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동춘 성공회대 교수는 이제 15년 ‘외도’를 마감하고 본업인 사회과학 연구로 되돌아가겠다고 밝혔다. <전쟁과 사회>(2000) 출간을 전후해서 한국전쟁 등 현대사 쪽 연구에 발을 들여놓은 뒤 “그동안 너무 그쪽에 발목을 잡혔다”며 앞으로는 “한국 파워엘리트, 지배계급의 본질을 규명하는 범사회학적인 접근을 해 보겠다”고 했다. <한겨레> 자료사진
지금 집필중 ⑤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
“대한민국이란 나라의 오늘을 해방 70년 시점에서 다시 한번 되돌아보는 책이다. 그렇지만 역사책은 아니다. 지금의 한국을 어떻게 볼 것이냐, 이런 걸 학생들도 읽을 수 있는 대중적인 내용으로 쓰려고 한다.”
김동춘(56) 성공회대 사회과학부 교수는 이 책 제목을 “<해방 70년, 대한민국은 어떤 나라인가>(가제)로 일단 정했다”고 했다.
올해 8·15 전에 출간할 예정인 이 책은 김 교수가 처음부터 단행본용으로 기획하고 쓴 대중서로는 첫 책이다.
“우리 사회의 실질문명률이 매우 높다는 얘기가 있다. 대학 진학율 세계 최고 수준의 학력을 자랑하지만 실질적으로 우리 사회를 이해하고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은 현저히 떨어진다는 얘기다. 그게 결국 입시준비 위주의 교육 탓이지만, 사람들에게 우리 사회 문제를 생각해 보게 하는 방책 중의 하나가 좋은 책을 써서 읽게 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했다.”
광복 70년, 사실상 분단 70년에 한일협정 체결 50년이 되는 올해를 처음부터 염두에 두고 쓴 것은 아니란다. “오래 전부터 생각해 오던 것인데, 때마침 시기가 그렇게 맞아떨어진 셈이다.”
이 책도 예외가 아니지만, 한국 학술연구분야 제3세대의 선두주자로 평가받아온 김동춘 교수의 영원한 화두는 폭력적이고 외세의존적인 한국 지배체제·계급의 정체성 규명과 더 나은 세상을 향한 변혁 주체 형성의 실천적 모색이다. “이번 책은 이제까지 해온 논문들이나 학술적인 글, 책들의 내용을 집대성한 측면이 있다. 거기에 연구자들이 거의 쓰지 않았던 1945년 이전의 일들, 구한말과 식민지 시대 얘기를 앞에 새로 좀 붙였다.”
대한민국은 월남자들이 만든 나라
자생적 근대와 인간해방의 좌절
이식된 서구적 근대의 지배
그 결과로서의 ‘반쪽짜리 국가’
“사회과학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노동분야 연구에서 시작된 그의 관심사가 한국전쟁으로 확장되고 다시 근대 쪽으로 재확장한 셈이다. “해방 70년에 무게 중심이 놓여 있지만, 오늘의 한국을 설명하려면 근대화 과정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크게 보면 1890년대 독립과 개화라는 큰 두 화두가 결합에 실패하고 두 세력이 갈라진 뒤 식민지가 되면서 개화 주도세력, 결국 친일파들이 주도한 근대의 길을 걷게 됐다. 1945년 해방 뒤 다시 이 를 결합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또 다시 실패했다. 독립을 포기한 대가로 개화 추구 (친미)세력이 다시 권력을 잡았다. 결국 분단인데, 이번엔 일본이 아니라 미국의 정치 군사적 종속하에 놓이게 됐다. 또 한 가지는 황해도 신천 학살을 가지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것이다. 기독교와 공산주의, 황석영 작가가 얘기한 두 손님의 대립이 학살로 이어졌다. 이는 그 전 일제시대 독립운동 방향을 둘러싼 기독교 세력과 사회주의 계열의 갈등이 신천학살로 폭발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 폭발 뒤 기독교 반공세력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어떤 면에선 대한민국은 이북 월남자들이 만든 나라다. 그리고 밑으로부터의 자생적 근대와 인간해방의 좌절, 이식된 서구적 근대의 지배. 그 결과인 이 ‘반쪽짜리 국가’를 이들 세 가지 관점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의 첫 책은 <한국사회 노동자 연구>(1995)다. 노동자의 조직적 역량 형성문제를 주제로 삼은 1993년 박사학위 논문 ‘한국 노동자의 사회적 고찰- 1987년 이후 중공업 노동자의 노동조합활동을 중심으로’를 수정 보완한 것이다. 20대에 유신과 서울의 봄, 광주항쟁, 5공, 1987 유월항쟁을 겪은 그의 당시 문제의식은 “왜 한국의 노동자는 시민도 계급도 아닌가. 