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광고

광고닫기

광고

본문

광고

문화 책&생각

당신 영혼의 인덱스

등록 2019-08-02 06:01수정 2019-08-02 21:06

[책과 생각] 박현주의 장르문학읽기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
김초엽 지음/허블(2019)

몇 주 전 일요일, 언니와 엄마와 함께 광릉 근처의 추모공원에 다녀왔다. 엄마는 후에 당신이 있을 자리를 예약해놓았고, 이제 우리에게 그곳을 구경시켜주고 싶어 했다. 탁 트인 산 중턱의 추모공원은 아직 조성 중이라서 빈자리가 많았지만, 몇몇 곳에는 이미 들어온 분들이 있었다. 비석 사이를 걸으며 그들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남긴 글들을 읽었다. 우리는 사람의 죽음을 “세상을 떠났다”라고 말하지만, 그들은 아직 이 세계에 있다.

김초엽의 과학 문학 소설집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실린 단편 ‘관내분실’은 근미래의 추모 공원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 소설 속 세계에서는 죽은 사람의 과거 기억을 마인드 업로딩이라는 기술을 통해 보관하는 도서관이 봉안당을 대신한다. 임신 초기의 지민은 도서관에 엄마 은하의 마인드를 만나러 갔다가, 관내분실되었다는 말을 듣는다. 즉, 은하의 기억을 검색할 수 있는 인덱스가 삭제되어 있어 접근할 길이 없다는 뜻이다. 이를 다시 찾으려면 새로운 마인드 검색 기술을 시도해야 하고, 그러려면 엄마를 고유하게 특정할 수 있는 물건이 필요하다. 그렇게 지민은 엄마 은하의 삶을 역추적해야 한다.

<우리가 빛의 속도로 갈 수 없다면>에 실린 대부분의 이야기는 많은 에스에프(SF)가 그러하듯, 포스트휴먼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인간 신체의 한계를 극복하는 과학 기술의 발달, 그 결과로 등장하는 새로운 인류, 거기서 발생하는 정치적이고 윤리적인 문제들에 대해 숙고하는 이야기들이다. 지금 인기 있는 한국의 드라마나 대중문학에서는 포스트휴먼 담론이 역설적으로 초과학적인 오컬트와 뒤섞이는 경향이 있지만, 김초엽의 소설은 그와는 선을 긋고 근미래적 설정 속에서도 지금 현실의 문제를 직시하고 있다. ‘관내분실’은 아이를 갖게 된 딸이 생전에 이해할 수 없었던 엄마를 사후에 연결하려는 이야기이다. 엄마의 마인드에 닿을 수 있는 인덱스가 삭제되었지만, 엄마는 살아 있을 때부터 외부 세계와의 연결이 이미 끊긴 사람이었다. 아이를 낳은 후 은하는 직장으로 돌아가기도 어려웠고, 자신만의 진짜 삶을 가질 수도 없었다. ‘관내분실’은 사회에서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깊은 이해가 미래의 은유를 통해 펼쳐지는 소설이다.

여기 나오는 마인드 도서관은 넷플릭스 드라마 시리즈 <블랙미러>의 시즌 4 <샌주니페로>에 나오는 기억의 클라우드를 닮았다. 그 드라마에서 내가 좋아했던 대사가 있다. “클라우드 (구름) 위로 올린다니, 천국 같이 들리는 얘기네요.” 우리가 죽은 후에도 기억이 어딘가에 영원히 저장되어 있다면 그곳이 천국일지도. ‘관내분실’의 관점으로 보면, 천국은 기억을 통해 우리의 존재가 드디어 이해되는 곳인지도 모른다.

엄마가 가기로 결정한 추모공원의 자리는 작았지만 여러 곳 중에서도 특히 전망이 아름다웠다. 나는 사람이 육체를 떠난 뒤에도 아름다운 풍경을 즐길 수 있다는 이 당연한 개념이 마음에 든다. 한편으로는 이것은 내가 엄마를 이해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언제가 되었든 자기가 갈 곳을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 그리고 늘 풍경을 중요시하는 사람. 언젠가 내가 이 기억의 도서관에 갔을 때 엄마와 연결될 수 있는 인덱스이다.

작가, 번역가
항상 시민과 함께하겠습니다. 한겨레 구독신청 하기
언론 자유를 위해, 국민의 알 권리를 위해
한겨레 저널리즘을 후원해주세요

광고

광고

광고

문화 많이 보는 기사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1.

‘의인 김재규’ 옆에 섰던 인권변호사의 회고록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2.

‘너의 유토피아’ 정보라 작가의 ‘투쟁’을 질투하다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3.

‘여자 둘이 살고 있습니다’, 억대 선인세 영·미에 수출…“이례적”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4.

노래로 확장한 ‘원영적 사고’…아이브의 거침없는 1위 질주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5.

9년 만에 연극 무대 선 김강우 “2시간 하프마라톤 뛰는 느낌”

한겨레와 친구하기

1/ 2/ 3


서비스 전체보기

전체
정치
사회
전국
경제
국제
문화
스포츠
미래과학
애니멀피플
기후변화&
휴심정
오피니언
만화 | ESC | 한겨레S | 연재 | 이슈 | 함께하는교육 | HERI 이슈 | 서울&
포토
한겨레TV
뉴스서비스
매거진

맨위로
뉴스레터, 올해 가장 잘한 일 구독신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