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비가 와 이른 더위를 좀 식히더니 비가 그치고 이제 본격적인 더위가 왔다. 가볍게 섭씨 30도를 넘는 낮 기온, 집 밖에 나서자마자 아스팔트에서 열기가 훅 끼친다. 몇 주 전까지만 해도 주말에 날이 맑으면 밖에 나가고 싶어 몸이 달아 가까운 공원에 꽃놀이며 농지, 뒷산 산책이라도 다녔는데. 4월말부터 5월까지 단 6주. 짧은 봄이었다.
초여름 문턱, 감기에 1박2일 야유회 후유증으로 나른
환절기 감기가 유행할 땐 걸릴락 말락 아슬아슬하게 고비를 잘 넘겼는데 초여름 문턱으로 진입한 지금 엉뚱하게 남의 결혼식장 가서 감기가 옮아 일주일째 콜록대고 있다. 정체불명의 결혼식장 뷔페 음식은 왜 그리 많이 집어 먹었는지 역시 일주일간 소화불량으로 고생 중이다. 그렇게 딱 쉬어야겠다 싶을 때 닥친 회사 1박2일 야유회. 밤새 잠을 못자 온 몸이 나른하다.
밖에 나가는 것은 포기하고 방에서 빵을 집어 먹으며 방에서 오노 나츠메의 <라 퀸타 카메라>를 읽으니 일어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다시 졸음이 밀려왔다. 그러고 보니 확실히 기온이 높긴 하지만 습하진 않다. 얇은 여름용 실내복을 입고 침대에 가만히 엎드려 책만 읽으니 열어놓은 창문으로 바람도 솔솔 들어온다. 밖은 여름이지만 방 안은 아직 봄이로구나. 아, 아니다, 지중해 근처에도 가 본 적 없지만 이게 바로 지리 시간에 달달 외웠던 ‘고온건조’ 지중해성 기후일지도. 몽롱해진 머리에 아귀가 맞지 않는 생각의 단편들이 지나갔다. 바야흐로 낮잠의 계절이 온 것이다.
font color=#003366>풍부한 표정과 장면연출 습관이나 몸짓언어로
라 퀸타 카메라>는 굵고 시원한 선으로 호감형의 인물을 그려내는 오노 나츠메의 연작 단편집이다. 오노 나츠메는 대부분의 일본만화와는 확실히 구별되는 소재와 작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비교적 근간인 <납치사 고요>나 <츠라츠라 와라지>처럼 일본 에도 시대를 다룬 작품도 있지만 그보다는 유럽, 그것도 따스하고 청명한 기운이 절로 느껴지는 지중해 연안 국가를 배경으로 다룬 작품이 많다.
장편 <리스토란테 파라디조>와
도 그렇고 단편집 와 <라 퀸타 카메라>도 그렇다. 배경뿐 아니라 등장인물도 대개 현지인이고 개중에 ‘조연’으로 일본인이 등장해 주인공들 관점에서는 ‘독특한’ 일본문화를 선보이기도 한다. 매력적인 중년 남성들이 많이 등장한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특징이다.
배경뿐 아니라 이야기 전개 측면에서도 여타 일본만화와 차별점이 있다. 일본만화 특유의 ‘중얼거림’이 적다는 것. 일본 드라마나 만화의 특징 중 하나는 주인공 내면의 고뇌 내지 망상을 이야기 전개에 중요한 부분으로 들여온다는 것이다. 따라서 드라마에서는 주인공의 ‘내레이션’이 많고 만화에서도 대화가 아니라 ‘독백’이나 ‘생각’이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 성찰적 인물을 중심으로 한 전개는 독자가 이들에게 공감할 경우에는 ‘동일시’를 통해 최고의 몰입을 끌어낸다.
하지만 오노 나츠메는 작품 속 인물들의 감정 흐름을 독백을 통해 처리하지 않는다. 대신 단순한 그림체 어디에서 나오는지 모를 풍부한 표정과 장면 연출을 통해, 그리고 그의 심경을 읽을 수 있는 습관이나 몸짓을 통해 보여준다. 개성있는 인물 한 두 사람이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잘 짜여진 틀 속에서 각기 다른 성격의 인물들이 생동감 있게 살아가는 곳이 오노 나츠메의 세계다.
