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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누구누구 아내’로 불리다 4개월 뒤 오롯이 자기 이름 찾아

등록 2021-07-02 19:08수정 2021-07-03 02:02

[토요판] 이승한의 술탄 오브 더 티브이
골 때리는 그녀들
에스비에스(SBS) <골 때리는 그녀들>은 정규시즌에서 무려 30명의 여성 축구선수가 등장한다. 누구도 완벽하거나, 모범적이지 않아도 된다. 저마다 서사를 보여주는 것만으로 시청자들은 열광한다. 방송 화면 갈무리
에스비에스(SBS) <골 때리는 그녀들>은 정규시즌에서 무려 30명의 여성 축구선수가 등장한다. 누구도 완벽하거나, 모범적이지 않아도 된다. 저마다 서사를 보여주는 것만으로 시청자들은 열광한다. 방송 화면 갈무리

올해 초 파일럿엔 ‘여혐’ 비판 나와
‘누구누구 아내’로 불렸던 선수들
4개월 뒤 진짜 자기 이름 찾으며
축구 프로그램 ‘선수’로 평가받아

리그제 운영하며 고정출연 30명
소수의 긍정 측면만 다루지 않고
모두를 주인공 삼는 게 가능해져
시청자들도 이런 모습에 열광해

2021년 설 특집 파일럿 프로그램으로 첫선을 보인 에스비에스(SBS) <골 때리는 그녀들>을 처음 봤을 때의 인상은, 황진미 평론가가 받은 인상(‘골 때리는 그녀들’…무례한 제작진이 만든 ‘여혐 사회’ 축소판, <한겨레> 2021년 2월20일치)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야외에서 뛰면서 즐겁게 운동하고 싶은데, 남자들에 비해 여자 아마추어 축구의 선수층이 상대적으로 얇은 탓에 조기축구회를 알아보는 일도 쉽지만은 않은 상황. 모처럼 방송사에서 판을 깔아줬으니, 선수들은 최선을 다해 진지하게 경기에 임한다. 그럼에도 해설진은 선수들을 “아무개 선수의 아내분”이라고 호명하거나, 기량이 뛰어나면 “남자축구를 보는 줄 알았다” 같은 말들로 선수들의 진지함을 폄하했다. 자신들도 “이게 뭐라고 이렇게 박진감이 넘치냐”고 감탄하면서도, 그 박진감과 승리를 향한 열의 자체를 있는 그대로 칭찬하는 대신 여자축구는 남자축구에 비해 기량이 열등하다는 식의 고정관념을 슬쩍슬쩍 드러낸 것이다.

방송 화면 갈무리
방송 화면 갈무리

‘누구의 아내’ 아닌 선수로 이름 찾아

한국이 여자축구의 저변이 없는 나라여서 비교할 수 있는 대상이 남자뿐이라면 또 모르겠는데, 이미 지소연이나 여민지, 이민아 등의 스타플레이어들을 발굴해 내고 U-17(국제축구연맹 주관의 17살 이하 선수들이 참가하는 국가대항전), U-20(국제축구연맹 주관의 20살 이하 선수들이 참가하는 국가대항전), 아시안컵, 월드컵 등에서 우수한 성과를 거두고 있는 나라 아닌가. 박선영을 비롯한 참가 선수들의 훌륭한 기량을 보면서 즐겁다가도, 제작진과 해설진이 은연중에 꾸준히 여자 선수들을 무시하는 듯한 기색을 보이는 건 영 마뜩잖았다. <불타는 청춘>과 같은 제작진이 만든 프로그램이라는 걸 고려하면 분명 <불타는 청춘>에서 보여준 박선영의 압도적인 운동 실력에서 출발한 기획일 텐데, 그럼에도 여전히 은연중에 여자의 성취를 있는 그대로 존중하는 대신 남자와 비교해 우열을 가리는 습관은 버리지 못했구나 하는 씁쓸한 뒷맛이 남았다.

4개월간의 재정비를 거쳐 다시 돌아온 <골 때리는 그녀들>은, 어떤 부분은 여전히 무례하지만 어떤 부분들은 사뭇 나아졌다. 프로그램은 더 이상 남자축구에 비해 부족하다거나 남자축구를 보는 것 같다는 표현을 예전만큼 자주 하지 않는다. 이미 파일럿 때 보여준 기량과 스타플레이어들의 존재, 각 팀의 기량과 한계로 빚어낸 드라마들이 충분히 쌓인 터라, 다른 누군가와 비교할 필요 없이 그 안에서 충분한 서사를 뽑아낼 수 있게 된 덕분이다. 파일럿 때 뛰어난 기량으로 우승한 ‘에프시(FC) 불나방’과 주장 박선영에게는 도전자들에게 맞서는 디펜딩 챔피언이라는 서사가 주어지고, FC 불나방과 붙어봤던 다른 팀들에는 패전의 기억이 남긴 본능적인 공포와 함께 그 팀을 넘어서야 한다는 도전의식이 타오른다. 파일럿 당시 리그 최하위를 기록했던 ‘FC 구척장신’과 주장 한혜진은 더는 어이없이 패배하지 않겠다는 열의로 활활 타오르고, <골 때리는 그녀들>은 그 서사를 충실히 담아내는 것만으로도 바쁘다.

