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길 만원 버스에 시달리며 머릿속 저녁 메뉴는 수없이 바뀐다. 짐을 챙겨 사무실을 나설 때만 해도 오늘만큼은 영양 균형을 맞춰 밑반찬 외에도 볶거나 무친 반찬 두 가지에 국까지 끓여 먹으리라 결심하지만 추위에 떨며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며 ‘날이 추우니 무친 반찬은 포기하자’고 생각한다. 정류장에서 혹시 기다리면 한산한 버스가 오지 않을까 하는 헛된 기대에 버스를 한 대, 두 대 보내는 사이 기운이 쪽 빠진다. 결국 만원 버스에 서서, 자리에 앉아 스마트폰으로 야구 중계를 보는 이를 부러워하며 정처없이 흔들리다 ‘조리 시간이 오래 걸리는 국도 포기하자’고 결심한다.
버스에서 내리고 보니 차가 밀려 생각보다 꽤 늦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집까지는 오르막 10분. 정류장 앞 채소 가게에서 장을 봐 들고 가는 것조차 귀찮고 힘들다. 급기야 다 포기하고 라면까지 떠올리다가, 결국 빈손으로 집에 돌아와 생각한다. ‘일하는 것도 힘든데 밥 먹는 것에서까지 스트레스 받지 말자. 그냥 드라마 보면서 냉장고에 있는 김치랑 김이랑 꺼내 먹으면 되잖아.’
‘마법의 조미료’ 구하려고 관광 제쳐두고 슈퍼 샅샅이
만화 <어제 뭐 먹었어>의 주인공, 퇴근길 매일매일 장을 봐 세 가지 반찬에 국까지 끓여 먹는 40대 직장인 카케이 시로를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게다가 그 반찬들은 시로가 종종 자랑하듯 재료나 조리법도 각각 다르고 “단맛, 짠맛, 신맛이 골고루 있어 맛있다.”
<어제 뭐 먹었어>는 한국에서도 영화화 된 <서양골동양과자점>의 작가 요시나가 후미의 요리 만화다. 주인공 카케이 시로는 ‘쓸데없이 잘생긴’ 40대 변호사로 “편하고 간단한 사건이라면 아무리 하찮은 것이라도 좋으니 맡겨주세요. 하지만 퇴근 시간은 지켜주셔야 합니다”라는 자세로 일하고 있다. 월급쟁이 변호사로 일하고 있는 만큼 집에 못 들어올 만큼 바쁜 날도 있고 수 년 동안 주말을 희생해야 하는 성가신 의뢰를 받기도 하지만 기본적으로는 정시 퇴근을 향해 바지런히 일한다.
퇴근한 뒤에는 특가 식재료를 찾아 단골 슈퍼 뉴타카라야를 비롯해 슈퍼 몇 군데를 순회한 뒤 집에 돌아와 저녁 식사를 준비한다. “일을 깔끔하게 마쳤다는 기분을 하루에 반드시 한 번은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저녁 준비의 위대한 점”이라고 생각하며 요리를 마칠 때쯤이면 동거하는 애인 켄지가 미용사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다. 켄지와 함께 저녁 식탁에 앉아 그 날 있었던 일들을 소재로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것으로 하루를 마무리하는 것이 시로의 전형적 일상이다.
이 만화는 어디까지나 ‘요리만화’로 만화 분량 중 절반 이상이 카케이 시로의 저녁 식사 준비 장면이다. 보고 그대로 따라할 수 있을 정도로 재료며 조리법이 자세하게 묘사돼 있다. 주부(?)가 집에서 만드는 ‘가정 요리’인만큼 전문가가 쓴 요리책과는 달리 저울이며, 계량컵 등은 일절 쓰지 않고 조미료도 적당히 사용하며 ‘대강대강’ 만든다. 한국에서 구하기 어려운 식재료를 사용하거나 직접 회를 뜨는 등 비교적 따라하기 어려운 요리도 있지만, 배추를 삶아 일본식 양념간장과 유자로 간단히 간을 맞춰 먹는 반찬, 두부와 시금치 무침, 우유를 한천으로 굳혀 검은 조청을 뿌려 먹는 디저트, 직접 만드는 딸기잼이며, 두유와 마일로를 첨가해 만드는 오리지널 카페라떼 등 쉽게 시도할 수 있는 음식도 많다.
