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가게 아가씨] 아라카와 히로무 <은수저> (상)
잘 죽이기 위해 잘 살려야 하는 ‘귀한 생명’
도시출신 농고생이 겪는 비정한 농촌 현실
잘 죽이기 위해 잘 살려야 하는 ‘귀한 생명’
도시출신 농고생이 겪는 비정한 농촌 현실
‘등가교환’이라는 비정한 법칙을 바탕으로 한 대형 판타지 <강철의 연금술사>를 그린 아라카와 히로무가 농촌 만화를 그린다고 했을 때 처음엔 당황스러웠다. 만화 총판 진열대에서 검은색 스탠딩 칼라 교복을 입은 전형적인 일본 고교생이 젖소 곁에 한가롭게 누워 있는 <은수저> 1권 표지를 보니 이건 영락없이 그 <강철의 연금술사> 작가의 그림체긴 했다. 그러고 보니 그 옆에 놓인 만화 <백성 귀족> 또한 같은 작가의 ‘체험’을 바탕으로 한 농촌 소재 만화라고는 들었다.
내가 도시 아이라는 자각도 없이 주어진 조건이 그랬으니 평생 도시에서 살아온 나, 흙에 관한 추억이라곤 한 톨도 없는 나, 남들이 고향 얘기할 때 웃는 낯으로 고개만 끄덕일 뿐 입은 꾹 다물고 있는 내게 농촌 만화는 판타지 만화보다도 멀었다. 2권이고 3권이고 나올 때까지 읽지 않고 내버려 두었다.
그러다 일주일에 한 번꼴로 별일 없어도 들르는 만화 총판에서 그날따라 살 책이 없었고 믿을 만한 친구가 워낙에 강력추천 했기 때문에 별 기대 없이 <은수저> 1권을 사서 읽었는데 웬걸, 바로 2권 앓이를 시작했다. <은수저> 1권의 표지는 2장. 평화로워 보이는 겉표지를 벗기면 나오는 속표지 속 비장한 표정의 농업 고등학교 학생들은 ‘등가교환’보다 더 비정한 농업의 세계를 대변하는 듯하다.
‘행복은 성적순’에 내몰리다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진학
<은수저>는 홋카이도의 대표적 농업지대인 토카치 지방에 위치한 ‘오오에조 농업고등학교’라는 가상의 학교를 배경으로 펼쳐진다. 가상의 학교라고는 해도 실제 모델이 있고(작가가 졸업한 홋카이도 오비히로 농업고등학교로 알려져 있다) 홋카이도 개척 농민 4세대인 작가의 경험과 취재가 맞물려 인물 설정을 제외하곤 판타지라고는 1g도 없는데도, 일반 고교생의 입장에서 보자면 그 어떤 판타지보다 비현실적이다. <백성귀족>의 대사를 빌자면 “농가의 상식은 사회의 비상식”이라고나 할까.
<은수저>는 주인공인 홋카이도의 대도시 삿포로 출신 하치켄 유고가 ‘숲’에서 길을 잃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학교에서 실습 중에 도망친 송아지를 잡으러 우사를 나섰는데 정신을 차리고 보니 숲이었다. “난 분명 학교에 있었을 터인데.... 뭐지?”라며 패닉에 빠진 그의 앞에 ‘세기말 패자’와 같은 위용을 뽐내며 본 적도 없는 거대한 말을 탄 여학생 아키가 등장한다. 숲 한가운데 같았던 이곳은 둘레 20km에 달하는 거대한 학교 부지 안. 도시 아이 하치켄이 농고에서 온 몸으로 경험하는 ‘문화 충격’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주인공 하치켄은 입시와 성적을 중시하는 엄한 아버지 밑에서 중학교 때까지 석차 한 등수, 시험성적 1점에 목숨을 걸며 자랐다. 열심히 공부해도 성적이 오르지 않는 자기 자신에 크게 실망하고 자포자기한 그에게 담임 교사가 오오에조 농고 진학을 권한다. 이렇다할 꿈도 희망도 없던 그는 열패감에 더해 자신을 몰아붙인 부모와 떨어지고 싶다는 마음에 기숙사제 농고 낙농과학과에 진학하게 된다. 사무직 아버지를 두고 도시에서 자라 온 그에게 광활한 학교 부지, 종잇장처럼 얇은 영어, 수학 교과서와 백과사전 두께의 축산, 농업경영 등 농업 관련 교과서, 새벽 4시에 말을 돌보는 것으로 시작해 양계장 실습, 소 직장 검사 실습 등 온갖 노동으로 점철된 학교생활은 놀라움 그 자체다. 농가에서 자라나 이 정도 노동은 가뿐한 학교 친구들은 더 놀랍다.
