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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그녀의 뇌속엔 전혀 다른 5명이 산다

등록 2013-11-04 10:45수정 2013-11-04 10:46

[만화가게 아가씨]미즈시로 세토나 <뇌내 포이즌 베리>
낯선 남자와 하룻밤 자고 머릿속 싸움 시작
남자는 죽어도 모른다, 여자가 왜 그러는지

# 사오토메 료이치, 23세 남성. 지하철 플랫폼에 서 있는데 한 여성이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지난번에는 반가웠어요.” 기억을 더듬어보니 지난 달 지인들과의 술자리에서 만난 여성. 어찌어찌 같이 밥을 먹고 나니 그녀가 집 청소를 해주겠다며 무척 적극적으로 대시해 온다. 집에 들여 함께 밤을 보내고 아침에 일어나니 그녀는 이미 사라진 뒤다.

“잊어줘”라고 했다가 금방 “좋아한다”고 했다가, 도무지…

생각해보니 연락처 교환도 안 했다. 지인에 물어물어 연락을 하니 그녀는 오히려 지인에게 무슨 얘길 한 거냐며 화를 낸다. 당황스럽다. 그래서 물었다. “난 원나잇이었나요?” 그러자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그녀의 대답. “난 그런 여자가 아니야. 지난번엔 내가 좀 이상해졌던 것뿐이야! 그때 일은 잊어줘! 잘 있어!” 이렇게 다 끝났나 싶었더니 웬걸, 밤에 집으로 돌아오니 그녀가 3시간이나 날 기다리고 서 있었다. “전화로 심한 말을 해서 미안해. 당황해서 이상한 말을 해버렸어. 사과하고 싶어서 온 거야. 난 너를 좋아해.” 나도 그녀가 싫지 않았기에 사귀기로 했다.

그러고보니 아직 그녀의 나이도 모른다. 나이를 묻자 서른이라고 답하기에 “우와, 서른? 거짓말! 미안해요. 말도 안돼”라고 말했다. 연상이라고는 생각했지만 외모도 옷도 귀여워서 전혀 서른 살로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고 뒤를 돌아보니 그녀는 왠지 또 사라져버렸다. 도대체 그녀의 머릿속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

연애의 시작은 설레고 흥분되지만 또한 고민과 탐색의 연속이다. 상대도 내게 호감이 있는지 아닌지, 호감을 보인다면 어떤 반응을 보여줘야 적절한 건지, 그냥 툭툭 찔러보는 건지 진지하게 만나보자는 건지 모든 게 헷갈린다. 그래서 안 쓰던 머리를 써 가며 상대방 행동의 ‘의미’를 해석하려 애쓴다. 어쩌면 (아니 꽤 높은 확률로) 별 뜻 없이 던졌을 수도 있는 말 한 마디, 우연일지도 모르는 눈맞춤이 혹시 내게 그가 보내는 ‘사인’이 아닐까 엄청나게 고민하는 것이다. 그의 몸짓 하나에 지금까지의 경험과 수많은 연애담론, 친구의 충고 등등을 종합해서 혼자 머릿속 보고서를 열 장은 쓴다. 혼자 납득하고 혼자 결론지어 어렵게 반응을 내놓는데 그것이 맞는 경우는, 사실 드물다.

첫눈에 반한 그를 두고 갑론을박, 배는 갈수록…

미즈시로 세토나의 <뇌내 포이즌 베리>는 이 머릿속 보고서 작성 과정을 ‘의인화’라는 기발한 아이디어로 재현한 작품이다. 주인공 사쿠라이 이치코의 머릿속에선 5명의 인물이 연일 ‘회의’를 벌인다. 우선 매사 부정적인 이케다. 이케다는 이치코의 자학적인 성향과 열등감을 대변한다. 상황을 가장 나쁜 쪽으로 해석하고 나이 얘기가 나오면 ‘열폭’한다. 사오토메의 “서른? 거짓말!” 발언에 이치코가 뒤도 안 돌아보고 도망치게 만든 장본인이다.