왜 한국은 다른 나라들과 그렇게 다른가?”였다. 그 연장선상에서 한국전쟁도 파고들게 됐고, 현대사 연구 ‘외도’가 시작됐다. 특히 박사논문을 준비하면서 “현대 한국사회의 지배질서와 시민사회, 노동운동 등을 이해하기 위해 부심하던 중 한국전쟁을 다시 정리하지 않고서는 오늘의 한국 자본주의 정치·경제·사회 질서를 제대로 정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굳혔다. 당시 그는 노사분규 현장의 구사대 폭력과 ‘빨갱이’ 시비 등을 보면서 ‘전쟁’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곧 한국전쟁의 재연이요, 그 자신의 한국전쟁 재발견이었다. “그 동안 사회과학자로서 서구의 이론들만 주로 공부하다 보니 필자 자신이 바로 한국전쟁의 지긋지긋한 기억이 일상을 옥죄는 상황에서 살았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한 것이다.” 이러한 반성들은 “군사적인 조건과 결부시키지 않고 이해해 온 정치적 지배질서와 사회적 갈등, 사회통제 등을 전쟁의 연장, 전쟁의 지속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으로 그를 이끌었다.” 하지만 그의 한국전쟁 연구는 장벽에 부딪혔다. “한국전쟁에 관한 사실(fact) 자체가 충분히 조사·정리돼 있지 않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 구멍을 메우려 애쓴 결과가 <전쟁과 사회>이고, <미국의 엔진, 전쟁과 사상>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등은 그 연장이다.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상임위원 등을 맡으며 ‘외도’는 길어졌다. 연구자, 사회운동가, 정부 관리 세 가지 역할을 수행하면서 “기억의 창고를 여는 산파 역할을 했다는 자부”도 갖게 됐지만 그는 이젠 “좀더 사회과학적인 연구”로 되돌아가겠다고 했다. “그 동안 현대사 쪽에 너무 발목을 잡혔다. 지금의 한국사회쪽에 좀 더 초점을 맞추려 한다. 가능할진 모르겠으나 한국 파워엘리트, 지배계급의 본질 규명을 위해 법사회학적인 접근을 해보려 한다.” 김 교수는 마르크스든 자본주의든 민주주의 정치론이든 식민지와 분단 체험국으로서의 특성을 천착하지 않고는 한국사회를 분석해낼 수 없다고 얘기한다. “박근혜 정부, 이명박 정부 등장 이후의 우리사회 현상들을 서구 민주주의 정당론 등으로는 해명할 수 없다.” 그가 준비하고 있는 또 하나의 책은 <반공국가>다. 문제의식은 기본적으로 지금 쓰고 있는 책과 다를 바 없지만 “다만 좀 더 학술적인 책”이라고 했다. 원래 <전쟁과 사회> 제2권을 쓸 생각이었는데 ‘외도’로 쓰질 못했다. <반공국가>가 바로 그 제2권인 셈이다. 2년 뒤쯤 내놓을 생각이다. 지난달 출간한 독일·한국 학자들과의 공저 <반공의 시대>도 새 작업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한국의 반공체제는 세계적 냉전체제에 철저히 부응한 냉전의 내재화, 한국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내용과 학살문제, 그리고 이를 자행한 특별수사기관들, 예컨대 일제시대 특고, 이승만 시대의 특무대, 박정희 시대의 중앙정보부. 국가 위의 국가요 법위의 국가로서의 이들 존재를 부각시키려 한다. 이를 민주주의 정치이론으로 설명하기보다는 국가형성론적 관점에서 좀더 심층적으로 접근해보고 싶다.” 김 교수는 “서구 사회과학의 일방적 수입국”인 우리 현실이 늘 답답하고 아쉬웠다며, “대등한, 나아가 사회과학 수출국이 될 수 있기를” 소망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경험을 어떻게 보편화하느냐에 달렸다. 한국의 경험을 통해 세계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 일반이론을 만드는 것이다.” 그는 학문의 우리화·보편화가 인문학 쪽은 어느 정도 돼 있지만, 사회과학쪽은 “전혀 아니다”고 했다. “예컨대 재벌이란 말은 그대로 사회과학 용어로 통용된다. 콜드 워(Cold War)를 냉전으로 번역해서 쓰지만 정확하게 그 의미가 전달되진 않는다. 이건 용어(언어)만의 문제가 아니다. ‘개념을 장악하는 사람이 세상을 장악한다’고 권헌익 영국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칼리지 석좌교수도 얘기했지만, 이데올로기나 서구 편향이나 경사를 바로잡는 건 나라를 바꾸는 것만큼이나 중요하고 어렵다. 