도시인의 아련한 향수는 환상일 뿐, 밥벌이 투쟁
농업만화라 하면 ‘전원일기’ 같은 평화롭고 포근한, 아련한 향수를 자극하는 ‘고향’의 이미지를 떠올리기 쉽지만 <은수저>는 그러한 도시인의 환상을 철저히 깨부순다. 농촌에서 농업은 생계 수단이며 엄연한 ‘산업’이라는 것이다. 더구나 농업은 창조 경제니 고부가가치니 신성장 동력이니 하는 곳에선 저 멀리 떨어진 1차 산업이다. 어린 아이까지 동원해 아무리 일해도 자녀 대학조차 보내기 어려운 일본 농촌의 현실은 <은수저>뿐 아니라 같은 작가의 자전적 만화인 <백성귀족>에도 언급된다.
<백성귀족>에 따르면 작가 또한 6년제 수의학과에 보낼 돈은 없다는 부모의 말에 수의사의 꿈을 접고 만화가가 됐다. 테라사와 다이스케의 요리 만화 <미스터 맛짱>에도 값싸고 질좋은 음식을 원하는 ‘소비자’와 그것을 제공하려 더 품을 많이 들이고 더 값이 싼 원재료를 요구하는 ‘요리사’(사업가) 사이에서 희생되는 ‘생산자’의 문제가 고민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어려운 환경에서 농촌의 밥벌이 투쟁은 더 치열해 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투쟁은 ‘먹거리’라 명명되는 생명을 다루는 일이기에 잔혹하기까지 하다.
판타지나 무협에서 인간은 ‘정의’를 위해 같은 인간을 죽이지만 현실에서 인간은 ‘인간’을 위해 아무 죄 없는 가축을 죽인다. 산업으로서의 농업은 작물이나 가축을 ‘기르는 일’이기도 하지만 ‘죽이는 일’이기도 한 것이다. 상품으로서의 작물과 고기, 유제품 등은 철저히 규격화되어 시장에 나간다. 맛이나 신선도에 문제가 없어도 모양이 조금 흐트러진 과일이나 채소는 유통 과정에 오르지도 못하고 폐기된다. 작물에 집적대는 각종 크고 작은 생물들은 ‘해충’ 등으로 분류되어 남김없이 죽임을 당한다.
농약으로 대량학살하든 손으로 하나하나 잡아내든 그야말로 ‘내가 살기 위해 남을 죽여야 한다’. 작물 자체도 가지치기 등을 해서 어떻게든 더 좋고 더 많은 과실을 맺도록 계속해서 손을 대야 한다. 식물이나 벌레야 인간과 너무 다른 속성을 지녔기 때문에 죽이고 살리는 것에 그다지 감정이입을 하지 않더라도 가축은 다르다. 도시에서 반려동물을 피붙이처럼 애지중지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듯이 가축은, 특히 인간과 같은 포유류는 분명 인간에게 ‘나와 같은 생명’이라는 인식을 준다.
도시에선 반려동물, 농촌에선 경제동물
<은수저>에서 가축은 ‘경제동물’이라 명명된다. 우유나 고기, 달걀 등 농가가 팔 수 있는 것들을 생산하는 소, 돼지, 말, 닭 등이 그것이다. 우리가 ‘마블링이 끝내주는’ 고기로 만나는 가축들은 <은수저>에서는 모두 살아있는 생명이다. 다만 이 생명들은 목적을 달성하는 한에만 생존이 허락된다. 하치켄을 비롯한 농업 고교 학생들은 밤낮없이 양계장에서 달걀을 수거하고 마방을 청소하고 짚을 교체하고 소젖을 짜고 돼지를 기른다. 대부분 농가의 자식인 학생들과 농업에 이골이 난 교사들은 모두 가축을 소중히 여긴다.
하치켄이 젖소와 부딪혀 둘 다 흙바닥을 뒹굴면 하치켄은 제쳐놓고 모두들 젖소가 다치지 않았는지 걱정할 정도다. 그러나 이는 반려동물을 예뻐하는 마음과는 다르다. “나보다 소가 더 중요하다는 거냐”고 볼멘소리를 하는 하치켄에게 농가 출신 친구들은 말한다. “소는 다치면 경우에 따라선 살처분해야 되거든.” 학생이며 교사며 농업 고교의 모든 구성원들은 새벽 4시부터 가축을 돌보며 아프거나 다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지만, 다치거나 늙어서 ‘더 이상 경제성이 없어지면 죽인다‘는 전제 또한 너무나 당연하게 공유하고 있다. <하로 이어짐>
김효진기자 july@hani.co.kr
▶김효진의 만화가게 아가씨 http://plug.hani.co.kr/toon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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