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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여름, 배우 김소진을 인터뷰할 기회가 있었다. 영화 <더 킹>에서 부패한 검사들을 위협하던 ‘안희연’, 영화 <남산의 부장들>에서 정보부 요원을 긴장시키던 로비스트 ‘데보라 심’ 등 지금껏 봐온 김소진의 기세 좋은 연기가 무엇이었는지 혼란스러울 정도로 그는 정적이고 차분한 사람이었다. 두 계절을 지나 그와 다시 나눈 대화 역시 여백이 길었다. 천천히 답을 이어가다 한박자씩 쉬기도 했는데 오랜 시간 제 안에서 정리를 끝낸 뒤 꺼내는 답에는 중언부언하거나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었다. 과장하는 버릇도, 능숙한 처세도 없이 차분하고 명료했다. 그 대화의 방식이 곧 김소진이라는 사람 같았다.
김소진이 걸어온 길
2008년 데뷔해 배우 송강호, 이성민 등이 활동했던 극단 ‘차이무’ 단원으로 오랜 시간 연극 무대에 올랐다. 2017년 영화 <더 킹>으로 청룡영화상, 백상예술대상, 대종상, 한국영화제작가협회상 등 그해 대부분의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하며 주목받았다. 영화 <미성년> <남산의 부장들> <모가디슈> 등에 참여해왔고 2021 칸국제영화제 비경쟁 부문에 초청된 영화 <비상선언>에서도 그를 만날 수 있다.
“살아보지 않은 삶 연기 부담이고 두렵지만, 유일한 방법은 관심인 것 같아요”
―다시 뵙기까지 다른 인터뷰를 안 하셨더라고요. 여전히 인터뷰에 어려움을 느끼시는구나 생각했습니다.
“편한 자리는 아니어서요. 이런 마음의 틀을 깨고도 싶은데 어디서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자연스러워질까요. 숙제예요. 표현을 잘하고 싶은데 마음처럼 되지 않아서 여전히 어려워요. 연습한다고 해결되는 것도 아니지만, 노력하고 있습니다.(웃음)”
―드라마 <악의 마음을 읽는 자들>에서 강력계 팀장, 형사 ‘윤태구’를 맡아 연기했습니다. 범죄수사물의 경우 현장에서 몸을 쓰는 책임자 역할을 여성이 맡는 경우가 드물어서일까요. 새롭게 다가왔어요.
“실제 강력반에서 수십년 동안 형사로 지내셨던 분이 있어요.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묵묵히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하는 여성 형사들이 존재한다는 것과 작품에 임하며 그분들의 신념과 진정성을 알게 되었기 때문에 신뢰를 가지고 작업했던 것 같아요. 실제로 뵙기도 하고, 조언을 구하기도 하면서요.”
―‘윤태구’라는 인물을 어떻게 이해하고자 했나요?
“연기를 할 때 내 쪽에서 먼저 ‘이 사람은 이런 사람일 거야’ 하고 시작하지는 않아요. 우리가 누군가를 만날 때 그 사람을 알고 만나는 게 아니니까. 만나면서 ‘이 사람이 이런 사람이구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구나’ 하며 내 편견들이 깨지고 더 알아가는 것처럼 연기도 그래요. 극 초반부 토막 살인 사건 수사를 하는 장면에서 아이의 사체 모형이 등장하거든요. 가짜인 걸 아는데도 못 보겠더라고요. 스태프분들이 도포로 덮어뒀었는데 제가 어떻게 하다가 보게 된 거예요. 사체를 보는 순간 눈물이 터졌어요. 놀라기도 하면서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당혹스럽더라고요. 이 상황을 일상에서 늘 경험하는 이들은 어떻게 스스로를 통제하고, 절제하며 목표를 위해 몰두할 수 있는지 그 힘은 어디에서 나오는지 궁금해졌어요.”
―답을 얻었나요?