그게 교육, 학문, 생활 등 모든 것과 다 연결돼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학자들이야말로 그 인프라(기반시설)를 만드는 이들”이라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이 나라엔 아직까지도 이 나라 사람들이 만든 사회과학사전 하나 없다. 해방직후에는 나름의 그런 것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란다. 우리가 만든 경제학사전, 제대로 된 사회과학 교과서도 없단다. 그런 시도들은 1980년대 말 90년대 초에 오히려 활발했는데 지금은 다 죽었다며 “그때보다 후퇴했다. 더 미국화됐다는 얘기”라고 했다. “이걸 어떻게 더 새로운 학문적 커뮤니티를 만들어내 돌파할 수 있을지, 개인적으로 그 씨앗을 뿌릴 수 있을지. 내가 못하면 후배, 제자들이라도 키워야 한다. 그래야 다음 세대에서라도 할 수 있지 않겠나.” 김 교수는 “우리 역사를 통해 자기것을 제대로 만들어낸 사람은 원효가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거기에 다산과 퇴계 정도를 보탤 수 있을까.”라며 “이 자기화라는 측면에서 일본과 비교하면 우리는 상대가 안 된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런 문제의식조차 없다는 게 더 문제”라고 덧붙였다.
한승동 선임기자 sdhan@hani.co.kr
자생적 근대와 인간해방의 좌절
이식된 서구적 근대의 지배
그 결과로서의 ‘반쪽짜리 국가’
“사회과학 수입국에서 수출국으로” 노동분야 연구에서 시작된 그의 관심사가 한국전쟁으로 확장되고 다시 근대 쪽으로 재확장한 셈이다. “해방 70년에 무게 중심이 놓여 있지만, 오늘의 한국을 설명하려면 근대화 과정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크게 보면 1890년대 독립과 개화라는 큰 두 화두가 결합에 실패하고 두 세력이 갈라진 뒤 식민지가 되면서 개화 주도세력, 결국 친일파들이 주도한 근대의 길을 걷게 됐다. 1945년 해방 뒤 다시 이 를 결합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 또 다시 실패했다. 독립을 포기한 대가로 개화 추구 (친미)세력이 다시 권력을 잡았다. 결국 분단인데, 이번엔 일본이 아니라 미국의 정치 군사적 종속하에 놓이게 됐다. 또 한 가지는 황해도 신천 학살을 가지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바라보는 것이다. 기독교와 공산주의, 황석영 작가가 얘기한 두 손님의 대립이 학살로 이어졌다. 이는 그 전 일제시대 독립운동 방향을 둘러싼 기독교 세력과 사회주의 계열의 갈등이 신천학살로 폭발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 폭발 뒤 기독교 반공세력이 남쪽으로 내려왔다. 어떤 면에선 대한민국은 이북 월남자들이 만든 나라다. 그리고 밑으로부터의 자생적 근대와 인간해방의 좌절, 이식된 서구적 근대의 지배. 그 결과인 이 ‘반쪽짜리 국가’를 이들 세 가지 관점으로 설명할 수 있다.” 그의 첫 책은 <한국사회 노동자 연구>(1995)다. 노동자의 조직적 역량 형성문제를 주제로 삼은 1993년 박사학위 논문 ‘한국 노동자의 사회적 고찰- 1987년 이후 중공업 노동자의 노동조합활동을 중심으로’를 수정 보완한 것이다. 20대에 유신과 서울의 봄, 광주항쟁, 5공, 1987 유월항쟁을 겪은 그의 당시 문제의식은 “왜 한국의 노동자는 시민도 계급도 아닌가. 왜 한국은 다른 나라들과 그렇게 다른가?”였다. 그 연장선상에서 한국전쟁도 파고들게 됐고, 현대사 연구 ‘외도’가 시작됐다. 특히 박사논문을 준비하면서 “현대 한국사회의 지배질서와 시민사회, 노동운동 등을 이해하기 위해 부심하던 중 한국전쟁을 다시 정리하지 않고서는 오늘의 한국 자본주의 정치·경제·사회 질서를 제대로 정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을 굳혔다. 당시 그는 노사분규 현장의 구사대 폭력과 ‘빨갱이’ 시비 등을 보면서 ‘전쟁’과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것은 곧 한국전쟁의 재연이요, 그 자신의 한국전쟁 재발견이었다. “그 동안 사회과학자로서 서구의 이론들만 주로 공부하다 보니 필자 자신이 바로 한국전쟁의 지긋지긋한 기억이 일상을 옥죄는 상황에서 살았다는 사실 자체를 망각한 것이다.” 