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자폐인 주인공을 통해 장애와 비장애의 공존을 이야기한다. 이엔에이(ENA) 채널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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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화에서 형을 살해했다는 혐의로 재판을 받게 된 자폐인 김정훈(문상훈)을 변호하게 되는 과정에서, 동료이자 시니어 변호사인 정명석(강기영) 변호사는 우영우(박은빈) 변호사가 자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김정훈을 더 잘 이해하고 소통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영우는 애써 설명한다. 자폐 스펙트럼 장애라는 정식 명칭이 암시하듯, 자폐의 상태는 범위가 넓다고. 영우처럼 비장애인들과 사회생활을 공유하고 의사표현을 할 수 있는 자폐인이 있는가 하면, 정훈처럼 비장애인들과 의사소통을 하는 일이 매우 어려운 자폐인도 있다고. 그저 같은 병명을 공유한다는 이유만으로 영우가 정훈과 의사소통을 잘하리라는 법은 없다고.
하지만 명석은 이를 잘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도 자폐증의 정식 명칭이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 줄도 몰랐던 자신 같은 비장애인보다는 우영우 변호사가 더 잘 알고 있지 않냐고. 동료인 명석조차 이해하지 못했으니, 다른 이들이라고 그 복잡한 사정을 이해하진 못한다. 재판정에서 만난 검사는 “변호사도 자폐 스펙트럼 장애인인데 피고인의 자폐는 심신미약의 사유가 되고 변호사의 자폐는 변호의 유효함에 영향을 안 끼친다고 하면 모순 아니냐”고 말한다. 같은 자폐인인데 자신의 아들과 달리 사회생활을 하고 있는 영우를 보며 심산이 복잡해진 정훈의 아버지(성기윤)는 “너도 그래 봐야 자폐 아니냐”는 말로 울분을 토한다.
영우는 독백한다. “자폐를 최초로 연구한 사람 중 하나인 한스 아스퍼거는 자폐에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말했어요. ‘일탈적이고 비정상적인 모든 것이 반드시 열등한 것은 아니다. 자폐아들은 새로운 사고방식과 경험으로 훗날 놀라운 성과를 이룰 수도 있다.’” 아마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보는 많은 이들의 관점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수적 보편을 점하지 못한 소수자의 시선이, 비소수자들은 보지 못하는 새로운 관점을 담보해줌으로써 더 다양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데 도움이 될 거라고. 극 중 영우를 옹호하고 지지하는 시니어 변호사 명석 또한 그런 시선에서 크게 벗어나 있지 않다. “사건에 집요하게 매달리는 힘도 좋고, 발상도 창의적이고.”
하지만 영우는 계속 독백한다. “한스 아스퍼거는 나치 부역자였습니다. 그는 살 가치가 있는 아이와 없는 아이를 구분하는 일을 했어요. 나치의 관점에서 살 가치가 없는 사람은 장애인, 불치병 환자, 자폐를 포함한 정신질환자 등이었습니다. 80년 전만 해도 자폐는 살 가치가 없는 병이었습니다. 80년 전만 해도 나와 김정훈씨는 살 가치가 없는 사람들이었어요. 지금도 수백명의 사람들이 ‘의대생이 죽고 자폐인이 살면 국가적 손실’이란 글에 ‘좋아요’를 누릅니다. 그게 우리가 짊어진 이 장애의 무게입니다.”
대한민국 최초 자폐인 변호사 우영우의 성장 스토리를 담은 법정 드라마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의 설정이 알려진 이후, 이 작품은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사람과 크게 우려하는 사람들 사이에 놓여 있었다. 지지하는 사람들은 영화 <증인>에서도 자폐인 캐릭터를 올바르게 재현하기 위해 공을 들였던 문지원 작가의 노력과 휴머니즘에 기대를 걸었다. 반면 작품을 우려하는 사람들은 비장애인들이 쓰고 비장애인들이 재현하는 장애 서사가 끝내 비장애인들에게 크게 폐를 끼치지 않고 심지어 유능해서 도움이 되는 ‘무해한 장애인’만을 승인하는 일을 반복하진 않을까 걱정했다.
드라마 속 한 장면 이엔에이(ENA) 채널 제공
뚜껑을 열고 확인해본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그 선량한 진심과 잠재적 위험을 모두 지닌 작품이다. 문지원 작가의 섬세한 취재와 대본, 박은빈 배우의 혼신의 연기가 빚어낸 캐릭터 우영우는 실제 자폐인들이 공감할 만큼 그 정확도가 높은 재현을 선보인다. 그러나 제작진의 진심과는 무관하게, 비장애인들이 쓰고 재현한 ‘천재’ 자폐인 서사라는 한계는 무해한 장애인 서사로 변질될 위험을 언제나 내포하고 있다. 실제로 발달장애인을 조력하는 한 단체의 활동가는 “벌써부터 우리 센터에 서번트증후군이나 아스퍼거증후군을 지닌 이른바 ‘천재’ 자폐인이 있는지 묻는 전화가 걸려 오기 시작했다”며, 드라마가 장애인을 향한 비장애인의 말초적 관심과 무해한 장애인에 대한 판타지를 부추기는 건 아닌지 우려했다.
그러니까 3화 속 영우의 독백은, 그 점에 대한 제작진의 인식과 우려를 동시에 담아낸 말인 셈이다. 인간이 살아갈 가치라는 게 반드시 어떤 종류의 능력을 증명해 보여야만 획득할 수 있는 것일까? 그저 태어나 살아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살 가치가 주어지는 게 아니고? 자폐인은 ‘놀라운 성과’를 거둬야만 살아갈 가치가 있는 존재인 걸까? 정훈처럼 비장애인들과 일상적으로 의사소통을 하는 일이 어렵고, 해서 어떤 이들에겐 위협으로 다가오는 존재들은 살아갈 가치가 없는 걸까? 어쩌면 장애 서사가 비장애인 서사로 가득한 대중문화계에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는 이유로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지지하는 나 같은 사람들조차, 그 방향이 조금 틀렸을지 모르는 일이다. 그냥, 엄연히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 존재하는 이들의 이야기라는 점만으로도 재현의 가치가 있는 것인데 말이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는 어쩔 수 없이 과도기적인 작품이다. 장애인 캐릭터가 제 목소리를 지닌 주인공으로 등장한다는 건 명백한 진보지만, 그걸 비장애인 배우가 연기한다는 건 장애인 배우에게 기회를 주는 일에 인색한 한국의 한계를 드러낸다. 자폐인의 이야기를 다루며 비장애인들의 왜곡된 시선이나 편견에 질문을 던진다는 점은 진보적이지만, 그게 무해한 천재 자폐인 서사로 반복된다는 건 태생적인 한계다. 그러나 아무리 소수자성 재현에 한계가 명확한 소수자 캐릭터라 하더라도, 안 나오는 것보다는 나오는 것이 낫다.
재현이 충분히 좋았는가 아닌가를 논하는 일조차도 재현이 되었을 때에나 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를 넘어 더 많은 작품에서 계속해서 자폐인, 발달장애인, 지체장애인 캐릭터들이 일상적으로 등장한다면, 더 나은 재현, 더 올바른 재현을 시도하라고 요구하는 일도 한결 더 수월해질 것이다. 엄연히 존재하기에 재현될 수 있는, 그러나 지금껏 수상하리만치 철저하게 누락되었던 이들을 더 자주 재현한다면 말이다.
티브이 칼럼니스트. 정신 차려 보니 티브이를 보는 게 생업이 된 동네 흔한 글쟁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