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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장난은 어떻게 범죄로 몸을 바꾸는가

등록 2015-09-24 22:41수정 2016-07-15 15:48

박현주의 장르문학 읽기
발신자
카린 포숨 지음, 최필원 옮김/은행나무 펴냄(2015)

최근 십몇년간 세계 추리소설의 가장 중요한 분야로 꼽히는 북유럽 추리소설은 언뜻 확고한 개성이 있는 장르처럼 보여도 작품이 생산되는 지역이라는 지리학적 정보 외에는 특별한 성격을 규정하지는 않는다. 다른 대륙의 국가들이 이상으로 삼는 안정된 사회구조 속에서도 일어나는 부패와 테러의 위협, 반인륜적 범죄에 대한 제도적 대응이 공통 소재이긴 해도 그에 접근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가령, 스티그 라르손과 요 네스뵈, 헨닝 만켈의 소설을 다 엇비슷하다고 뭉뚱그릴 수는 없는 것이다. 특히 노르웨이의 카린 포숨은 범인 찾기 이상의 독특한 심리 스릴러로 뚜렷이 구분되는 스타일을 보여주는 작가이다.

포숨의 탐정 주인공 세예르 경감이 등장하는 <발신자>는 한 마을에 일어나는 하찮은 장난이 물둘레처럼 퍼져나가 거대한 범죄가 되는 과정을 묘사하면서 그에 따라 변화하는 인간들의 심리를 그린다. 부모가 잠깐 한눈을 파는 사이에 유모차에 탄 아이가 피투성이가 되는 사건이 시작이지만 비극적이고 잔혹한 살인이 벌어질 때까지 악의는 스스로 양분을 찾아 성장한다. 이 소설에서 인상적인 대목 중 하나는 수사를 하던 세예르 경감이 축구를 하는 아이들과 만나는 부분이다. 한 아이가 아기 사건은 장난일 뿐이지 않으냐고 하자 세예르는 정색하며 대답한다.

“그가 한 건 절도다. 부모 마음의 평온을 훔쳐간 거나 다름없으니까. 이건 아주 심각한 범죄야. 마음의 평온이 사라지면 인생이 끔찍해진다는 것을 명심해라.”(73~74쪽)

동기를 집어내기 어려울 정도로 하찮은 장난들이었다. 당신이 죽길 바라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가장 좋아하는 것을 망가뜨리기. 당신들의 삶도 내 삶만큼이나 불안정하다는 것을 재차 확인시키기. 그러나 타인의 평온한 삶을 흔들고자 하는 의도 자체가 범죄의 도화선임을 세예르 경감은 꿰뚫어보았다. 순간의 일탈이 남의 평화를 훔쳐간다.

심리 스릴러로서 <발신자>는 가해자의 내면을 인간적 시선으로 그려낼 뿐 아니라, 사건 후 피해자들의 내적 변화까지도 면밀하게 따라간다. 질서가 깨진 이후의 삶에서 사람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범인을 쫓아가는 과정만큼 긴장감을 자아낸다. 그리고 결국 어떤 사람들은 충격에서 영원히 헤어나지 못하고 자신도 악의 검은 늪에 빠져버린다. 아무리 작아도 악의가 겨누어지면 그를 맞은 모든 이의 삶이 완전히 달라진다.

박현주 에세이스트, 번역가
박현주 에세이스트, 번역가
소설 속에서 장난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행복했던 모습이 남의 눈에 띄었기에 선택되었다. 내가 갖지 못한 행복을 시기하는 것을 넘어서 조금이나마 더럽히고 싶다는 비열한 생각은 오로지 소시오패스만이 하는 것이 아니다. 냉혹하기 그지없는 범인에게서 깊은 고독을 감지했을 때 무심코 공감하다가 그의 고독이 내 마음 밑바닥에 깔린 어둠을 부를까 싶어 섬뜩해진다. 가끔 뉴스에서 범인을 묘사하며 “겉으로 볼 때는 평범했던 사람”이라는 표현을 쓸 때가 있다. 하지만 누구든 오직 범죄를 저지르기 전까지만 평범하다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 삶의 가장 무서운 진실이라고 카린 포숨은 말하는 듯하다. 이것이 포숨 소설에서 공통으로 발견할 수 있는 으스스한 매혹이다. 그러나 책장을 눈 뜨고 넘기기 괴로운 장면이 있으니 마음 약한 이는 각오가 필요하다.

박현주 에세이스트,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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