반대로 밝고 긍정적인 이시바시. 뭐든 좋게좋게 생각하고 이케다가 “하지 마, 상처받을 거야”라며 딴죽을 걸고 비웃을 때 맞서 싸워 이치코를 적극적으로 행동하게 만든다. 세 번째는 기록과 기억을 담당하는 키시. 이치코가 친하지 않은 사오토메에게 말할 거리가 없어 고민할 때 기억을 더듬어 화제를 제시해준다. 지난 경험을 통해 담담하게 판단하지만 무심결에 ‘흑역사’를 들추려 하는 것이 흠이다.

네 번째는 귀여운 어리광쟁이 하토코. 깊게 생각하지 않기에 상처를 두려워하지 않고 욕망에 충실하다. 너무 솔직한 나머지 사오토메와 함께 있을 때 뜬금없이 “배고프다” “화장실 좀 써도 될까?”라는 엉뚱한 말을 꺼내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무난하고 상식적인 요시다. 5명 회의의 의장을 맡고 있으며 4명의 싸움을 중재하고 사오토메와 일상적 대화를 나누려 애쓴다. 하지만 돌발 상황에 약하고 눈치 없이 다른 남자와 만난 이야기를 흘리는 등 상황을 매끄럽게 정리하는 능력은 떨어진다.

평소에는 그다지 할 일이 없는 다섯 명이지만 이치코가 첫 눈에 반한 사오토메 료이치를 만날 때는 폭풍 회의에 돌입한다. 다섯이 생각하니 홀로 생각하거나 아무 생각 없는 것보다 나아야 정상이겠지만 멍한 캐릭터 사오토메의 일거수일투족을 너무 깊게 생각하는 탓에 오히려 배는 산으로 간다. 결국 이치코는 패닉 상태에서 사오토메에게 엉뚱한 말을 던지기 일쑤다.

술자리…잠자리…전화…재회…, 그런데 20초만에…

# 사쿠라이 이치코, 30세 여성. 지하철 플랫폼에서 우연히 지난 달 술자리에서 마음에 두었던 연하남 사오토메를 만났다. 그 때부터 그에게 말을 걸어야 할지 말아야 할지 머릿속에서 갑론을박의 회의가 벌어진다. ‘전혀 안 친한 남자에게 말을 거는 건 내 캐릭터가 아냐’(요시다) ‘그게 뭐야, 인생살이 재미없게!’(이시바시) ‘말을 걸어도 날 기억 못할 거야. 이런 평범녀 따위.’ (이케다)

‘가슴이 두근거리는걸! 그 사람을 좋아하는 게 분명해’(하토코) ‘날 기억한다고 해도 무슨 말을 해야 해? 분위기만 어색해져. 이 나이에 미묘한 추억을 늘리고 싶지 않아’(이케다) ‘과거의 기억을 살펴봐도 그렇게 짧은 순간에 인상에 남은 사람은 없었어. 이왕 기회가 왔으니 조금 접촉해봐도 괜찮지 않을까.’(키시) 망설임 끝에 말을 걸었고 어찌어찌해 잠자리를 함께 하게 됐지만 도망쳐 나오고 만다. ‘자신답지 않은 행동을 한 건 맞지만 그건 그것대로 좋은 경험이었어. 몰래 나오지 말고 아침밥도 챙겨줄걸’(이시바시)

‘아냐, 하룻밤 같이 보냈다고 여친 행세한다고 생각할 게 뻔해. 얼른 집에 간 게 정답이었어’(이케다) ‘그래도 연락처 정도는 남길걸’(이시바시) ‘그러면 언제든지 또 불러달라는 의미로 받아들일 게 뻔해. 싼 여자라는 인상을 주는 추태를 보이지 않아서 다행이야.’(이케다) 도망치고 나서도 머릿속은 계속 혼란스럽다. 이제 다 끝난 일이라고 정리하려던 차에 그에게 전화가 왔다. 지인을 통해 번호를 알았다고 한다. ‘아무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이케다) 지인에게 무슨 얘기를 한 건지 걱정이 앞서 나도 모르게 화를 냈더니 “난 원나잇 이었나요?”라는 전혀 예상치 못한 대답이 돌아온다. 머릿속은 또 패닉. 그도 그럴 것이, 문자 그대로 ‘머리가 터질만큼’ 진지하게 고민해서 겨우겨우 한 행동들이니까. ‘우선 그날은 내가 어떻게 됐었던 거고 난 원래 그런 여자가 아니라고 분명히 말해야 돼. 여기서 얼씨구나 달려들면 값싼 여자라고 생각할 거야’ (이케다)