물론 남자 축구선수의 가족들과 타 종목 국가대표 출신 선수들로 구성된 팀 ‘FC 국대패밀리’의 선수들은 여전히 “차범근의 며느리”(한채아), “이천수의 부인”(심하은), “정대세의 부인”(명서현), “이호의 부인”(양은지)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있다. 국가대표 펜싱선수 출신의 남현희와 국가대표 빙상선수 출신의 박승희가 팀에 합류하며 유니폼에는 이제 ‘아무개 선수의 아내’라는 부연설명이 사라지고 오롯이 선수들의 이름만 적혀 있지만, 그럼에도 남자 축구선수 가족 출신의 선수들을 다룰 때에는 어김없이 남편이나 시아버지의 이름이 호명된다. 전담 키커인 심하은이 위협적인 슈팅을 날릴 때에는 이천수의 프리킥 장면이 인서트로 삽입되고, 명서현이 공간을 파고들 때면 정대세와 함께 연습했던 장면들이 삽입된다. 그러나 경기가 더 진행될수록 심하은은 그냥 심하은으로, 명서현은 그냥 명서현으로 호명되는 순간들이 늘어난다. 계속 시아버지 차범근과 시숙 차두리에 비교되던 한채아 또한 이제 조금씩 ‘지난 시즌에 비해 얼마나 경기력이 향상되었는가’ 쪽으로 포커스가 이동하기 시작했다. 아직 선수를 있는 그대로 선수로 존중한다고 말하기엔 턱없이 부족하지만, 적어도 어느 방향으로 가야 할지는 감을 잡은 듯 보인다. 누군가와 비교해가며 잘한다 못한다를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당장 눈앞에 놓인 승패를 위해 무서울 정도로 몰두하는 선수들에게 집중하는 것 말이다.

고정 여성 출연자 30명이 보여준 힘

<골 때리는 그녀들>이 이와 같은 변화를 밟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파일럿을 향한 찬사와 비판을 정규 편성에 충실히 반영하기 위해 노력한 점도 있을 것이고, 온몸에 멍이 들어가면서 치열하게 연습에 임한 선수들의 노력이 만들어낸 변화이기도 하다. 하지만 <골 때리는 그녀들>을 다른 연예인 스포츠 예능과 구분하는 특징인 ‘리그’가 아니었다면, 이렇게 빠른 속도로 경기와 선수에게만 집중하는 방향으로의 변화는 어려웠으리라. <골 때리는 그녀들>은 특정한 ‘팀’을 주인공으로 놓고 그 팀이 성장하고 도전하는 내용을 다룬 작품이 아니라, 아마추어 축구 경기에 나선 여자 선수들이 꾸린 ‘리그’ 전체를 주인공으로 삼은 작품이다. 기존의 연예인 스포츠 예능은 주로 한 팀 안에서 일어나는 성장기에 주목하는 경향이 강했다. 그런 탓에 주인공이 되는 연예인팀의 이야기는 과잉에 가까워지는 반면, 그들이 도전하는 상대팀은 그 이야기가 충실히 다뤄지지 못하는 한계가 존재했다. <골 때리는 그녀들>은 판을 크게 키워 리그를 다룸으로써, 팀마다 제각기 다른 팀 컬러와 성장담을 확보하는 일을 가능케 했다. 경기에만 집중해도 충분한 이야깃거리가 나올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된 것이다.

리그를 운영함으로써 얻게 되는 이점은 이뿐만이 아니다. 대중문화에서 여성이나 소수자처럼 상대적으로 덜 조명된 이들을 다룰 때 창작자들은 “긍정적인 측면 위주로 보여달라”는 압력을 경험한다. 상대적으로 덜 다뤄지던 이들이 간신히 대중문화를 통해 재현되고 대변될 기회를 얻었으니, 그 기회를 되도록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모습을 묘사하는 데 쓰면 좋겠다는 기대감이 몰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백인들 사이에 딱 한명 등장하는 아시아인 캐릭터라거나, 남자들 틈바구니에 고명처럼 끼여 있는 여성 캐릭터, 이성애자들로 가득한 작품 속에 한명 출연하는 게이 캐릭터 같은 존재들을 향해, 사람들은 온갖 기대치를 다 투사한다. 그러나 어떤 식으로 묘사해도 비판을 피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긍정적이고 진취적인 모습을 담아내려 하면 “현실을 도외시한다”는 비판을, 부정적이고 어두운 측면을 담아내려 하면 “비관주의적인 전망이다”라는 비판을 받는다. 결국 더 많은 이들을 등장시켜 재현과 대변의 기회를 늘림으로써, 다양하고 입체적인 측면을 충실히 담아내는 것이 문제 해결의 본질인 셈이다.

그렇게 생각한다면, <골 때리는 그녀들>이 정규 시즌에 들어 보여준 변화의 방향과 그를 향한 사람들의 열광도 당연해진다. 고정으로 출연하는 여성 출연자가 30여명에 이르는 이 프로그램 안에선 누구도 완벽할 필요도 없고, 모범적일 필요도 없다. 각자 저마다의 서사를 충실하게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운동하는 여자들’의 서사를 입체적으로 담아낼 수 있으니 말이다. 저 리그 안에는 여전히 경기 룰을 헷갈려 하면서도 몸을 던져 공을 막아내는 아이린 같은 선수도 있는가 하면, 압도적인 개인기와 필드 전체를 아우르는 시야로 전장을 호령하는 장군인 박선영 같은 선수도 있다. 지난 시즌의 굴욕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고 팀원들을 독려하는 주장 한혜진의 서사와, 처음 리그에 진출해 자신들의 실력을 증명해야 한다는 부담감을 지닌 사오리의 서사가 교차한다. 역시, ‘좋은’ 이야기를 듣는 것만큼이나 중요한 건 ‘많은’ 이야기를 듣는 것이다.

▶ 이승한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TV)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 담당 기자가 처음 ‘술탄 오브 더 티브이’라는 코너명을 제안했을 때 당혹스러웠지만, 지금은 그러려니 한다. 굳이 코너명의 이유를 붙이자면, 엔터테인먼트 산업 안에서 무시되거나 간과되기 쉬운 이들을 한명 한명 술탄처럼 모시겠다는 각오 정도로 읽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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