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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고통스러워도 ‘인권의 퇴조’를 질문해야 한다

등록 2015-02-26 21:02수정 2015-05-28 14:28

서울 정동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는 마감을 잘 지키는 성실한 집필자다. 그는 “납기일을 잘 맞춰야 주문이 계속 들어오지 않겠느냐”며 웃었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서울 정동의 한 커피숍에서 만난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는 마감을 잘 지키는 성실한 집필자다. 그는 “납기일을 잘 맞춰야 주문이 계속 들어오지 않겠느냐”며 웃었다. 탁기형 선임기자 khtak@hani.co.kr
지금 집필중 ② 조효제 성공회대 교수
조효제 성공회대 사회과학부(사회학) 교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인권학 저술가다. 그러나 출판계의 평을 종합하면, ‘인권학자 조효제’는 지금도 새롭게 발견되고 있다. 많은 인권 학술서와 대중서를 써왔지만 갈수록 저서에 대한 기대감이 커진다는 것이다. 그의 다이어리엔 몇해 뒤까지 집필 계획과 세부 마감일정이 적혀있다.

이론가로서 그는 영국에서 본격적인 공부를 시작했다. 런던대 정치외교학 학사, 옥스퍼드대 비교사회학 석사, 런던정경대에서 사회정책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버드대 로스쿨 인권 펠로, 베를린자유대 초빙교수, 코스타리카대 초빙교수를 지냈다. 실천가로서 서울시 인권위원, 국가인권위원회 설립준비기획단 위원, 법무부 정책 위원, 국제앰네스티 자문위원을 역임했다.

뛰어난 번역자이기도 하다. 인권학 분야의 석학 미셸린 이샤이 교수의 저서 <세계인권사상사>(2004)는 영어본이 아니라 그가 번역한 한국어 판본이 사실상 ‘결정판본’이다. 원저자와 오래 논의하며 사실관계 오류와 편집상 실수의 상당 부분을 바로잡았고, 보충 집필까지 요구했다. 이샤이 교수가 “왜 캘리포니아 대학 출판부가 당신처럼 꼼꼼하게 책을 편집해 주지 않았는지 모르겠다”고 했을 정도였다.

지난해 8월 연구년을 맞아 코스타리카 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친 조 교수는 또다시 먼 길을 떠나기 앞서 짐을 싸러 서울에 “잠시 들렀다”고 했다. 때마침 새책 <조효제 교수의 인권 오디세이>도 출간되었다. ‘일베’나 ‘종북’에게도 표현의 자유가 있을까? 살인범의 인권이 피해자의 인권만큼 중요한 것인가? 복잡한 질문에 대한 깊은 고민과 간결한 답변을 종합한 책이다.

“시대가 바뀌어 새롭고 도발적인 인권 문제가 등장하면, 보편적 인간 존엄성에 대한 원론적이고 길고 지루한 철학적·공개적 논쟁으로 돌아가 ‘인간의 가치’를 원점에서 재확인해야 한다.”

그는 올해 인권을 정면으로 다루려 한다. 올 가을 출간 예정인 <인권 달성의 원리>(가제)를 통해 “희망컨대, ‘조효제의 인권 이론’을 만들고 싶다”고 했다. 이 책에서 인권의 근본 요인 분석, 구조적 폭력, 배타적 이념과 도덕성의 뿌리, 증오와 차별의 사회심리학, 국제 권력의 역학, 정치적 폭력과 민주주의의 문제를 폭넓게 검토하려고 한다. 각장마다 사례를 제시하고 거시적인 인권 구조의 문제를 살펴볼 것이다.

인권문제 ‘정면승부’ 예고
시장 가치가 인권 가치 탈취
“인권은 본디 쟁의적인 것”

하지만 겉으로 모든 사람의 자유와 평등이 보장된 것처럼 보이는 이 시대, ‘인권’은 낙후된 관념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는 “시장 가치가 인권의 인본주의적 가치를 ‘하이재킹’(탈취)한 것”이라고 분석했다.

“‘글로벌 스탠더드’라는 말은 원래 인권 분야의 용어였다. 1948년 선포한 세계 인권 선언 전문을 보면, ‘모든 인민과 모든 국가가 다 함께 달성해야 할 하나의 공통된 기준’이란 말이 나온다. 세계무역기구(WTO)가 그뒤 이 말을 도용하면서 인권과 존엄성의 ‘글로벌 스탠더드’가 사라졌다.”