뛰어난 연출력을 가진 이야기꾼이기에 장편도 좋지만 짧은 페이지 수 안에서 앞뒤가 딱딱 들어맞는 완결된 이야기를 꾸려야 하는 단편과 한 두 개의 단서를 치밀하게 연결시키는 연작에서 더 빛난다는 것이 개인적인 생각이다. 기존의 일본만화보다는 영화와 닮은 구석이 많다는 생각도 든다.
font color=#003366>마지막 다섯번째 방 81살 노인의 암시…낮잠은 덤
라 퀸타 카메라>는 이탈리아 소도시의 한 ‘셰어 하우스’에서 일어나는 일을 그렸다. ‘라 퀸타 카메라’는 이탈리아어로 ‘다섯번째 방’이라는 뜻. 다섯 개의 방이 있는 집엔 집주인이자 바를 운영하는 상냥한 마시모, 트럭 운전사 일을 하는 다소 무뚝뚝한 알, 아침엔 환경미화원으로 일하고 낮엔 길에서 피리 공연을 하는 순수한 루카, 핑크색을 사랑하는 활달한 만화가 체레 등 네 명의 중년 남성이 살고 있다. 마시모의 ‘룸메이트 모집’이라는 벽보를 보고 몇 년 전부터 함께 살고 있는 이들은 성격도 직업도 제각각에 공통점이라고는 ‘알고보면 따뜻한 성품’이라는 것밖에 없지만, 이 유일한 공통점 덕에 평화롭고 느긋한 공동생활을 지속한다.
‘다섯번째 방’은 비워두고 근처 대학의 단기 유학생 등 늘 새로운 사람을 들인다. 자칫 지루해질 수 있는 공동생활에 윤기를 돌게하는 비결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집에 사는 다섯은 전부 우연히 만난 사람들이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우연히 ‘배정된’ 유학생들, ‘다섯번째 방’ 사람들과의 짧은 인연은 이 연작을 이끌어가는 중심축이다.
각기 다른 이유를 품고 이탈리아로 건너 온 다섯번째 방의 유학생들은 지중해의 햇살같은 네 주인공의 밝은 기운을 받으며 성장하고 반대로 네 주인공들과 소통하며 그들의 숨겨진 면모를 드러나게 해 준다. 피곤에 찌들어 집에선 잠만 자는 트럭 운전사 알은 덴마크인 유학생 샤를로트의 애정어린 오지랖으로 이혼의 상처를 극복하고, 순수한 피리 연주자 루카는 다섯번째 방 주인의 여자친구와 사랑에 빠져 실연의 아픔을 겪기도 한다.
유학생의 출신국에 따라 다른 성격을 부여하는 오노 나츠메의 ‘편견’도 흥미롭다. ‘덴마크에 사는 게 지겨워서 이탈리아에 왔다’는 샤틀로트의 생각에 담긴 ‘지루한 북유럽’이라는 편견도 재미있지만 압권은 역시 매일 감자튀김을 한 봉지씩 튀겨 먹는 배불뚝이 미국 유학생이다. 일본인 유학생 아키오가 설날에 모두에게 일본식 떡국을 대접하는 장면도 훈훈하다.
이들의 실제 공동생활은 집주인 마시모가 가정을 꾸리게 되면서 끝이 나지만 마지막 다섯번째 방의 주인, 81살의 시나리오 작가 브룩이 ‘당신들의 생활을 시나리오로 써도 될까’라는 말로 작별인사를 하면서 어쩌면 영화 속에서 ‘영원히’ 계속될지도 모른다는 암시를 남긴다.
습해지기 전 ‘고온건조’한 초여름날, 끈적이지 않는 따뜻한 이야기를 느긋하게 즐길 수 있다. 평화로운 ‘지중해풍 낮잠’은 덤.
김효진 기자 jul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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