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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지금, 여기, 다시 페미니즘을 말하다

등록 2015-03-26 19:29수정 2015-05-28 14:29

임옥희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가 한겨레신문사 옥상생태정원 앞에 앉았다. 잿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자 “한때 푸른색으로 염색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냥 두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임옥희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가 한겨레신문사 옥상생태정원 앞에 앉았다. 잿빛 머리카락이 바람에 날리자 “한때 푸른색으로 염색하기도 했지만, 이제는 그냥 두기로 했다”고 말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지금 집필중 ④ 임옥희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
임옥희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 교수는 영문학자인 동시에 저술가, 국내 최고의 페미니스트 번역가다. 18년 전 페미니스트들의 공부방이자 이론의 산실인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를 동료들과 함께 만들었고 지금은 이사장직을 맡고 있다.

그가 최근 공역자로 참여한 <일탈: 게일 루빈 선집>(현실문화)이 곧 출간될 예정이다. 미국의 대표적 퀴어 이론가인 게일 루빈 미시간대 인류학과 교수가 쓴 유일한 단독 저서로서 40년 연구의 결정판인데다, 무엇보다 ‘믿고 보는 번역가’의 손을 거친 것이어서 페미니스트 독자들의 기대감이 높다.

“게일 루빈은 대단한 운동성을 지닌 사람입니다. 1970년대에 그는 ‘에스엠’(사도마조히즘)이라고 커밍아웃 했죠. 당시엔 레즈비언이라고만 해도 ‘성적 도착’으로 간주될 정도였으니, 낙인과 박해는 굉장했습니다. 페미니즘 그룹 안에서조차 큰 논란이었어요.”

게일 루빈은 미국의 첫 공식 레즈비언 사도마조히즘 그룹(Samois, 1978~83) 창립 멤버로, 섹슈얼리티(성적이라 느끼는 감정, 욕망, 정체성, 행위 등을 포괄하는 개념) 문제를 이론과 실천에서 가장 강력히 밀고 나간 급진적 페미니스트다. 이번 루빈의 책은 사회적으로 인정받는 특정한 성적 행동을 뺀 많은 행동이 ‘일탈’ ‘범죄’로 낙인찍히게 된 역사적 과정을 추적하고, 레즈비언의 역사, 1970~80년대 ‘성 전쟁’, 사도마조히즘의 정치학, 성매매, 포르노그래피처럼 논쟁적인 주제를 통해 근대의 성적 지식의 역사를 총체적으로 설명한다.

임 교수는 이를 포함해 올해 세권의 책을 내놓을 계획이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 낸시 프레이저의 책도 번역을 마쳐 올해 상반기 안에 나올 예정이고, 3년 만에 선보이는 단독 저서 <다시 인간이다>(가제, 여이연) 또한 준비중이다. 이 책으로 그는 페미니즘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 직면하려고 했다. “공식적, 제도적으로 페미니즘의 죽음이 이미 선언된 느낌”이라는 것이다.

“법·제도가 완료되었다며 페미니즘 무용론까지 나오고 있습니다. 이슬람국가(IS)로 간 ‘김군’이 ‘페미니스트가 싫다’고 하자 ‘페미니스트’라는 단어가 인터넷 검색어 1위에 오르기도 했죠. 게일 루빈은 1950년대 미국 매카시즘이 1970년대 호모포비아로 나타났다고 말한 적이 있어요. 한국도 옛날에 사람들이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했다면 이제는 ‘페미니스트가 싫어요’라고 말합니다. 페미니스트들은 우리 시대가 가장 싫어하는 집단이 돼버렸어요.”

임 교수는 “그럼에도 모든 죽음은 새로운 출발을 뜻한다”고 말했다. 중산층 중심의 페미니즘이 잘못되었고, 약자들과 연대하는 것이 부족했으며, 경제적 문제를 등한시했다면 이를 반성하고 재출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낸시 프레이저의 2013년 저작인 <페미니즘의 부침>(가제, 돌베개)을 번역하기로 결심한 이유도 그래서다. 프레이저가 제기한 분배의 문제를 다시 들여다보자는 것이다. 이 책은 신자유주의와 페미니즘의 관계, 신자유주의에 의제를 빼앗긴 좌파의 한계에 대해 뼈아프게 지적한다.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여성들의 가사노동 대가가 남성부양자 임금 속에 포함된다며 가족임금제의 모순을 비판했잖아요? 그러자 신자유주의는 ‘그래? 가족수당 없애고 여자도 일 시켜줄게’라며 낮은 임금으로 여성들을 대거 고용했습니다. 그 결과 임금 전반의 하향평준화가 이뤄졌죠. 시혜적 복지의 국가 가부장성을 페미니스트들이 비판하니 국가가 아예 복지를 관둬버리기도 했고요.”

게일 루빈·낸시 프레이저 책 번역
급진성·분배문제 ‘재소환’
“페미니즘은 현재진행형”

임 교수는 2006년 퀴어 이론 분야의 창시자로 이성애 토대주의를 해체하려 한 1990년대 ‘학계의 슈퍼스타’ 주디스 버틀러의 사상을 검토하며 <주디스 버틀러 읽기>를 펴냈고, 2012년에는 탈식민 페미니스트 가야트리 스피박에 대해 쓴 <타자로서의 서구>를 출간하기도 했다.