더욱이 2001년 9·11 사태는 인권의 기준선마저 허물어버렸다. 문명 국가라면 모두 공식적으로 지켜왔던 ‘고문받지 않을 권리’가 형해화했다. 미국이나 호주는 법적인 관할권이 미치지 않는 외국에 돈을 주고 수용소를 만들어 ‘테러범’이나 ‘불법이민자’를 가뒀다. 9·11 이후 ‘대테러 전쟁’을 빌미로 미국·러시아·중국은 분리주의 독립을 요구하는 이들을 탄압하고 나섰다. 인권의 최전선이 붕괴되고 있다.

“지난 30~40년 동안 인류는 인권 운동이 수백년 동안 쌓은 기반, 세계 인권 선언 이후 이룩한 가장 기본적인 성취들이 무너지는 것을 목격했다. 이명박 정권 때의 민간인 사찰을 보라. 인권은 결코 튼튼한 기반 위에 지어진 비가역적 현상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계속 싸워야 하는 문제다. 진보를 떠나 물러서지 않으려면 신자유주의나 9·11 사태 같은 구조적이고 뿌리 깊은 근본 문제를 보아야 한다.”

그는 공식적으로 제도화한 인권을 ‘기명의 인권’이라 일컫고 법과 제도로 포착하기 어려운 인권을 ‘익명의 인권’이라는 새로운 개념으로 제시한다. 전자는 빙산의 일각, 후자는 바닷속에 잠긴 거대한 밑부분에 해당한다. 익명의 인권에는 거시적 정치 폭력이나 구조적 억압, 사회심리적 요인 등이 포함된다. 압핀 머리를 눌러야 끝부분이 고정되듯, ‘익명의 인권’이야말로 인권의 확장과 실질적 보장에 결정적 구실을 한다고 그는 설명했다. “훌륭한 시민성은 공공성, 공동선, 사회 정의, 연대의 가치를 자기가 서있는 자리에서 조금이라도 실천하는 정신이다.”

그렇다면 동성애자 인권보장 논란으로 중도 좌절된 ‘서울시민 인권헌장’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가장 큰 원인은 보수적 사람들의 태도다. 신념의 자유이니 동성애를 반대할 수도 있다고 본다. 하지만 공청회장에서 폭력을 보인 것처럼 의견표명을 해서는 안 된다. ‘개신교 반공주의’와 ‘장유유서적 논리’에 근거한 극우주의가 아닐까. 또 ‘헌장’은 시민성의 상징적 표출이다. 성적 정체성이 어떠하든 공적 영역에서 부당한 차별을 말자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매우 자유주의적인 발상이다.” 조 교수는 다수의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자’를 자임하면서 인권 헌장 제정에 침묵한 것을 비판했다. 하지만 그들만의 문제도 아니다.

“‘인권변호사’라는 별칭이 붙는 ‘정치인 박원순’ 시장은 왜 인권 문제를 대면하지 않고 뒤로 숨게 되었나. 정치인에게 그런 선택을 내리도록 강요한 우리의 편협한 현실이 너무 안타깝고 우려스럽다. 인권 담론의 조숙한 퇴조라고나 할까. ‘인권의 퇴조’는 나에게도 지적인 질문이다. 인권 옹호자일수록 고통스러울지라도 이 질문을 해야 한다.”

2018년, 세계 인권 선언 70주년을 기념해 조 교수는 <현대 한국의 인권사상>(가제)을 출간할 계획이다. 1987년 민주화 뒤 한국의 인권담론이 어떻게 전개되었는지 분석하는 내용을 담아 적어도 200자 원고지 3000매까지는 채우겠다는 구상이다.

“인권에 대한 연구자들이 많지 않아 때로는 외롭다”고 그는 말했다. 지금처럼 담론 차원에서 이론을 심화하는 연구가 옳은지, 인류학자들처럼 특정 지역을 두고 경험적인 참여 연구를 해야 하는지 고민하기도 한다. 생각이 복잡할 땐 걷는다. 웬만한 거리는 차를 타지 않는 ‘산책자’로서 땅을 밟고 다니며 그는 인권 문제의 ‘바닥’을 사유한다. 유일한 건강 비법이자 집필 비결이다. “인간이 무엇인가, 인간이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라는 오래된 인간학적 수수께끼 그 자체와 늘 씨름해야 한다. 인권은 본질적으로 쟁의적인 것이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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