‘그 전에 원나잇 같은 게 아니라고 말해둬야’(이시바시) ‘전에 사귀었던 남자에게 얌전해 보였는데 의외였다는 말을 들었던 흑역사가 생각나’(키시) ‘이 남자는 섹스가 마음에 안 들었냐고 묻고 싶은 것뿐이야’(이케다) 혼란 끝에 튀어나온 말은 “난 그런 여자가 아니야! 잊어 줘!” 그대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애써 지인에게 물어물어 전화까지 걸어줬는데 너무 심하지 않았나 싶어 그의 집으로 가서 제대로 좋아한다고 이야기하고 오해를 풀었다. 그 뒤 그가 사귀자고 말해줘서 너무 행복했는데 서른이라는 말을 듣더니 그가 하는 말, “우와, 서른? 말도 안 돼.” 사귀자고 한지 20초만에 차여버렸다. 머릿속에서 그 말은 ‘서른? 말도 안돼! 착각녀 아줌마, 저리 꺼져!’(이케다) 등으로 각색되어 울린다. 죽고 싶다.

말한다고 알까, 차라리 모르는 사람이라면…

사실 이런 상황에서 답은 뻔하다. 몇 년 전부터 유행하는 말을 빌리자면, 소통. 작품 속에서 사오토메가 이치코에게 건넨 말처럼 “또 머릿속에서 와-와- 하고 생각하다가 그렇게 된 거에요? 제대로 말해달라고 얘기했는데도.” 즉, ‘말하지 않으면 몰라요’ 라는 것. 둘 사이의 관계에 대해서 한 쪽을 소외시키고 일방적으로 쓰는 보고서는 틀릴 수밖에 없다. ‘밀당’이니 뭐니 연애의 고수인 양 하지 말고 오해와 원망이 쌓여서 자신을 무겁게 짓누르기 전에 하나하나 이야기 해 나가는 게 가장 빠른 길이다.

알고는 있지만 잘 안 된다. 무엇보다 사랑하는 사이니까 뭐든 대화로 풀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열심히 설명하면 고개를 끄덕이며 이해해주는 건 나와 이해관계가 얽히지 않은 사람뿐이다. 오히려 가까운 사람일수록 상대에게 이해받고자 하는 욕구가 커서 작은 일로도 싸우게 된다. 옳고 그름으로 가를 수 없는 ‘다름’이 사람 사이엔 분명 존재한다. 완전한 타인이라면 수긍하고 넘어갈 수 있지만 서로 함께 살아간다면 필시 한쪽에게 괴로움을 주는 ‘다름’이. 말하면 말할수록 더 분명하게 드러나는 두 사람 사이의 깊고 깊은 심연이.

사실 이치코는 관계에 대해 무척 진지하게 고민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아무 생각 없이 사람을 가볍게 만나 웃고 떠들며 ‘지금 좋으면 그만이지’라는 모토로 살아가는 이에게 ‘망상쟁이’ 취급당할 이유는 없다. 속을 끓이며 패닉 상태에서 엉뚱한 말을 내뱉기도 하지만 막상 대화가 시작되면 생각이 많은 이치코는 여러 화제를 제시하며 둘의 관계를 어떻게 발전시켜 나가야 할지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책 속 사오토메처럼 “그런 생각은 하지도 못했어요”라며 입을 뻐끔거릴 뿐이다. 생각 없이 사는 것은 대화의 준비조차 되어있지 않다는 것을 뜻한다.

그러므로 당장 좀 피곤하더라도 ‘준비된 여성’ 이치코를 이해해주면 어떨까. 더불어 세상의 수많은 ‘이치코’들은 스스로를 긍정하며 자학을 버리고, 세상의 수많은 ‘사오토메’들은 생각 없음을 미덕으로 여기는 ‘근자감’을 좀 버리는 것이 어떠한지.

김효진기자 july@hani.co.kr

 

▶김효진 기자의 만화가게 아가씨 http://plug.hani.co.kr/toontal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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