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희 정권, ‘국기에 대한 맹세’ 이렇게 요리했다
‘한겨레21’ 표지기사서 추적…1968년 유종선씨 만들어
정권이 정치적 목적 왜곡·보급
정권이 정치적 목적 왜곡·보급
박정희식 전체주의 철학의 잔재에 대한 조명이 활발해지고 있다.
<한겨레21>은 최근호 표지 기사에서, 박정희 정권이 정치적인 목적으로 ‘국기에 대한 맹세문’을 변질·왜곡시킨 뒤 전국의 각급 학교 등에 보급한 과정을 상세히 보도했다. 지금까지도 정부 공식행사 등에서 의례적으로 시행되고 있는 ‘국기…맹세문’의 탄생 과정이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한겨레21>은 1968년 당시 충남도교육청 장학계장이었던 유종선(85)씨가 ‘국기…맹세문’을 만들었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확인했다. 이후 충남 지역 학교에서만 시행되던 ‘국기…맹세문’은 유신 정권이 탄생한 1972년부터 전국으로 확대됐다. 이 과정에서 문교부는 최초의 ‘국기…맹세문’을 전체주의적인 내용으로 왜곡·변질시켰다고 <한겨레21>은 보도했다.
애초 유씨가 만든 ‘국기…맹세문’은 “나는 자랑스런 태극기 앞에 조국의 통일과 번영을 위해 정의와 진실로써 충성을 다할 것을 다짐합니다”라는 문구였는데, 72년 이후 전국에 확대·시행되면서 “… 조국과 민족의 무궁한 영광을 위해 몸과 마음을 바쳐 …”라는 내용으로 둔갑했다. 통일, 정의, 진실 등의 개념이 절대적인 충성을 맹세하는 내용으로 바뀐 것이다. 유씨는 <한겨레21> 인터뷰에서 “(바뀐 내용이) 전체주의적이고 국수주의적”이라고 비판했다.
<한겨레21>은 이밖에도 당시 박 대통령이 이순신을 애국주의 모델로 활용하기 위해 충남 아산 현충사를 민족의 성역으로 조성했고, 여기에 부응한 충남도교육청이 앞장 서서 ‘국기…맹세문’을 만들었으며, 유신 이후 정권 차원에서 전체주의적인 색채가 덧칠된 과정도 함께 보도했다.
한편 전남대 인문학연구원은 지난해 12월28일 대학 용봉문화관에서 유신 시대의 대표적인 철학자 박종홍(1903-1976)에 대한 토론회를 열었다. 서울대 철학과 교수를 지낸 박종홍은 ‘국민교육헌장’을 기초하는 등 유신정권의 철학적인 기반을 다졌다. 유교·불교·미술사 등 한국 사상 전반에 대한 연구도 깊어, 오늘까지 그 영향력이 적지 않다.
박종홍의 사상적 이력을 발표한 박노자 국립오슬로대 교수(한국학)는 “개발주의적·국가주의적 민족주의에 영합한 박종홍은 전문적인 연구 업적을 매우 ‘비학술적으로’ 정치담론화시켜 이용했다”고 비판했다. 그의 사상이 식민강점기 일본 우파 지식인들의 민족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다는 점도 지적했다.
위상복 전남대 교수(철학)는 “박종홍의 영향 아래 지금까지도 한국 철학계에는 기회주의적 반공주의, 박정희식 국가철학의 경향이 남아 있다”고 짚었고, 김석수 경북대 교수(철학)도 “박종홍에 대한 반성적인 계기를 만들어 한국에서 새로운 철학의 장을 형성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지난해 말 <도덕교육의 파시즘>(길 펴냄) 출간을 계기로 다시 불붙기 시작한 박정희 시대 ‘전체주의 철학’에 대한 학계 안팎의 고민도 덩달아 깊어지고 있다.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안수찬 기자 ahn@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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