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29일 연구실에서 만난 홍성욱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는 “과학자들이 소신껏 연구하고 목소리 낼 수 있는 대안이 마련돼야 한다”고 말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지금 집필중 ⑨ 홍성욱 서울대 교수
학계는 서로 보이지 않는 장벽이 꽤 높다. 다른 영역에 발을 담갔다가 벌집 건드린 듯 살벌하게 공격받기도 한다. 공부라는 게 워낙 힘든 일인데다 학자들 사이 복잡한 관계망, 권력 작용 속에서 수십년간 갈등을 겪으며 눈물겹게 ‘전공’을 구축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홍성욱 서울대 생명과학부(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 교수는 그런 점에서 다소 고단할 법한 작업들을 해온 학자다. 남보다 이른 1990년대 후반부터 대놓고 스스로 ‘잡종(하이브리드)적 지식인’임을 강조했다. 그가 전공한 과학사·과학철학은 문화연구 등과 함께 20세기의 ‘간(間)학문’을 대표하는 분야다. 자연과학과 인문사회과학을 넘나들며 둘 사이를 중재할 수도, 양쪽에서 비난받을 수도 있다.
1990년대 후반부터 벌어진 ‘과학 전쟁’은 학계의 갈등을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이다. 1996년 미국 수리물리학자 앨런 소컬이 프랑스 철학자들을 비롯한 포스트모더니즘 계열 학자들이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과학을 논하는 데 불만을 품고, 보란 듯이 가짜 철학 논문을 써서 평지풍파를 불러일으킨 ‘소컬의 날조’가 시발점이 됐다.
“과학은 사실(팩트)을 다루고 인문학은 가치를 다룬다는 이분법은 많은 인문학자들과 과학자들이 함께 공유해온 관념입니다. 서로 어느 쪽이 더 우위인가만 다르게 생각할 뿐이죠. 그 생각 자체가 사실은 근대 이후 ‘만들어진 것’일 뿐이고, 이제는 과학과 인문학이 합심해야 한다고 봅니다.”
과학-인문학 경계 넘나들며
‘사건’ 터질 때마다 논쟁 참여
“권력에서 독립한 과학 필요” 그가 관심을 두고 연구해온 과학기술학(STS: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은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 분야다. 과학기술인류학, 젠더 연구, 과학사와 과학철학, 위험연구, 과학기술과 법 등을 포괄한다. “많은 과학자들이 과학이 진리를 발견하는 행위이며 ‘사실’은 객관적이며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과학기술학의 견해는 진리, 객관, 보편, 사실을 사람이 만들었고 역사에 따라 변해왔다고 보는 ‘사회구성주의’의 맥락을 따른다”고 그는 설명했다. 홍 교수가 요즘 준비중인 책 <과학과 사회>(가제)도 그런 과학기술학에 대해 지금까지 연구해온 바를 총체적으로 담아보려 한다. 그 관점의 첫발을 뗀 사람이 <과학 혁명의 구조>(1962)를 쓴 토머스 쿤이다. 쿤은 기존의 ‘과학관’ 자체에 총체적 이의를 제기했다. 뉴턴의 이론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사이에 ‘공약 불가능성’이 있듯이, 그때까지 잘 돌아가던 과학 이론이 ‘변칙’을 만나면 사회 혁명과 비슷한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과학은 불변하는 진리를 찾아내고 규명하는 것이라기보다 불확실성을 포함하는 개념이어야 한다는 전복적인 주장이다. 수많은 논쟁이 뒤따랐고,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과학 모독”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쿤의 주장은 ‘과학은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는 사회구성주의가 발생한 지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절대적 지식, 확실한 토대가 없어도 세상은 작동한다는 것이 그들의 태도죠. 사회구성주의의 본격적인 출발이 1970년대 후반, 에든버러학파가 제기한 ‘스트롱 프로그램’이었습니다. 