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년 전 입사 면접 때의 일이다. 열 댓 명의 지원자들에게 처음으로 주어진 과제는 자기소개였다. 순서를 지정해주지 않고 손을 들어 원하는 순서대로 자기 소개를 하게끔 했는데 이런 방식에서는 언제나 맨 먼저 하는 것이 가장 마음이 편하다.'경쟁자’들이 멋들어진 소개를 하면 할수록 기다리는 사람의 긴장도는 높아지기 마련이다. 물론 첫 사람에게 심사위원들의 집중도도 가장 높을 터다.
자기 소개를 하라는 말이 떨어지자마자 한 지원자가 손을 들고 앞으로 나갔다.그는 "말주변이 없어서 빨리 끝내려 나왔다"며 말문을 열었지만,역시나 첫 번째로 손을 든 '승부사'답게 준비해 온 듯한 말을 유창하게 이어 나갔다.그 뒤로 차례차례 빈 틈 없이,그러나 몇 명이 몰리지도 않게 '알아서 눈치껏' 지원자들은 손을 들고 자기 소개를 했다.지원자들 모두가 입사 준비를 하면서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을 '면접에 임하는 태도도 면접 중 하나다'라는 말을 다들 마음에 새기고 '경쟁심도 있지만 협조성도 있답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한 것이 아닌가 싶다. 나는 거의 마지막에 자기 소개를 했다. '어중간한 순서보다는 마지막이 낫다'는 경쟁에 관한 상식도 작용했고 ‘어차피 모두에게 공평하게 돌아오는 순서인데 굳이 다른 사람을 제치려 하지 않았던 것이다.
경쟁심이 없으면 비난 받는 세상
이후 면접 때 이 자기 소개 순서가 문제가 됐다. '경쟁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적절히 대응하기가 어려웠다.그 말이 사실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경쟁심이 없는 것'이 문제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경쟁에서 지는 것을 용납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경쟁심이 없으면 비난받는 세상이다.우리는 늘 서로를 향해 으르렁 거려야 하고 호시탐탐 뒤통수를 치고 정수리를 밟고 올라설 궁리를 해야 한다.밟는 자든, 밟히는 자든 마음은 똑같다. '밟고 싶다'는 것.패배자와 승리자로 나뉘지만,결국 같은 사람이 자리만 바꾸는 셈이다.
한편, 사회의 한 구석에서는 이와는 정반대처럼 보이는 ’소소한 행복‘에 대한 동경도 피어오른다. ’월든‘처럼 본격적이지는 않더라도, 가난한 도시 노동자로 살지언정 어느 햇살 좋은 날 좋아하는 원피스를 입고 예쁜 카페에 가서 ’텃밭에서 직접 재배한 유기농 채소로 만든 신선한 샐러드‘ 라든가 ’방사한 닭이 낳은 유정란과 무농약 채소로 만든 비빔밥‘이라든가 ’통밀과 유기농 설탕으로 만든 건강한 빵‘ 같은 것을 먹으며 ’그래, 지금 이대로도 괜찮잖아? 내 인생도 꽤 멋지잖아?‘라고 생각하는.
몇 억 대 고액 연봉은 못 받아도 여름휴가 때는 아시아 지역으로 해외여행 갈 수 있을만큼은 벌고, 명품은 못 사도 새로 생긴 소품 가게에서 독특하고 아기자기한 디자인 상품들을 사면서 말이다. 직장에서도 초고속 승진가도를 달리거나 최연소 임원이 될 수는 없지만, 돈 많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으로 계층 상승을 할 수도 없지만, 월급 나오는 직장이 있고, 사이 좋은 배우자가 있으니 집값이 싼 교외의 좁은 전셋집이지만 아늑한 행복을 맛보며 사는 것이다.
자극적인 직설, 그러나 답을 말하지 않는…
<치에코씨의 소소한 행복>은 만화를 안 읽는 친구들도 ’그 만화 어때?‘하고 물을 정도로 현재 한국에서 가장 인기 있는 일본 만화가 중 하나인 마스다 미리의 작품이다. 마스다 미리는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아무래도 싫은 사람> 등 ’수짱 시리즈‘로 주로 30대 독신 여성의 생활을 그렸다. ’여성 공감 만화‘로 인기를 얻었지만, 솔직히 만화 총판에서 처음 <결혼하지 않아도 괜찮을까>, <내가 정말 원하는 건 뭐지> 따위의 책을 봤을 때 썩 끌리지는 않았다. 너무 직설적으로 내가 고민하고 있는 바를 던지고 있어서 오히려 부담스러웠다. 만화를 읽는 시간마저 답도 없는 현실적인 고민으로 망쳐질까 두려웠다.
하지만 워낙 ’자극적인‘ 제목 탓에 들를 때마다 눈을 떼기 어려웠던 것도 사실이다. 몇 달 망설이다 우리 신문 ESC에 실린 기사를 보고서야 사게 됐다. 내용은 생각과 매우 달랐다. 30대 중반의 주인공 수짱이 직장 생활이며 친구를 만나서 하게 되는 자기 자신에 대한 생각이며 깨달음을 방향 없이 그렸다. 제목에 대한 답을 내는 책이 아니었다. 분노를 불러일으키지도 않지만 힐링도 아니고 큰 사건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지루하지도 않고, 순간순간 사소한 생각들에 공감은 되지만, 아, 나랑 똑같네, 하면서 100% 이입을 유도하지는 않는, 균형을 잘 잡은 만화였다. 그 다음부터는 여느 한국 독자들과 마찬가지로, 나 또한 마스다 미리의 책은 ’믿고 사는‘ 책이 됐다.