가다랑어 분말, 다시 국물, 치킨 스톡, 고형 콩소메 등 한국 독자들에게는 생소해도 일본에서는 슈퍼마켓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조미료가 주로 사용돼 일본 독자라면 거의 전 메뉴를 어렵지 않게 조리할 수 있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 책을 보고 일본 식품점에서 일본식 양념간장을 구입했고, 고형 콩소메와 치킨 스톡은 ‘마법의 조미료’란 생각에 일본에 방문했을 때 관광은 제쳐두고 이 물건들을 찾으려 슈퍼를 샅샅이 뒤지기도 했다.)
위트와 콕콕 찌르는 대사 맛있어…요리 장면 안 읽고 넘겨도 재미
작가 요시나가 후미는 남성 넷이 꾸려나가는 케이크 가게를 소재로 한 <서양골동양과자점>을 비롯해 도쿄의 맛집 소개 만화 <사랑이 없어도 먹고 살 수 있습니다> 등을 그리며 음식에 대한 애정을 표현해 왔지만, 사실 <서양골동양과자점>에서도 살짝 드러나듯 남성 동성애를 소재로 한 만화를 주로 그렸다. <어제 뭐 먹었어?>의 주인공 카케이 시로도 게이다. 하지만 이 만화에서 ‘전형적 게이’로 묘사되는 등장인물 중 하나가 말했듯이 시로의 행동에서 두드러지는 특성은 ‘게이’라는 데서 나온다기보다는 “아줌마 같다”는 데서 나온다.
시로는 슈퍼에서 특가상품과 마주했을 때 희열에 들떠 “아드레날린이 나오”고 유일한 여성 친구인 50대 주부 카요와의 ‘운명적 만남’도 단골 슈퍼 뉴타카라야 앞이었다. (피차 식구가 적은 두 사람은 할인하는 수박을 앞에 두고 사고는 싶지만 남을까봐 고민하다가, 눈빛으로 서로의 뜻을 알아보고 “한 통을 사서 반으로 가르자”며 의기투합했다.) 물론 시로는 자신의 ‘아줌마다움’을 얼굴에는 전혀 드러내지 않는다. 자신이 남들에게 ‘게이처럼 보일까봐’ 늘 우려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의 우려와는 달리 ‘아줌마다움’은 그의 알뜰함(쪼잔함과 한 끗 차이인)을 드러내는 표시지 게이임을 드러내는 표시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로의 ‘일상’이 그려진 에피소드에서는, 시로가 게이이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이 많이 묘사된다. 남들에게 게이임을 들킬까봐 ‘소녀 취향’ 애인 켄지와의 야외 데이트를 거부하다가 나중엔 같이 꽃놀이까지 가는 등 나이 사십 줄의 시로가 ‘성장’하는 모습, 자식인 시로가 게이라는 것을 억지로 받아들이려 안색이 하얗게 질리면서도 “설에는 동거하는 애인을 데려오라”고 말하는 노년의 어머니와 얽힌 코믹하면서도 씁쓸한 에피소드들, “잘해주지 마요, 이 사람 게이라서 잘해주면 아빠를 좋아하게 된단 말이에요”(집에 방문한 시로와 대화를 나누는 카요의 남편에게 카요의 딸이 하는 말)라며 무신경한 말을 수시로 던지지만 ‘호모 포비아’와는 거리가 먼 지인 카요 가족들과의 이야기, ‘전형적 게이 커플’인 지인들과의 이야기 등이 그렇다.
게이 관련 에피소드가 많다면 어둡거나, 에로틱하거나, 그도 아니면 정치적일 것이라고 ‘우려’할 수도 있지만, 시로의 달관한 듯 무심한 성격과 어우러져 대부분의 에피소드는 평온하기 그지 없다. 그야말로 ‘일상’이다. (에로틱한 장면 또한 전혀 없다.) 특히 요리 밖 에피소드 부분에서는 요시나가 후미 특유의 관찰자적인 시선(등장인물들이 1인칭으로 독백하지만 사고는 3인칭처럼 하는 냉정함)과 위트, ‘촌철살인’ 대사와 구성이 두드러져, 요리 장면이 반인 이 만화에서 요리 장면은 하나도 안 읽고 넘겨도 재미있다는 이가 있을 정도로, 일상만화로서 충분히 읽는 즐거움을 준다.
김효진 기자 july@hani.co.kr
▶김효진의 만화가게 아가씨 http://plug.hani.co.kr/toontalk/2005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