1980년대에는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으로 발전하죠.” 전통적인 과학기술운동을 했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사회적 불평등, 부의 집중, 권력 편재 같은 문제에 몰두한 반면, 사회구성주의자들은 이에 관심을 덜 가졌다.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은 그런 단점을 보완해 인간뿐 아니라 생물, 무생물 같은 ‘비인간’ 행위자들 모두가 대칭적으로 연결됐다고 주장한다. 권력의 신화를 해체하는 방법론적 기초가 된다고 평가받는 이론이다. 지금 집필중인 책의 2부에서는 이와 함께 과학기술 논쟁에서 합의가 어려운 이유와 최근 10여년 동안 한국에서 벌어졌던 각종 과학 논란을 다룰 예정이다. 사실 그는 캐나다 토론토대학에 있었던 1990년대 후반 ‘피시 통신’ 시절부터 ‘코메니우스’라는 대화명으로 온라인에서 유명한 논객이었다. 2003년 귀국 뒤엔 잇달아 벌어진 황우석 사건, 광우병 논란, 4대강 대운하의 논쟁 한복판에 ‘과학’이 있었고, 그도 뛰어들었다. 2005년 12월, 황우석 박사의 <사이언스> 논문이 조작된 것으로 드러나기 전에 비판론자들의 편에 서서 지인들의 우려를 샀다. 2008년 5월 광우병 논란 당시에도 “과학에 대해서 조금 아는 사람들은(…) 시민과 대화하려 하기보다는 시민을 가르치려고 한다”고 일갈했다. 그는 과학기술자들은 과학기술 지식에 불확실한 점이 있다고 인정해야 하고, 행정관료와 정치인은 권력을 시민과 더 공유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천안함 문제 역시 그런 점에서 큰 관심사다. “천안함 침몰 원인에 대해 민·군 합동조사단(합조단)과 정부가 확실히 어뢰에 의한 것이라고 했는데도 왜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할까, 세월호 침몰 원인도 마찬가지고…. 광우병 위험, 유전자변형농산물(GMO)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왜 여전히 꺼림칙해할까…. 이런 큰 과학 논쟁을 사회적인 비용을 덜 치르면서 할 수 있는 길은 평소에도 생각을 나누고 면역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가 대중을 위한 과학기술학 저서 집필이나 강연, 칼럼 집필, 소셜네트워크서비스 활용을 마다 않는 것도 과학기술학자로서 더 많은 사람이 과학적 문제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면역력’을 기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와 함께 그는 “한국 과학을 정부, 권력으로부터 떼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양한 방법으로 연구비 지원은 유지시키되 정부나 권력의 영향력에서 독립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천안함이나 4대강 사업 문제에 상당히 많은 전문가들이 침묵했죠. 논쟁에 익숙하지 않은 문화 때문이기도 하지만 과학자들이 연구비 지원에 개의치 말고 자기 신념에 따라 목소리를 내도 불이익 받지 않을 환경이 조성되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것이 안 되다 보니 ‘지금 이 순간’ 옳다고 생각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도 개인적으로 상당히 용기를 가져야 하는 일이 돼버린 겁니다.” 그는 지식의 불확실성 탓에 모든 논쟁은 불분명한 점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았다. 절대불변의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면, 공론장에서 지식이 서로 맞부딪치고 겨뤄 상호작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나중에 어떻게 되더라도 내가 학자로서 특정한 문제를 들여다봤고, 그 결과 어떤 생각을 갖게 됐다면 밝혀야죠. 지식과 지식이 서로 부닥치고 그러면서 뭔가 더 나은 역동이 형성되지 않을까요? 앞으로는 좀더 달라질 것이라고 봅니다.”<끝>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사건’ 터질 때마다 논쟁 참여