이러한 반성들은 “군사적인 조건과 결부시키지 않고 이해해 온 정치적 지배질서와 사회적 갈등, 사회통제 등을 전쟁의 연장, 전쟁의 지속으로 이해할 수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으로 그를 이끌었다.” 하지만 그의 한국전쟁 연구는 장벽에 부딪혔다. “한국전쟁에 관한 사실(fact) 자체가 충분히 조사·정리돼 있지 않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 구멍을 메우려 애쓴 결과가 <전쟁과 사회>이고, <미국의 엔진, 전쟁과 사상>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 등은 그 연장이다. 한국전쟁전후민간인학살진상규명위원회 사무처장, 참여연대 정책위원장,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 상임위원 등을 맡으며 ‘외도’는 길어졌다. 연구자, 사회운동가, 정부 관리 세 가지 역할을 수행하면서 “기억의 창고를 여는 산파 역할을 했다는 자부”도 갖게 됐지만 그는 이젠 “좀더 사회과학적인 연구”로 되돌아가겠다고 했다. “그 동안 현대사 쪽에 너무 발목을 잡혔다. 지금의 한국사회쪽에 좀 더 초점을 맞추려 한다. 가능할진 모르겠으나 한국 파워엘리트, 지배계급의 본질 규명을 위해 법사회학적인 접근을 해보려 한다.” 김 교수는 마르크스든 자본주의든 민주주의 정치론이든 식민지와 분단 체험국으로서의 특성을 천착하지 않고는 한국사회를 분석해낼 수 없다고 얘기한다. “박근혜 정부, 이명박 정부 등장 이후의 우리사회 현상들을 서구 민주주의 정당론 등으로는 해명할 수 없다.” 그가 준비하고 있는 또 하나의 책은 <반공국가>다. 문제의식은 기본적으로 지금 쓰고 있는 책과 다를 바 없지만 “다만 좀 더 학술적인 책”이라고 했다. 원래 <전쟁과 사회> 제2권을 쓸 생각이었는데 ‘외도’로 쓰질 못했다. <반공국가>가 바로 그 제2권인 셈이다. 2년 뒤쯤 내놓을 생각이다. 지난달 출간한 독일·한국 학자들과의 공저 <반공의 시대>도 새 작업과 무관하지 않아 보인다. “한국의 반공체제는 세계적 냉전체제에 철저히 부응한 냉전의 내재화, 한국화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내용과 학살문제, 그리고 이를 자행한 특별수사기관들, 예컨대 일제시대 특고, 이승만 시대의 특무대, 박정희 시대의 중앙정보부. 국가 위의 국가요 법위의 국가로서의 이들 존재를 부각시키려 한다. 이를 민주주의 정치이론으로 설명하기보다는 국가형성론적 관점에서 좀더 심층적으로 접근해보고 싶다.” 김 교수는 “서구 사회과학의 일방적 수입국”인 우리 현실이 늘 답답하고 아쉬웠다며, “대등한, 나아가 사회과학 수출국이 될 수 있기를” 소망했다. “그것은 우리 자신의 경험을 어떻게 보편화하느냐에 달렸다. 한국의 경험을 통해 세계문제를 설명할 수 있는 일반이론을 만드는 것이다.” 그는 학문의 우리화·보편화가 인문학 쪽은 어느 정도 돼 있지만, 사회과학쪽은 “전혀 아니다”고 했다. “예컨대 재벌이란 말은 그대로 사회과학 용어로 통용된다. 콜드 워(Cold War)를 냉전으로 번역해서 쓰지만 정확하게 그 의미가 전달되진 않는다. 이건 용어(언어)만의 문제가 아니다. ‘개념을 장악하는 사람이 세상을 장악한다’고 권헌익 영국 케임브리지대 트리니티칼리지 석좌교수도 얘기했지만, 이데올로기나 서구 편향이나 경사를 바로잡는 건 나라를 바꾸는 것만큼이나 중요하고 어렵다. 그게 교육, 학문, 생활 등 모든 것과 다 연결돼 있다.” 그런 의미에서 “학자들이야말로 그 인프라(기반시설)를 만드는 이들”이라고 그는 말했다. 하지만 이 나라엔 아직까지도 이 나라 사람들이 만든 사회과학사전 하나 없다. 해방직후에는 나름의 그런 것들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는 실정이란다. 우리가 만든 경제학사전, 제대로 된 사회과학 교과서도 없단다. 그런 시도들은 1980년대 말 90년대 초에 오히려 활발했는데 지금은 다 죽었다며 “그때보다 후퇴했다. 더 미국화됐다는 얘기”라고 했다. “이걸 어떻게 더 새로운 학문적 커뮤니티를 만들어내 돌파할 수 있을지, 개인적으로 그 씨앗을 뿌릴 수 있을지. 내가 못하면 후배, 제자들이라도 키워야 한다. 그래야 다음 세대에서라도 할 수 있지 않겠나.” 김 교수는 “우리 역사를 통해 자기것을 제대로 만들어낸 사람은 원효가 거의 유일하지 않을까. 거기에 다산과 퇴계 정도를 보탤 수 있을까.”라며 “이 자기화라는 측면에서 일본과 비교하면 우리는 상대가 안 된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그런 문제의식조차 없다는 게 더 문제”라고 덧붙였다.
