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박현주의 장르문학읽기
야코프의 천 번의 가을 1, 2
데이비드 미첼 지음, 송은주 옮김/문학동네(2018) 물리적으로나 내용상으로나 책이 경량화하는 지금, 800페이지가 넘는 소설을 읽는다는 건 무척 버거운 일이다. 게다가 낯선 지명과 인명들로 가득 찬 역사소설이라면 집중력은 더 가혹한 시험을 받는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싶은 걸 참고, 초반 100페이지를 더디게 읽으면서 낯선 세계를 헤쳐나가야 한다. <야코프의 천 번의 가을>은 독자에게 헌신을 요구하는 역사소설이다. 소설의 배경은 1799년에서 1817년에 이르기까지의 일본 나가사키, 쇄국정책을 굳건히 고수하던 일본에서 네덜란드와의 한정된 교역을 위해 조성된 인공섬 데지마이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사무원으로 온 야코프 더주트, 당시에 여자에게는 금지되었던 의학을 공부하여 산파가 된 아이바가와 오리토, 그리고 통역관인 오가와 우자에몬의 삶이 이 데지마에서 펼쳐진다. 이 책에서는 네덜란드어와 일본어, 원래 작가가 썼을 영어, 그리고 번역된 한국어가 뒤섞이면서 현란한 언어의 풍경이 그려진다. 적대적인 동료들과 말이 통하지 않는 일본인들과 살아가려 애쓰는 야코프처럼 독자들 또한 언어의 여러 결을 오가는 데 익숙해져야 이 소설에서 계속 나아갈 수 있다. 그 끝에 보상이 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갈 수 없는 길이다. 하지만 데이비드 미첼은 배신하지 않는 작가이다. 미첼은 1994년 크리스마스 때 나가사키에서 전차를 타고 가다 잘못 내리는 바람에 데지마의 흔적을 만났고, 여기서 이 소설을 구상했다고 밝히고 있다. <넘버 나인 드림> <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서 미첼은 다른 차원과 공간을 교차 배치하여 선형적 시간 개념을 무너뜨리는 구성의 기술을 보여주었다. <야코프의 천 번의 가을>은 이와는 다르게 우직하게 인물들을 따라가는 전형적 역사소설로, 충실한 조사를 통해 당시의 세계를 재구성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 책의 아름다움은 역사 속에 배음처럼 깔린 사람들의 목소리를 허구적으로 상상하여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찾아내려는 노력에서 온다. 영리하고도 신실한 야코프 더주트는 원칙을 중요시하고 인간의 존엄을 믿는다. 오리토를 처음 보고 사랑에 빠지지만, 제국주의의 물결을 타고 흘러들어 온 침입자로서의 자신의 처지를 알기에 그녀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못한다. 얼굴에 화상 자국이 있는 오리토가 특별한 건 상처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서양 의학을 열심히 배우는 여성 의사로서, 다른 여성들의 생명을 살리려 한다. 통역관인 우자에몬은 가문의 강요로 사랑하는 오리토와 맺어지지는 못했으나, 그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걸 건다. 실존했다 쳐도 오래된 서류의 한구석에만 이름을 남겼을 그런 사람들의 삶이다. 그러나 이 세계를 덧없이 스치고 간 것만 같은 한 사람의 삶에는 천 번의 가을처럼 기나긴 시간이 담겨 있다. 무엇보다 이 소설에 힘을 불어넣는 것은 세 주인공의 선량함에 대한 의지이다. 역사는 인간의 잔인함과 어리석음으로 얼룩져 있지만, 그래도 자기를 포기하고 타인을 구하려 했던 사람들의 힘으로 이어진다. <야코프의 천 번의 가을>은 그런 역사적 신념을 말한다. 그리고 모든 여행 이야기의 귀결처럼 “연인이 다시 만나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잔잔한 슬픔의 바다 위에 부는 바람처럼 감동이 찾아온다. 박현주 작가, 번역가
