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과 생각] 박현주의 장르문학 읽기
조현 지음/폭스코너(2018) 연말연시, 두 편의 드라마에 빠져 있었다. 넷플릭스의 <블랙미러: 밴더스내치>와 티브이엔(tvN)의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이었다. <밴더스내치>는 넷플릭스에서 처음 시도한 인터랙티브 드라마로 매번 선택의 갈림길에 이를 때마다 시청자가 직접 화면을 터치해서 다음 경로를 결정하는 방식이다.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은 증강 현실 게임을 소재로 한 드라마로, 게임과 현실이 중첩된 세계에서 혼란이 일어난다. 이 두 드라마는 공통의 질문들을 담고 있다. 우리가 지금 발 디딘 이 세계를 현실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환상이라고 여긴 또 다른 세계에서 살아가는 나는 누구인가? 우리의 선택은 이 여러 개의 우주를 어떻게 바꾸는가? 조현의 작품집 <새드엔딩에 안녕을>에 실린 단편들도 역시 같은 질문을 던진다. ‘선택’은 일견 평범한 건설회사 재개발부 직원의 고민으로부터 시작된다. 곧 대리 진급을 앞둔 그는 경매로 넘어온 빌라의 입주민들을 내쫓아야 하는 괴로운 업무를 맡았다.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를 떨치면서 그는 할머니와 어린아이들이 사는 빌라에 들어선다. 보증금도 받지 못하고 쫓겨나게 된 처지의 가련한 사람들 앞에서 그는 약간의 위로금만 주고 이들을 외면해야 할지, 입주 주택의 입주권을 지급해야 할지 고민한다. 그가 선택을 내리는 순간 암전. 이 단편은 모든 취업준비생을 고난에 밀어 넣는 적성검사에 상황부여형 심리검사가 도입되었다는 설정이다. 이는 머리에 부착된 장치로 가상의 상황에 부닥친 지원자들의 선택을 평가한다는 원리이다. 곤란한 사람들을 외면할지, 도와줄지, 이에 따라서 회사에 적합한 인재가 결정된다. 하지만 이 또한 가상현실인지 어떻게 확인할 수 있는가? 지금 이것조차 시험이라면 어떻게 행동해야 하지? 소설은 연속적으로 중첩된 우주 속을 탐구해나간다. 조현 작가는 신춘문예 당선작인 ‘종이냅킨에 대한 우아한 철학’부터 시적인 문체로 에스에프(SF)적인 상상력을 충실히 풀어나갔다. 티(T.) 에스(S.) 엘리엇의 <황무지>를 모티브로 한 이 단편처럼 <새드엔딩에 안녕을>에도 기존의 소설과 시가 프레임으로 세워지고 그 안에서 또 다른 이야기가 펼쳐진다. 한 개인이 스쳐 지나갈 수 있는 수많은 우주가 소설이라는 형태로 제시된다. 독자들은 아마도 여기에서 또 한 번 질문할 것이다. 내가 이 소설을 읽는 현실이 진짜라는 걸 어떻게 확인하나? 여기는 어쩌면 상황 실험 1210번일지도 모른다. 에스에프, 판타지, 역사소설. 특정한 장르들은 물론, 모든 소설은 우리가 겪을 수 있었던 가능성의 삶을 그려낸다. 그것들은 가끔 우리의 삶으로 들어와 진짜라고 각인되기도 한다. 이 단편집의 다른 소설 ‘어셔비츠 훌라후야 빙드레브쵸’는 우리의 기억을 바꾸는 주문이다. 이 주문을 외운 순간, 내게 다른 기억이 있었다는 것 자체가 영영 사라지고 대체 기억만이 남는다. 그러니까 지금 현실은 내가 또 다른 우주에서 과거에 바랐던 소원의 결과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새드엔딩을 해피엔딩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이라고 이 소설은 말하는 것 같다. 무엇이 현실인지 확신할 수 없다면 허구로 새로운 현실을 지어낼 수도 있지 않겠는가? 나의 선택은 우리의 해피엔딩, 쓰라린 기억은 지워버린다. 어셔비츠 훌라후야 빙드레브쵸. 박현주 작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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