“적어도 제가 느낀 건 이분들은 일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 ‘힘들지만 버텨보자, 버티다 보면 뭔가가 있겠지’ 하는 에너지로 움직이는 사람들은 아닌 것 같아요. 버티는 게 아니라 지켜내겠다는 쪽에 가깝죠. 범죄자의 실체를 알지 못할 때는 두렵기도 하지만 막상 일말의 죄책감도 느끼지 못하는 이들을 직면했을 때 스스로 더 단단하고 강해져야겠다, 이런 인간에게 질 수 없다, 지면 안 될 것 같다는 마음에서 발현되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영화 <더 킹>의 검사 ‘안희연’, <미성년>의 ‘미희’, <남산의 부장들>의 로비스트 ‘데보라 심’ 그리고 최근 영화 <모가디슈>의 대사 부인인 ‘김명희’까지. 지금까지 김소진 배우가 연기한 인물들은 발원지는 다르지만 모두 저마다의 힘을 지닌 인물들이었어요. 이는 아마도 배우의 힘이 역할 속에 투영된 것이 아닐까 생각되는데요.
“잘 모르겠어요. 만약 그렇다고 한다면 그 힘이 무엇일까…. 생존이지 않았나 싶어요. 살아내는 힘? 배우는 어떻게든 그 인물로 살아내야 하잖아요. 이 인물을 완전히 이해하고 알지는 못하지만 이 순간 이런 감정, 상태이지 않을까 하며 제가 살아내려고 노력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에너지가 있거든요. ‘이렇구나’ 하는 순간도 있지만 ‘이런 건가?’ 싶은 불안한 상태에서 끝까지 살아보려 하는, 저의 생존 본능에서 오는 힘이지 않았을까요.(웃음)”
‘악의 마음을…’에서 강력계 전설, ‘더 킹’ 등 히트작에서 저마다 힘 지닌 배역 열연
―영화 <모가디슈> 촬영 당시 촬영지였던 모로코에 매니저도 없이 혼자 일찍 도착해 지냈다는 에피소드는 김소진 배우가 어떤 태도로 연기를 대하는지, 어떤 배우인지 짐작하게 합니다.
“마침 스케줄이 없었고 일찍 와도 된다고 하셔서 갔는데요. 감독님과 스태프분들이 이미 현지에 가 있는 상황이었어요. 작품에 대해서 이야기 나누려고 해도 한국에는 사람이 없었어요. 한국에서 혼자 아무리 생각해도 그려지지 않는 배경이잖아요. 상상에는 한계가 있으니까요. 그 환경에 익숙해지고 자연스러워지다 보면 대본 너머의 새로운 것들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비장한 마음보다는 어차피 갈 거면 조금 더 일찍 가서 살아보고 싶었죠. 누가 강요한 것도 아니고요. 근데 뭐 그렇게 한다고 다 잘하나요?(웃음) 그럼 다 그렇게 했겠죠. 그건 아니니까요.”
―뭐라도 해보자 하는 심정이었던 것이죠?
“맞아요. ‘도움이 되지 않을까?’ 하고 끈을 잡아보는 거죠. 내가 살아보지 않은 삶이라는 게 매번 부담이고 두려워요. 누군가의 삶을 어떻게 완벽하게 이해할 수 있겠어요. 유일한 방법은 관심인 것 같아요. 사랑도 관심이잖아요. 내 쪽에서 끊임없이 관심을 가졌을 때, 그 관심 속에서 나의 오해와 편협함, 부족함도 깨닫고 상대에 대한 고마움도 알게 돼요. 일에 대한 관심도, 스스로에 대한 관심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분명 내가 지금 이 순간 보고, 생각하고, 느끼는 게 다가 아니니까. 관심을 갖는 만큼 새로운 것이 계속 발견되고 제게 얻어지는 게 있으니까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어요.”
―강원도 인제에서 성장기를 보냈습니다. 말수가 적고 친구가 많지 않았던 아이였다고요. 누군가는 어떻게 그런 성격으로 배우가 되었냐고 묻겠지만 되레 소극적인 성정이 배우로 살아가는 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지 않았을까요? 소극적인 이가 지닌 강력한 무기는 관찰이잖아요.
“가지고 있는 재능이 특별히 있는 것도 아니고 뭐 하나 특출 날 것 없는데요. 관찰이라 하셨듯 말수는 없지만 늘 누군가의 삶이 궁금했어요. 어떤 생각과 감정을 가지고, 어떤 상황 속에서 어떤 경험들을 하고 살았을까 하는 궁금증이 컸어요. 그 궁금증들이 조금도 지루하지 않고 더 알고 싶고요.”