“권력에서 독립한 과학 필요” 그가 관심을 두고 연구해온 과학기술학(STS: science and technology studies)은 과학기술과 사회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 분야다. 과학기술인류학, 젠더 연구, 과학사와 과학철학, 위험연구, 과학기술과 법 등을 포괄한다. “많은 과학자들이 과학이 진리를 발견하는 행위이며 ‘사실’은 객관적이며 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과학기술학의 견해는 진리, 객관, 보편, 사실을 사람이 만들었고 역사에 따라 변해왔다고 보는 ‘사회구성주의’의 맥락을 따른다”고 그는 설명했다. 홍 교수가 요즘 준비중인 책 <과학과 사회>(가제)도 그런 과학기술학에 대해 지금까지 연구해온 바를 총체적으로 담아보려 한다. 그 관점의 첫발을 뗀 사람이 <과학 혁명의 구조>(1962)를 쓴 토머스 쿤이다. 쿤은 기존의 ‘과학관’ 자체에 총체적 이의를 제기했다. 뉴턴의 이론과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사이에 ‘공약 불가능성’이 있듯이, 그때까지 잘 돌아가던 과학 이론이 ‘변칙’을 만나면 사회 혁명과 비슷한 거대한 패러다임의 전환을 겪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과학은 불변하는 진리를 찾아내고 규명하는 것이라기보다 불확실성을 포함하는 개념이어야 한다는 전복적인 주장이다. 수많은 논쟁이 뒤따랐고, 과학철학자 칼 포퍼는 “과학 모독”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쿤의 주장은 ‘과학은 사회적으로 구성되었다’는 사회구성주의가 발생한 지적 토대가 되었습니다. 절대적 지식, 확실한 토대가 없어도 세상은 작동한다는 것이 그들의 태도죠. 사회구성주의의 본격적인 출발이 1970년대 후반, 에든버러학파가 제기한 ‘스트롱 프로그램’이었습니다. 1980년대에는 브뤼노 라투르의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으로 발전하죠.” 전통적인 과학기술운동을 했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사회적 불평등, 부의 집중, 권력 편재 같은 문제에 몰두한 반면, 사회구성주의자들은 이에 관심을 덜 가졌다. ‘행위자 네트워크 이론’은 그런 단점을 보완해 인간뿐 아니라 생물, 무생물 같은 ‘비인간’ 행위자들 모두가 대칭적으로 연결됐다고 주장한다. 권력의 신화를 해체하는 방법론적 기초가 된다고 평가받는 이론이다. 지금 집필중인 책의 2부에서는 이와 함께 과학기술 논쟁에서 합의가 어려운 이유와 최근 10여년 동안 한국에서 벌어졌던 각종 과학 논란을 다룰 예정이다. 사실 그는 캐나다 토론토대학에 있었던 1990년대 후반 ‘피시 통신’ 시절부터 ‘코메니우스’라는 대화명으로 온라인에서 유명한 논객이었다. 2003년 귀국 뒤엔 잇달아 벌어진 황우석 사건, 광우병 논란, 4대강 대운하의 논쟁 한복판에 ‘과학’이 있었고, 그도 뛰어들었다. 2005년 12월, 황우석 박사의 <사이언스> 논문이 조작된 것으로 드러나기 전에 비판론자들의 편에 서서 지인들의 우려를 샀다. 2008년 5월 광우병 논란 당시에도 “과학에 대해서 조금 아는 사람들은(…) 시민과 대화하려 하기보다는 시민을 가르치려고 한다”고 일갈했다. 그는 과학기술자들은 과학기술 지식에 불확실한 점이 있다고 인정해야 하고, 행정관료와 정치인은 권력을 시민과 더 공유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천안함 문제 역시 그런 점에서 큰 관심사다. “천안함 침몰 원인에 대해 민·군 합동조사단(합조단)과 정부가 확실히 어뢰에 의한 것이라고 했는데도 왜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못할까, 세월호 침몰 원인도 마찬가지고…. 광우병 위험, 유전자변형농산물(GMO)에 대해서도 사람들은 왜 여전히 꺼림칙해할까…. 