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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이슬람의 지혜가 영국 정치사상의 젖줄이 되다

등록 2020-02-14 06:00수정 2020-02-14 16:50

[책&생각] 윤비의 이미지에 숨은 정치
(20) 롱소프의 바퀴-도상학으로의 길 3

중근동에서 제작된 책 ‘비밀 중의 비밀’ 통해 벽화 상징을 풀다
실마리 찾을 때마다 봉인 해제하며 옛사람의 영혼을 만나는 감동
13세기 영국의 철학자 가운데 로저 베이컨이라는 인물이 있다.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서 주인공 윌리엄 배스커빌이 종종 자부심을 담아 자신의 스승으로 입에 올리는 인물이다. 베이컨이 즐겨 인용하였던 책 가운데 <비밀 중의 비밀>(Secretum Secretorum)이라는 작품이 있다.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자 알렉산더 대왕에게 군왕의 자기관리와 몸가짐, 통치술과 기타 필요한 지식을 전수하는 서한 형식으로 쓰인 작품이다. 사실 아리스토텔레스가 쓴 편지는 아니다. 받는 사람도 알렉산더 대왕이었을 턱이 없다. 중세에는 이렇게 고대의 위대한 사상가들을 사칭하는 위서들이 판을 쳤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더 대왕. 롱소프 거실 서쪽 벽. 윤비 제공
아리스토텔레스와 알렉산더 대왕. 롱소프 거실 서쪽 벽. 윤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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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민 끝에 다시 열람실로 향하다

베를린 국립도서관에서 떠오른 것은 그전에 국왕의 신체와 국가의 메타포를 연구하면서 어느 학자가 <비밀 중의 비밀> 속에 국왕의 신체와 국가의 메타포가 등장한다고 스쳐가듯 언급했던 것을 읽은 기억이었다. 계단에 멈춰서 망설였다. 그 문헌을 한번 읽어볼까? 그러나 그러기에는 박사논문과 상관도 없이 오래 끌어온 이 연구를 이제 그만 종결짓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강했다. 이제 원고를 보내는 일만 남았기에 더 그러했다. 몇분 고민하다가, 결국 다시 열람실로 발길을 돌렸다. 역사와 문헌을 탐구하는 학자들은 오랜 수수께끼에 대한 답이 어쩌면 어떤 낡은 고서나 먼지를 뒤집어쓴 문서 더미 속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산다. 물론 그런 발견은 현실에서는 로또에 당첨되는 것만큼은 아니라도 좀체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날 저녁의 승자는 다시 한번 그 막연한 기대감이었다.

대출을 신청하고 30분쯤 기다려 받은 책을 빠르게 훑어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곳에서 순간 심장을 거칠게 뛰게 하는 한 구절을 발견했다.

“신이 인간을 창조하여 (…) 인간의 몸을 마치 한 나라처럼 만들었다. 신은 인간의 판단력을 이 나라의 왕으로 삼아 가장 고결하고 높은 자리인 머리에 두었고 이어 다섯의 통치 책임자들을 임명하여 (…) 왕을 돕게 하였다.”

여기서 이 위서의 저자가 말하는 다섯명의 통치 책임자는 다음과 같다. 눈·코·입 등 인간의 다섯 감각을 담당하는 기관들이다. 필자가 이전에 읽었던 중세와 르네상스의 어느 문헌도 인간의 다섯 감각(기관)을 ‘국가는 국왕의 신체’라는 상징체계에 이처럼 분명하게 결합시킨 문헌은 없었다. 국왕과 바퀴, 다섯 감각의 상징을 하나로 배치시킨 롱소프 벽화의 상상력의 근원이 그곳에 있었다. 수수께끼는 풀렸다.

에드워드 3세. 롱소프 거실 남쪽 벽. 윤비 제공
에드워드 3세. 롱소프 거실 남쪽 벽. 윤비 제공

그 순간 롱소프 탑의 거실에 그려진 모든 그림들의 의미도 따라서 풀리기 시작했다. 거실의 서쪽 벽에는 고대 철학자의 풍모를 한 노인과 마찬가지로 고대의 복장을 한 청년의 대화 장면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 역시 또 하나의 수수께끼였다. 세네카와 네로? 그렇게 추정하는 학자들도 여럿 있었다. 그러나 별 설득력은 없었다. 세네카와 네로가 사제관계이기는 했지만, 세네카를 잔인하게 죽인 것도 네로였다. 하지만 롱소프 거실을 장식한 화가가 <비밀 중의 비밀>에서 소재를 얻어냈다고 한다면 답은 간단했다. 노인은 아리스토텔레스이고 청년은 알렉산더 대왕이다.

<비밀 중의 비밀>을 롱소프 벽화의 문헌 근거로 밝혀냄으로써 남쪽 벽에 에드워드 3세가 에드먼드 우드스톡 경과 함께 그려진 이유도 알 수 있게 되었다. 16세기 이후 위서로 낙인찍혀 오늘날은 아는 학자도 거의 없을 지경이 되었지만, <비밀 중의 비밀>은 12세기부터 약 300년간 유럽의 베스트셀러였다. 남아 있는 필사본의 양과 수많은 속어 번역본은 이 작품의 인기를 입증해준다. 특히 이 작품은 에드워드 3세에게는 특별한 의미가 있었다. <비밀 중의 비밀>의 프랑스어 필사본은 에드워드 3세가 그의 프랑스인 신부한테 받은 결혼 선물 중 하나였다. <비밀 중의 비밀> 라틴어 필사본이 그에게 즉위 전에 바쳐지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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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세기 영국 정치를 반영한 시대의 ‘위서’