데이비드 미첼 지음, 송은주 옮김/문학동네(2018) 물리적으로나 내용상으로나 책이 경량화하는 지금, 800페이지가 넘는 소설을 읽는다는 건 무척 버거운 일이다. 게다가 낯선 지명과 인명들로 가득 찬 역사소설이라면 집중력은 더 가혹한 시험을 받는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고 싶은 걸 참고, 초반 100페이지를 더디게 읽으면서 낯선 세계를 헤쳐나가야 한다. <야코프의 천 번의 가을>은 독자에게 헌신을 요구하는 역사소설이다. 소설의 배경은 1799년에서 1817년에 이르기까지의 일본 나가사키, 쇄국정책을 굳건히 고수하던 일본에서 네덜란드와의 한정된 교역을 위해 조성된 인공섬 데지마이다. 네덜란드 동인도회사의 사무원으로 온 야코프 더주트, 당시에 여자에게는 금지되었던 의학을 공부하여 산파가 된 아이바가와 오리토, 그리고 통역관인 오가와 우자에몬의 삶이 이 데지마에서 펼쳐진다. 이 책에서는 네덜란드어와 일본어, 원래 작가가 썼을 영어, 그리고 번역된 한국어가 뒤섞이면서 현란한 언어의 풍경이 그려진다. 적대적인 동료들과 말이 통하지 않는 일본인들과 살아가려 애쓰는 야코프처럼 독자들 또한 언어의 여러 결을 오가는 데 익숙해져야 이 소설에서 계속 나아갈 수 있다. 그 끝에 보상이 있다는 믿음이 없다면 갈 수 없는 길이다. 하지만 데이비드 미첼은 배신하지 않는 작가이다. 미첼은 1994년 크리스마스 때 나가사키에서 전차를 타고 가다 잘못 내리는 바람에 데지마의 흔적을 만났고, 여기서 이 소설을 구상했다고 밝히고 있다. <넘버 나인 드림> <클라우드 아틀라스>에서 미첼은 다른 차원과 공간을 교차 배치하여 선형적 시간 개념을 무너뜨리는 구성의 기술을 보여주었다. <야코프의 천 번의 가을>은 이와는 다르게 우직하게 인물들을 따라가는 전형적 역사소설로, 충실한 조사를 통해 당시의 세계를 재구성하는 데 주력하였다. 이 책의 아름다움은 역사 속에 배음처럼 깔린 사람들의 목소리를 허구적으로 상상하여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찾아내려는 노력에서 온다. 영리하고도 신실한 야코프 더주트는 원칙을 중요시하고 인간의 존엄을 믿는다. 오리토를 처음 보고 사랑에 빠지지만, 제국주의의 물결을 타고 흘러들어 온 침입자로서의 자신의 처지를 알기에 그녀에게 섣불리 다가가지 못한다. 얼굴에 화상 자국이 있는 오리토가 특별한 건 상처 때문이 아니다. 그녀는 서양 의학을 열심히 배우는 여성 의사로서, 다른 여성들의 생명을 살리려 한다. 통역관인 우자에몬은 가문의 강요로 사랑하는 오리토와 맺어지지는 못했으나, 그녀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모든 걸 건다. 실존했다 쳐도 오래된 서류의 한구석에만 이름을 남겼을 그런 사람들의 삶이다. 그러나 이 세계를 덧없이 스치고 간 것만 같은 한 사람의 삶에는 천 번의 가을처럼 기나긴 시간이 담겨 있다. 무엇보다 이 소설에 힘을 불어넣는 것은 세 주인공의 선량함에 대한 의지이다. 역사는 인간의 잔인함과 어리석음으로 얼룩져 있지만, 그래도 자기를 포기하고 타인을 구하려 했던 사람들의 힘으로 이어진다. <야코프의 천 번의 가을>은 그런 역사적 신념을 말한다. 그리고 모든 여행 이야기의 귀결처럼 “연인이 다시 만나는” 마지막 장면에 이르면, 잔잔한 슬픔의 바다 위에 부는 바람처럼 감동이 찾아온다. 박현주 작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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