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ont color="#c21a1a">[책과 생각] 박현주의 장르문학읽기
곽재식 외 지음/안전가옥(2019) 편식가인 내가 세상에서 모르는 기쁨은 많지만, 그중 하나가 냉면의 맛이다. 나는 모르지만, 모두가 사랑하는 냉면. 대체 냉면에는 어떤 매력이 있기에, 사시사철 사람들의 입맛을 사로잡는가? <냉면>이라는 주제로 소설을 모은 앤솔로지가 출간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나는 다시 생각에 빠졌다. 냉면은 심지어 한국인에게는 음식 이상의 존재, 이렇게 하나의 앤솔로지를 바칠 만한 대상이었단 말인가? 이 책을 낸 안전가옥은 “장르적 쾌감이 있는 원천 스토리를 기획하”는 프로젝트이자 창작 공간의 이름이다. 장르적 쾌감이라는 표현은 장르 소설이 추구하는 정신으로 명확해 보이지만, 비장르적 쾌감이라는 게 따로 존재하지 않는 한 이 말은 늘 어떤 모호한 영역 안에 있다. 그리고 요새 애용하는 “원천 스토리”라는 표현은 이 소설이 영화나 웹툰 등 다른 장르의 원작으로 쓰이길 원한다는 욕망의 은근한 표출이다. 이런 기획 의도는 멀티플랫폼 시대의 소설이라는 장르에 대한 경제적이고 실용적 요구처럼 보이는 경향이 있다. 그리고 그들은 첫 번째 앤솔로지의 주제로 냉면을 선택했다. <냉면> 앤솔로지에는 총 다섯 편의 작품이 실렸다. 김유리의 ‘A, B, C, A, A, A’는 한 여자의 삶에서 지나친 두 명의 해로운 남자와 지나치게 이로운 한 남자에 관한 이야기, 판타지에 가까운 연애 소설이다. 범유진의 ‘혼종의 중화냉면’은 어머니와 아버지의 재혼으로 만난 두 자매가 서로를 그리워한다는 단편이다. 일본인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미유와 대만인 아버지에게서 태어난 시안의 삶이 문화의 경계에서 탄생한 혼성의 중화냉면을 통해 그려진다. dcdc의 ‘남극낭만담’은 남극에서 환상의 냉면 육수를 만들겠다는 집념에 사로잡힌 미친 과학자에게 대항하는 빙저호 연구원과 다큐멘터리 감독의 모험을 그렸다. 언뜻 봐서는 이 소설의 장르는 호러이고 에스에프(SF) 같지만, 또한 로맨스가 깔려 있다. 전건우의 ‘목련면옥’은 냉면을 둘러싼 가장 유명한 도시 전설을 한국적 오컬트의 관습과 결합한 공포 소설로, 이 소설집에서 시각적으로 가장 강렬하며 반전이 있는 작품이다. 곽재식의 ‘하와이안 파인애플 냉면은 이렇게 우리 입맛을 사로잡았다’는 작가 특유의 일상적 과학기술을 가미한 코미디이다. 성실한 실패를 해야 하는 젊은이들이 인공지능을 사용해서 <골목식당> 유의 식당 살리기 컨설팅 스타트업을 하다가 하와이안 파인애플 냉면을 개발하는 데 성공하고 만다. 장르 소설이 현재, 이곳이라는 현실적 문제를 환상과 공포, 자유로운 상상이라는 틀을 통해 이야기할 때 느껴지는 쾌감이 있다. 이 다섯 편의 소설들은 모두 극히 동시대적인 고민과 이슈를 담고 있다. 냉면이라는 소재로 이 프로젝트가 추구한 바는 각 소설에서 천천히 드러난다. 우리의 마음에 가장 가깝고, 누구나 접할 수 있는 냉면의 시원한 맛을 장르 소설의 쾌감에 비유하려던 것이 아니었을지. 동시대의 독자를 사로잡아야 하는 한국 소설 시장에는 의미가 있는 시도이다. 다만, 소설이 형식보다 스토리를 강조하는 프로젝트일 때 이따금 생기는 문제가 이 앤솔로지에도 있다. 의도와 아이디어가 좋은 식당도 백 선생님 같은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하듯이, 책에는 늘 좋은 전문 교정자가 필요하다. 책을 만드는 사람은 작가만이 아니다. 작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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