“1980년대 ‘서울의 봄’을 살고 있던 때 스피박의 글을 만났습니다. 특히 1982년 그가 한국에서조차 잘 알려지지 않았던 미국의 다국적기업인 콘트롤데이타 한국지사 여성노동자들의 파업을 분석한 글을 보고 무척 놀랐고 참담했죠. 3세계 한국 여성노동자들을 착취하는 데 1세계 백인 부르주아 페미니스트들이 다국적기업과 어떻게 공모했는지 분석한 것이거든요. 아시아 하층 노동자 여성과 백인 중산층 여성은 이해관계가 달랐기에 무조건 ‘자매애’로 묶일 수 없었어요.”

그는 페미니즘이 단순한 ‘자매애’를 넘어서서 더욱 강력한 ‘주변인들의 언어’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미혼모, 소수자들, 비정규직 같은 경계인들은 기존의 공고한 권력관계에서 배제된 ‘비정상’의 존재인 동시에 권력을 교란할 수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벌거벗은 생명’으로 환원될 수도 있지만 스스로 언어를 획득했을 때 ‘하위 주체’로서 ‘말’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경계인들이 자기 삶을 정당화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지고 정체화(identify)하는 것이 이론화·정치화의 방식”이라고 그는 말했다. 그가 낯설고 예민한 페미니즘 이론을 대중에 소개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제 페미니즘은 편견과 낙인에 맞서는 것과 동시에 자기 쇄신을 요구받고 있다. ‘사적인 것이 정치적인 것이다’라는 페미니스트의 모토는 옳았을지 모르지만 개인의 사사로운 ‘얼굴’마저 모조리 정치적으로 올바른 것이 돼야 한다는 부메랑도 함께 맞았다.

“다른 이론과 달리 페미니스트는 이론과 삶을 일치시키지 않으면 자기모순에 빠지게 되고 더 비난받게 됩니다. 페미니즘은 윤리보다 정치적인 것으로 변모해야 해요. ‘페밍아웃’이라고 해서, 페미니스트인 것을 강제 커밍아웃 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있다고 해요. 정형화된 이미지도 있고요.”

그렇다면 출구 없어 보이는 페미니즘은 어떻게,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는 칠판에 ‘어디에도 … 없다’는 ‘nowhere’라는 단어를 ‘지금/여기’(now/here)로 끊어 써주었다. “유토피아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시작해야 가능합니다. 페미니즘이라는 건 한번 얘기하고 끝나는 과거완료가 아니라 현재진행형이라고 생각해요. 죽어야 사는 거죠. ‘나는 페미니스트다’라고 선언하는 ‘해시태그 페미니즘’을 보면 더욱 그런 생각이 듭니다. 끊임없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게 아닌가.”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임옥희 교수는 말을 먹고 사는 사람

1956년생. 경희대학교 영어영문학과와 대학원을 졸업했고 1997년 고정갑희 한신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태혜숙 대구가톨릭대 영어영문학과 교수 등과 함께 여성문화이론연구소(여이연)를 열어 여성문화이론지 <여/성이론>을 발간해왔고 각종 여성이론관련 서적을 번역·집필했다. 경희대 후마니타스 칼리지에서 학생들에게 인문학을 가르치고 있다.

저서로 <타자로서의 서구: 가야트리 스피박의 ‘포스트식민 이성 비판’ 읽기와 쓰기>(2012, 현암사) <채식주의자 뱀파이어: 폭력의 시대, 타자와 공존하기>(2010, 여이연) <주디스 버틀러 읽기: 젠더의 조롱과 우울의 철학>(2006, 여이연) <다락방에서 타자를 만나다>(2005, 여이연, 공저)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무성애를 말하다>(앤서니 보개트, 2013, 레디셋고) <보이는 어둠: 우울증에 대한 회고>(윌리엄 스타이런 지음, 2011, 문학동네) <인 아메리카>(수전 손탁, 2008, 이후) <사육과 육식>(리처드 W.불리엣, 2008, 알마) <치유의 글쓰기: 몸과 마음을 치유하고 자기를 발견하는 글쓰기의 힘>(셰퍼드 코미나스, 2008, 홍익출판사) <너무 많이 알았던 히치콕: 영화 여성 가부장제적 무의식>(타니아 모들스키, 2007, 여이연) <티핑 포인트>(말콤 글래드웰, 2004, 21세기북스) <여성과 광기>(필리스 체슬러, 2002, 여성신문사) 등이 있다.

임 교수는 20대 시절 산행중 만난 한 스님한테서 “말을 먹고 말에 먹히고 살 팔자”라는 얘기를 들었다. 살면서 영향을 많이 받은 페미니스트가 누군지 묻자 “존 쿳시의 소설 <엘리자베스 코스텔로>에 나오는 채식주의자 페미니스트 엘리자베스 코스텔로”라고 했다. 주인공 코스텔로는 유명작가이자 철학자다. 뚱뚱하고 늙어빠진 그는 죽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하면서도 동물과 인간의 차이, 시체와 고기의 차이에 대해 끊임없이 밀어 붙이는 질문 공세로 사람들을 불편하게 한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임 교수는 웃으며 대답했다. “시름시름 사는 것이다. 게으르게, 숨만 쉬고.” 별안간 봄바람이 인터뷰실 창문 틈새로 선들 파고들었다. 아직 할 말과 할 일이 남았다는 듯.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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