그리하여 <치에코씨의 소소한 행복> 또한 비슷한 느낌의 30대 독신 여성이 주인공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웬걸, 주인공은 부부였다. 그것도 이성애자 부부. 11년째 사이좋게 부부생활을 이어오고 있는 구두 수선업자 사쿠짱과 기업에서 비서 업무를 맡고 있는 치에코씨의 일상을 그렸다.
’역시 마스다 미리‘ 라고 느낀 것은 아이를 포함해 두 부부 외의 다른 어떤 가족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점. 치에코씨와 사쿠짱의 아이는 작품 전편에 걸쳐 등장하지 않는데, ’아이가 없다‘는 언급을 포함해 아이에 관한 생각 자체가 전혀 드러나지 않는다. 이를테면 ’두 사람 사이에는 아이가 없습니다, 왜 없습니다‘ 하는 설명조차 없다. 서로 사랑해 짝을 이뤄 살아가는 두 사람만이 당연하게 그려진다.
비슷한 관점으로 인상 깊었던 다른 한 가지는 치에코씨와 사쿠짱은 명절에는 각자의 본가로 따로따로 간다는 것도 인상 깊었다. 마스다 미리는 이를 ’며느리 스트레스‘라기보다 ’명절 때만은 부모님의 아이로 지내고 싶은 마음‘으로 표현하는데, 이 또한 신선하면서도 와닿았다.
처음부터 ‘지금 이대로도 좋아’라고 했을까
치에코씨와 사쿠짱 둘 다 직업을 가지고 있지만, 책은 두 사람의 직장 생활은 거의 전혀 그리지 않는다. 한국의 홈드라마처럼 남편이며 아내의 가족과 그에 얽힌 집 대소사는 전혀 등장하지 않고 친구들도 등장하지 않는다. 흐름을 이루는 갈등도 없이 두 사람이 함께 장을 보고, 텔레비전 방송 ’다음회 예고‘를 볼 때 말을 거는 사쿠짱을 타박하고, 반찬쟁탈전을 하지 않기 위해 칸이 나눠진 접시를 사용해 식사하고, 끝말 잇기를 하며 남편 사쿠짱의 어린 시절을 상상하며 즐거워하고, 원래는 사쿠장과 콩 한 쪽도 나눠먹지만 선물 받은 해외 유명 초콜릿 가게의 초콜릿은 치에코씨 혼자 몰래 먹어버리는 등 두 사람의 생활이 한 회 당 4쪽짜리 에피소드 형식으로 계속 이어진다.
책은 특별한 사건을 보여주는 대신 두 사람이 함께 지내며 밥을 먹고 외식을 하고 대화하는 일상적인 삶의 과정에서 서로에 대해 생각하고, 나에 대해 생각하고 점점 더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는 모습을 그린다. 두 사람 사이에 있는 것은, 얻는 것도 없고 달라질 것도 없지만, 휴일 낮 한가운데에 있는 것 같은 종류의 행복이다.
서점에 들러 30분이며 1시간 동안 책을 고르며 느끼는 충만한 감각, 앞으로 나에게 끝없는 미래와 희망(주말)이 펼쳐져 있는 것만 같은 금요일 저녁 모처럼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감상하며 돌아오는 시간은 분명 소중하다. 그리고 행복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지금 이대로도 좋아‘라는 소박한 행복만을 추구한 사람들이 있었을까.
1등, 1등, 1등…, 이기는 행복에서의 하차
처음에는 누구나, 그것이 옳든 아니든 간에 사회에서 주입받은 대로 공부에서 1등하고, 운동에서 1등하고, 외국어에서 1등하고, 대기업에 입사하고, 고시에 합격하고, 업무에서 1등하고, 동료와 상사들에게 인정받고, 착착 승진하는, ’이기는 행복‘을 추구하지 않았을까. 그것을 행복이라 여기고 살지 않았을까. 하지만 1등은 언제나 한 명이고 인정받는 사람들은 소수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이가 들면서 차례차례 ’이기는 행복‘에게 배제돼 왔을 터다. 초등학교 때 1등을 했다면, 중학교 때. 중학교 때까지 1등을 했다면 고등학교 때. 그 뒤 입시, 고시, 취업, 직장에 들어간 뒤엔 업무 성과며 승진 경쟁에서 비록 그 시기는 다를지언정 우리는 모두, 언젠가는 탈락하게 된다. 이기는 쪽은 1명이거나 극소수이므로.
그래서 생각한다. 소박한 행복은 실은 ’포기‘의 다른 이름은 아닐까. 재능 때문이든 돈 때문이든 나이 때문이든 사람 때문이든 경쟁해서 끝내 얻을 수 없었던 것, 노력해서 오를 수 없었던 곳을 뒤로 하고 지친 마음을 추스를 때 보이는 삶의 다른 지평. ’지금 이대로도 괜찮잖아?‘하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하는, 소중하면서도 씁쓸한 그 무언가.
김효진기자 july@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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