김동춘 교수는 근현대사 파고든 사회학자
경북 영주면 시골의 100호쯤 되는 청도 김씨 집성촌에서 태어난(1959년) 김동춘 교수는 그곳에서 중학교까지 다녔다. 대구 계성고를 나와 1977년에 서울대 사대 교육계열로 진학했다. 유신독재가 기승을 부리던 바로 그해 11월에 “선배들 따라다니다가” 무기정학을 당했다.
“전에 한겨레 있던 진아무개씨가 나와 같은 사건으로 걸렸는데, 그는 경찰서 신세 두 번째라 제적됐고. 한 번 갔던 나는 무기정학이었다.” 1년을 꿇고 78학번들과 같이 다녔다. 심상정씨가 한반이었다. 원래 지리학 공부를 했는데, 무기정학당한 뒤 학생운동에 본격 뛰어들었다. 고향에서 그는 “거의 내 논 사람”이 됐다. 아버지는 ‘우익’이었지만 집안사람 중엔 대구사범 나와 좌익활동을 한 사람도 있었다. “예전에 연대 총장했던, 김찬국 선생, 그 분이 내 조카뻘이다.”
형제 둘 중 장남으로, 집안의 기대가 컸던 그는 운동을 포기하고 사회학과 대학원에 들어갔다.
고교 교사생활, 군 복무 등을 거쳐 뒤늦게 박사학위를 받았으나 ‘전과’ 때문에 3년 반 동안 비정규직 노동자 신세를 면치 못했다. 1997년 3월부터 성공회대 교수로 근무하고 있다.
김 교수에게 20여권 되는 저서들 중 굳이 대표작 하나 얘기해 달랬더니 이랬다. “연구자들끼리 하는 말이 있다. ‘박사 논문 이상으로 새로운 저작을 내면 대가’라는 말이다.” 박사논문 ‘한국 노동자의 사회적 고찰- 1987년 이후 중공업 노동자의 노동조합활동을 중심으로’(1993)를 수정 보완한 첫 저서가 <한국사회 노동자 연구>(1995)다.
“현대 한국사회의 지배질서와 시민사회, 노동운동 등을 이해하기 위해 부심하던 중 한국전쟁을 다시 정리하지 않고서는 오늘의 한국 자본주의 정치·경제·사회 질서를 제대로 정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한국전쟁 연구를 시작했으나 장벽에 부딪혔다. “한국전쟁에 관한 사실(fact) 자체가 충분히 조사·정리돼 있지 않다는 점” 때문이었다.
그 구멍을 메우려 애쓴 결과가 <전쟁과 사회>(2000)다. 김 교수는 이들 2권을 “제일 심혐을 기울인 책”으로 꼽았다. 단재상을 받은 <미국의 엔진, 전쟁과 시장>(2004), <분단과 한국사회>( 1997), <이것은 기억과의 전쟁이다>(2013), <대한민국 잔혹사>(2013), <전쟁정치-한국정치의 메커니즘과 국가폭력>(2013), <트라우마로 읽는 대한민국>(2014) 등이 모두 <전쟁과 사회> 계열이라 할 수 있겠다. 그리고 <한국 사회과학의 새로운 모색>(1997), <1997년 이후 한국사회의 성찰-기업사회로의 변환과 과제>(2006) 등이 있다.
연재지금 집필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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