자 11명의 이름 전부를 끝내 공개하지 않아, 지금까지도 단지동맹의 명단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을 뿐 아니라, 안 의사의 단지 말고는 다른 동지들의 단지 사실은 사진도 기록도 확인된 적이 없다. 실제로 의거 동지인 우덕순의 예를 보면, 인터넷 백과사전에는 그가 ‘동의단지회’의 12명 중 한명이라고 소개해놓았으나, 안중근의사기념관의 전시 안내문에 나와 있는 명단에는 들어 있지 않다. 단지를 했다는 장소로 일제가 기록해 놓은 한자 지명도, 연추의 가리인지 하리인지 불분명하고, 그나마 지금은 러시아령으로 한인 후예들도 남아 있지 않아 확인이 어려운 상황이다.

최 원장은 “안 의사가 12명 모두 단지를 했다고 말한 까닭은 항일 동지들의 결의와 기개를 과시하고자 과장했을 것으로 짐작된다”며 다른 동지들은 단지를 하지 않았음을 추론할 수 있는 기록 가운데 하나를 소개했다. “얼마 전, 헌병사령관 아카시가 의거 직후 뤼순에 왔을 때 묵었던 집의 일본인 주인이 남긴 회고록을 찾았는데, 아카시는 당시 누구보다 단지동맹의 동지 11명을 체포하는 데 혈안이 됐지만 끝내 ‘단지’는커녕 흔적도 찾지 못한 채 조선으로 돌아가며 한탄을 했다는 대목이 나와 있어.”

최 원장은 세월이 흐를수록 이처럼 왜곡되거나 한때는 근거가 없어 무시됐던 허설들이 새로운 사실인 양 등장할 수 있으므로 이를 예방하고 역사적 고증을 위해서도 우리 정부·학계에서 공인하는 ‘안중근 전기’를 간행할 필요가 있다고 거듭 제안했다.

구술정리 김경애 기자 ccandori@hani.co.kr

도움말/안중근연구모임 장규식(중앙대) 장석흥(국민대) 최기영(서강대) 한시준(단국대) 한철호(동국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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