<비밀 중의 비밀>이 왕실에 진상될 정도로 각광을 받게 된 배경에는 1320~30년대 영국의 정치적 혼란이 자리잡고 있다. 에드워드 3세의 아버지 에드워드 2세는 무능을 이유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그 뒤 권력은 에드워드 3세의 어머니 이사벨라 여왕과 그 정부 모티머의 손으로 넘어갔다.(그림에 등장하는 에드먼드 우드스톡 경은 이들의 손에 죽음을 당한 고위 귀족들 중 하나이다.) 에드워드 3세는 이 둘을 제거하고 권좌에 올랐다. 선정을 통한 정치적 안정을 이루어달라는 기대와 요구가 이전의 어느 왕보다도 크게 에드워드에게 집중되었다. 롱소프 탑의 벽화들은 <비밀 중의 비밀>이 왕실을 비롯한 영국 곳곳에서 성가를 높이던 무렵 그려졌다. 롱소프 탑의 소유자는 에드워드 3세파의 기사였다.

종종 도상을 연구하다보면 도상들이 살아 있는 듯 느낄 때가 있다. 롱소프 탑 거실의 벽화들을 하나하나 해석하면서, 마치 그 안에 있던 영혼들이 봉인에서 풀려나 움직이며 말을 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필자의 추론이 맞다면, 롱소프 벽화에 펼쳐진 국왕과 바퀴의 그림은 이상적인 정부를 국왕의 신체의 메타포로 그려낸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그림이다. 그러나 필자에게는 이 못지않게 중요한 발견이 또 하나 있었다. 지난 글에서 롱소프의 벽화를 연구하며 연구가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고 적었다. 그것은 사실이다. <비밀 중의 비밀>은 사실 유럽에서 만들어진 작품이 아니다. 이 작품의 기원은 이슬람이 지배하던 10세기 서아시아와 중동 어딘가에 있다.(아리스토텔레스가 이슬람권에서 매우 깊이 연구되었다는 것을 아는 분들은 있지만, 알렉산더 대왕의 전설이 이슬람권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비밀 중의 비밀>은 이슬람이 지배하던 북아프리카 지중해 연안을 따라 당시 이슬람의 지배하에 있던 스페인으로 넘어왔다. 그리고 라틴어로 번역되어 피레네산맥을 넘어 프랑스와 영국, 독일로 퍼져나갔다. 흥미롭지 않은가? 이슬람에서 만들어진 정치 이론이 수백년에 걸쳐 지중해를 돌아 영국에 이르러 그곳 사람들에게 좋은 정치에 대한 영감을 주었다는 사실이? 오늘날 사람들은 흔히 민주주의와 입헌주의의 근거를 마그나카르타에서 시작된 영국의 고유한 전통에서 비롯된 것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나 그것은 너무 단순한 생각이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이슬람 문화를 본질적으로 전근대적이고 공격적이라고 단정짓는다. 그러나 문화는 물처럼 흐르며 사방으로 퍼져나간다. 주지도 받지도 않은 채 고립되어 성장하는 문화는 세계에 없다. 결국 문화는 그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긴 시간을 두고 만들어가는 것이다. 한 사회의 문화가 고정불변의 길로만 나아가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역사적으로 맞지도 않을 뿐 아니라 위험하다.

이로써 연재를 마친다. 18회부터 시작한 롱소프의 벽화 이야기를 어떻게 마무리할지 고민했다. 도상 연구자로서 필자가 느끼는 두근거림과 기쁨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개인적인 감정과 소회를 실었다. 불편하게 다가가지 않았기를 빈다. 그동안 읽어주신 독자들께 감사드린다.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는 에드워드 3세의 초상. 위키미디어 코먼스
영국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있는 에드워드 3세의 초상. 위키미디어 코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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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가 만든 또 하나의 역사

글을 끝내기 전에 궁금해하실 독자들이 있을 것 같아 국왕과 바퀴의 그림(이제 ‘이상정부의 그림’이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에서 국왕이 거미를 보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답을 드리려 한다. 중세에 널리 읽히던 라틴어 성경의 시편 89편 9절에는 “우리 생의 시간들을 거미처럼 여겨야 할지니라”(anni nostri sicut aranea meditabantur)라는 구절이 나온다. ‘생의 시간은 곧 거미’라는 이 수수께끼 같은 구절을 맞닥뜨린 성경 주석자들은 궁리 끝에 ‘거미가 끝없이 실을 잣지만 마지막에 남는 것은 없는 것처럼 우리 인생도 그러하므로 궁극의 진리인 신을 경배하고 덕을 닦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의미로 새겼다. 이렇게 본다면 롱소프 벽화에서 군왕이 거미를 바라보는 것은 속된 욕망을 버리고 신을 본받아 훌륭한 군주가 되도록 덕을 닦아야 한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설명한 영국의 정치 상황에서 군왕의 덕목을 이와 같이 강조한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하다.

그렇다면 이 구절의 본래 의미는 무엇일까? 사실 여기에 등장하는 거미라는 단어는 히브리어 성경을 번역하다 벌어진 실수이다. 즉 히브리어 성경에는 거미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이를 알지 못했던 성경 주석자들은 나름 머리를 써서 그 의미를 새겼다. 때로는 실수가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든다. <끝>

성균관대 정치외교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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