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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책&생각

신으로 남기보다 인간이 되기를 택한 마녀의 신화

등록 2020-06-12 06:01수정 2020-06-12 09:58

[책&생각] 박현주의 장르문학읽기

키르케
매들린 밀러 지음, 이은선 옮김/이봄(2020)

현대 문학의 과업 중 하나는 신과 남성 영웅의 이야기였던 그리스 신화를 소수자의 역사로 재해석하는 것이었다. 크리스타 볼프의 <메데이아: 또는 악녀를 위한 변명>은 아이를 죽인 마녀로 묘사된 여성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마거릿 애트우드의 <페넬로피아드>는 오디세우스의 아내 페넬로페의 눈과 열두 시녀의 목소리로 신화를 다시 쓴 작품이다. <빨강의 자서전>에서 앤 카슨은 헤라클레스의 모험담에서는 괴물로 그려졌던 게리온을 발굴해내서 시적인 언어로 고독과 사랑에 대한 소설을 썼다. 매들린 밀러의 <키르케>도 그런 시도의 하나인 신화적 판타지 소설이다.

소설의 화자인 키르케에 대한 신화의 묘사는 영국 화가 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그림 세 점 속에서 찾아볼 수 있다. 1891년에 그려진 <오디세우스에게 컵을 내미는 키르케>에서 마녀는 속이 다 비치는 얇은 옷을 입고 마법의 약이 든 잔을 유혹적으로 내밀고 있다. 뒤의 거울에서는 경계하는 오디세우스와 돼지로 변해버린 선원들의 모습이 비친다. 1892년의 <질투하는 키르케>에서는 연적인 스킬라에게 독을 먹여 괴물로 바꾼 물의 마녀가 등장한다. 1911년경의 <여자 마법사> 속 키르케는 매들린 밀러의 소설이 강조하는 모습과 가장 유사하다. 키르케는 책상 앞에 앉아 두 손을 맞잡아 턱을 괴고 생각에 빠진 눈빛으로 맹수들과 마주한다. 옆에 놓인 약병, 책, 베틀이 그녀가 마법을 연구하는 학자이자 장인임을 알려준다.

태양의 신 헬리오스와 물의 님프이던 페르세의 딸로 태어난 키르케는 신이지만 인간의 목소리를 지니고 있어 가족들에게조차 멸시당한다. 스스로 마법을 터득하여 신족에게 위협적인 존재가 된 키르케는 아버지 헬리오스와 제우스 사이의 협의에 따라 무인도 아이아이에로 쫓겨나서, 양 떼와 사자와 함께 고독하게 살아간다. 섬에 온 선원들에게 선의를 베풀었으나 보답 대신 폭력을 당한 키르케는 자신의 힘밖에 믿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이후에는 무엇도 무서운 것이 없었다. 인간 오디세우스가 다시 찾아와 그녀에게 무언가를 남기기 전까지는.

신화 속 남자를 유혹하는 마녀이기만 했던 키르케는 현대 소설 속에서는 자신을 억압하는 남성 중심의 사회와 신에게 대항하는 존재로 그려진다. 오랜 역사 속에서, 남성의 옆과 아래에 머물기를 거부하는 여자에게는 늘 괴물과 마녀라는 이름이 붙여졌다. 그러나 무력한 님프보다는 괴물이 나을지도 모른다. 괴물은 적어도 자기 자리가 있고, 덤비는 자를 이빨로 물어뜯을 수도 있다. 어째서 영웅과 신이 되려 한단 말인가? 인간은 이미 죽은 존재인 신과는 달리 현재의 바람과 물을 느끼며 살아간다. 마녀는 자신 이외에 누구에게도 대답할 필요가 없다. 잔혹한 신으로 사느니 인간이고 괴물이자 마녀로 살아가겠다는 것, 신화를 새로 쓰는 우리의 선택이다.

작가, 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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