이런 큰 과학 논쟁을 사회적인 비용을 덜 치르면서 할 수 있는 길은 평소에도 생각을 나누고 면역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그가 대중을 위한 과학기술학 저서 집필이나 강연, 칼럼 집필, 소셜네트워크서비스 활용을 마다 않는 것도 과학기술학자로서 더 많은 사람이 과학적 문제에 대한 이해를 높이고 ‘면역력’을 기르도록 하기 위한 것이다. 이와 함께 그는 “한국 과학을 정부, 권력으로부터 떼어내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다양한 방법으로 연구비 지원은 유지시키되 정부나 권력의 영향력에서 독립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천안함이나 4대강 사업 문제에 상당히 많은 전문가들이 침묵했죠. 논쟁에 익숙하지 않은 문화 때문이기도 하지만 과학자들이 연구비 지원에 개의치 말고 자기 신념에 따라 목소리를 내도 불이익 받지 않을 환경이 조성되지 않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것이 안 되다 보니 ‘지금 이 순간’ 옳다고 생각하는 목소리를 내는 것도 개인적으로 상당히 용기를 가져야 하는 일이 돼버린 겁니다.” 그는 지식의 불확실성 탓에 모든 논쟁은 불분명한 점을 내포하고 있다고 보았다. 절대불변의 진리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면, 공론장에서 지식이 서로 맞부딪치고 겨뤄 상호작용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뜻이다. “나중에 어떻게 되더라도 내가 학자로서 특정한 문제를 들여다봤고, 그 결과 어떤 생각을 갖게 됐다면 밝혀야죠. 지식과 지식이 서로 부닥치고 그러면서 뭔가 더 나은 역동이 형성되지 않을까요? 앞으로는 좀더 달라질 것이라고 봅니다.”<끝>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홍성욱 교수는 물리학도 출신 글쟁이
1980년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해 같은 대학 과학사 및 과학철학 협동과정에서 석·박사 학위를 받았다. 1991년 캐나다 토론토대학에서 박사후과정을 거쳐 1995년 같은 대학 과학기술사철학 조교수로 임용되었다. 당시 국내 대학 졸업장으로 케임브리지대와 하버드대 출신들을 제치고 교수가 되었다며 화제가 되기도 했다. 1992년 미국과학사학회에서 수여하는 권위있는 논문상인 ‘슈만상’을 동양인 처음으로 받았고, 매사추세츠공과대학(MIT) 디브너연구소 연구원을 역임했다. 2000년엔 토론토대학 테뉴어를 받아 다들 부러워하는 종신교수가 되었지만 3년 뒤 모교로 돌아와 2003년부터 서울대 생명과학부 교수로 재직해왔다.
한국으로 돌아온 이유에 대해서는 “부채감이 있었다”고 했다. 대학에 입학한 해에 광주에서 5·18 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휴교령이 내려졌고, 반년 만에 복학한 뒤 데모가 벌어졌을 때 사복경찰들이 학생들을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학교인지 경찰서인지 이해가 안 될 정도였다”며 “도서관에 앉아 있는데 사회에 빚을 진 것 같은 기분을 느꼈고 교수님들은 공부를 하라고 했지만 혼란 속에 헤매며 대학을 다녔다”고 했다. 대학 졸업할 때쯤 마음 맞는 이공계 친구들과 함께 1987년 ‘청년과학기술자협의회’라는 단체를 만들었다. 과학기술노동의 사회적 역할을 중시하고 과학기술의 발전과 사회의 진보를 함께 이루려는 목적이었다. 1년 정도 창간 매체의 신문기자로 일했으며 대중음악·영화 평론에도 일가견이 있다.
무엇보다 활발한 저술가이자 번역가다. 공저·공역한 책을 포함해 그의 이름을 단 책이 50종이 넘는다. 대표 저서로 <잡종, 새로운 문화읽기>(1998) <생산력과 문화로서의 과학기술>(1999) <파놉티콘-정보사회 정보감옥>(2002) <네트워크 혁명, 그 열림과 닫힘>(2002) <하이브리드 세상읽기>(2003) <과학은 얼마나>(2004) <인간의 얼굴을 한 과학>(2008) <홍성욱의 과학에세이: 과학, 인간과 사회를 말하다>(2008) 등이 있다. 옮긴 책은 <인간·사물·동맹>(브뤼노 라투르 외 지음, 2010) <과학혁명의 구조>(제4판, 토머스 쿤 지음, 공역, 2013), <중세의 과학>(에드워드 그랜트 지음, 공역, 2014) 등이다.
이유진 기자
연재지금 집필중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