―연기를 처음 시작할 때 전에 내지 않던 목소리, 발성, 높낮이 등에 변화를 주고 힘을 써야 하는 상황이 어렵지는 않았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어떻게 표현해야 할까 고민은 있었지만 표현하는 순간에는 어렵지 않았던 것 같아요. 오히려 더 신나죠.”
―천천히 걷다가 갑자기 전속력으로 달릴 때의 느낌과 비슷한가요?
“표현이라는 것이 내가 쓰고 있지 않는 다른 감각을 건드려보는 건데요. 그렇게 다른 감각을 사용했을 때 두려움보다는 살아 있는 느낌을 받아요. 익숙한 감각만 쓰다 보면 지금 내가 살아 있는 건지 아닌지 무감각해질 때가 있잖아요. 생경한 느낌으로부터 얻는 신남이 있어요. 그걸 더 즐기고 싶고요. 물론 안 되는 걸 해내야 하는 순간에는 괴롭죠. 그 과정에서 내 한계도 알게 되고요. 그렇다고 안 하면 어떤 변화도 없잖아요. 부딪히지 않고는 모르는 거거든요. 내게 어떤 가능성이 있는지 없는지는. 두렵지만 늘 취하는 선택을 했어요. 어설플 때도 많아요.(웃음) 소화해내지 못한 표현들을 볼 때는 부끄럽죠. 근데 그 부끄러움을 견뎌내야 그다음도 있다고 생각해요.”
―지금까지 김소진 배우의 연기만 보면 배우 안에 이런 마음의 폭풍이 있는지 아무도 짐작 못 할 것 같은데요.
“저는 제 연기가 만족스럽지 못해요. 가진 것 없이 쥐어짜며 여기까지 왔다고 느끼는 날도 있고요. 이전에는 그냥 모른 채로 연기하기도 했다면 이제는 아닌 걸 알면서도 가진 것 안에서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다르게 보이려고 애쓰기도 해요. 이대로는 안 된다 자책할 때도 있고요. 최선을 다한다고는 하지만 최선의 최선이 있다는 걸 매번 깨달아요.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기 위해 할 수 있는 것에서 한번 더 노력하는 것. 그거 하나 믿고 가는 것 같아요.”
―배우라는 일의 속성상 최선을 다하는 게 능사가 아니기도 하죠. 이런 점이 배우에게 희열과 좌절을 번갈아 안길 것 같은데요. 어떻게 스스로를 다잡으려 하나요?
“결과물에 대해 부족하다는 평을 들을 수 있지만 누구든 본질적으로는 잘해내고 싶은 마음으로 하는 거잖아요. 남들은 몰라도 나는 알잖아요. 내가 정말 최선을 다했는지 아닌지, 거짓말을 했는지 아닌지를요. 스스로 좋았다고 느끼는 것들이 있다면 반대로 과대평가되는 부분에 대해서도 알죠. 그럼에도 제가 최선을 다했던, 에너지를 쏟았던 그때의 나를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걸 잊는 순간 세상의 말들에 움직여지는 것 같거든요.”
“연기로 누군가의 삶 부딪혀내며 틀 깨지는 경험 소중”…그리고, 한줄기 눈물
―대학에서 연출을 전공했지만 4학년 때 무대에 처음 오른 뒤 이후 오랜 시간 연극을 해왔습니다. 그러던 중 2017년 영화 <더 킹>으로 청룡영화상, 백상예술대상, 대종상, 한국영화제작가협회상 등 그해 대부분의 시상식에서 여우조연상을 수상했고, 스포트라이트가 쏟아졌죠. 이후 인터뷰와 캐스팅, 매니지먼트 계약 등 다양한 제안을 받았지만 스스로 준비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양했습니다. 눈앞의 기회를 잡는 것보다 그 기회를 선택하지 않는 것에 더 큰 용기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당시만 해도 처음에는 다들 주어진 기회와 변화들을 수월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은데 ‘너는 이게 뭐라고 그래?’ 하면서 스스로를 탓하기도 했어요. 나도 다른 이들의 길을 따라야 하나 싶었고요. 한데 지향점이 다르면 다른 속도와 경로로 갈 수밖에 없잖아요. 딱히 어떤 이유가 있어서 혹은 하고 싶지 않아서가 아니라 내가 지금 이 순간 해야 하는 게 무엇인지에 대해 집중하다 보면 지금 필요한 게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 같아요. 물론 고민도 많이 했었어요. 연극만 하던 때였으니까 혼란스러운 거죠. 한데 어느 날 무대 뒤에서 공연 준비를 하다 문득 ‘내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구나’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순간적으로 모든 문제들이 선명해졌어요. 앞으로 할 일이나 미래의 계획이 아닌, 오늘의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가 분명해지더라고요.”
―‘이렇게 좋은 기회는 다시 오지는 않아’ 같은 말들이 마음을 조급하게 하고 흔드는 것 같거든요. 그렇진 않으셨나 봅니다.
“물론 이렇게 했어야 하나 싶은 아쉬움이나 미련도 있죠. 그렇지만 스스로에게 냉정하게 질문하는 게 중요한 것 같아요. ‘내가 할 수 있나?’ 혹은 ‘할 수는 없지만 노력하면 해볼 수 있겠어?’ 같은 질문을요. 누군가는 이런 저를 답답해하거나 이기적이라고 할 수 있어요. 맞아요. 답답해요. 하지만 그렇게 보이는 부분에 대해서는 감당해야죠. 미련에 대해서도 내가 감당해야 하고요. 아쉬운 삶을 살 수는 있지만, 후회하고 싶지는 않아요. 선택한 것들에 대해서 후회는 없어요. 그래서 지금까지 연기한 모든 인물들이 다 저예요. 거기에 다 제가 있어요.”
―배우의 성취감이란 어렵고 복잡한 것 같습니다. 얼마나 많은 상을 받고, 몇명의 관객이 작품을 본다고 해서 얻어지는 건 아니겠지요.
“성취감을 느끼기 위해서 혹은 기분이 좋기 위해서 연기를 하는 것 같지는 않아요. 그보다는 감사, 보람이라는 말이 더 가깝지 않을까 싶은데요. 한 인물을 만나는 과정이 힘들고 우여곡절이 많고 내가 완벽하지 않지만 극 중 인물을 경험한 것에 보람을 느끼고 감사하죠. 이 또한 하나의 세계인 거잖아요. 이 작품이, 이 인물이 아니었으면 만나지 못했을 사람들, 쉽게 할 수 있는 경험이 아니니까요. 심지어 이 삶을 보다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는 거잖아요. 이 작품과 인물이 나에게 어떤 삶을 공유했듯 누군가와 나눌 수 있는 거죠. 그건 감동적인 일인 것 같아요.”
―가상의 인물이지만 그렇게 누군가를 끝내 이해해보려고 하는 노력들이 배우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 있죠?
“내가 살아보지 못했던 삶을 살아내면서 결국 나라는 사람을 알게 돼요. 이전까지는 느껴보지 못했고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지점들을 연기를 하면서 경험하게 되거든요. 나는 이런 부분에서는 이런 생각이 좀 부족한 사람이었고, 내게 어떤 편견이 있었고, 내가 누군가를 이해하는 과정에 있어 편협함이 있다는 걸 알게 돼요. 그런 배움들이 나를 변화시키기도 하고, 살아가는 데 자극이 되죠. 주어진 삶 안에서만 혼자 경험했다면 얻지 못했을 것들이죠. 그걸 단순히…. 갑자기 눈물이.”
―왜 눈물이 나는지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워낙 마음 안에 있는 말을 하지 않는 편이라. 대답을 하면서 그런 순간들이 생각나서 그런 것 같아요. 이 역할을 할 때 내가 이런 걸 느꼈지, 그때 그런 고민이 있었지 하고 기억들이 지나가니까. 힘들 때 나에게 힘이 되게끔 용기를 주는 게 있어요. 나은 삶을 살아가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있는 것 같아요. 연기를 통해 누군가의 삶을 부딪혀내면서 틀이 깨지는 경험을 하기도 하고 나를 직면할 때는 굉장히 괴롭지만 동시에 즐겁고 감사해요. 어쩌면 나를 계속 보려고 이 일을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지금 드네요.”
1990년대에 태어난 멋진 여성들의 이야기를 묶은 인터뷰집 <우리가 사랑한 내일들>(2021)을 펴냈다. 매 순간 새롭게 배우고 깨치는 배우의 삶에 대한 궁금증이 많다. 맡은 배역을 깊이 탐구하고 탐험해온 중견 여성 배우들에게 ‘배우는 삶’에 대해 묻고, 듣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