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영화 <지석> 스틸컷.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열흘간의 여정을 마치고 14일 폐막하는 제27회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량차오웨이(양조위)만큼 팬들의 열렬한 환호를 받지는 못했지만 무엇보다 뜻깊은 상영작이 있었다. 2017년 칸국제영화제 출장에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난 김지석(1960~2017) 수석 프로그래머를 기리는 다큐멘터리 <지석>(김영조 감독)이다. 고인에 대한 아시아 각국 영화인들의 회고와 그들이 애정을 담아 직접 제작한 짧은 동영상들, 고인의 생전 활동 모습과 고뇌까지 담은 117분은 부산영화제를 아끼는 관객들의 마음을 흔들기에 충분했다.
모흐센 마흐말바프와 자파르 파나히(이란), 아피찻퐁 위라세타꾼(타이), 고레에다 히로카즈(일본), 차이밍량(대만) 등 부산이 사랑했고 세계가 주목한 거장들뿐 아니라 현재 활발하게 활동하는 아시아 전역의 영화인들이 카메라를 응시했다. 그들은 좋은 작품을 발굴하기 위해 아시아 전역을 뛰어다니고, 배려심 깊은 선배처럼 주목받지 못한 젊은 영화인들을 찾아가 격려하며, 때로는 가족처럼 감독들의 개인적인 일까지 섬세하게 챙기던 고인의 모습을 떠올리고 종종 말을 잇지 못했다. 지난 6일 영화의전당 상영 전 고레에다 감독이 무대에 올라 “누군가의 얼굴이 한 영화제를 상징하고 발전시킬 수 있다는 걸 김지석 프로그래머 덕분에 알았다”고 한 말은 부산영화제의 탄생과 성장에 고인이 차지하는 자리를 단적으로 알려준다.
다큐멘터리 영화 <지석> 스틸컷.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하지만 <지석>은 아름다운 회고담으로 머물지 않는다. 2014년 부산시가 세월호 다큐 <다이빙벨> 상영 취소 압력을 넣으면서 촉발된 영화제의 위기와 대책 마련을 두고 영화제 주축 인사들이 논쟁하며 벌어진 내부 갈등을 가감 없이 보여주면서 영화제의 존재 가치에 대해 깊숙이 다가간다.
카메라 앞에 선 이들은 <다이빙벨> 사태가 벌어진 뒤 김 프로그래머의 얼굴에 드리워졌던 근심에 대해서도 털어놓는다. 고인을 비롯해 당시 김동호 이사장과 이용관 집행위원장 등 가족처럼 똘똘 뭉쳐 헌신적으로 부산영화제를 일군 주역들은 영화제 유지와 보이콧을 두고 의견이 엇갈리기 시작했고, 갈등은 정관 개정 문제로 이어졌다. 시간이 흘러 위기는 표면적으로 봉합된 듯 보였지만, 김 프로그래머에겐 세상을 떠날 때까지 회복하기 힘든 내상을 남겼다. 영화제 초기 함께 일했던 영국 영화평론가 토니 레인스는 영화에서 “차 안에서 갑자기 지석이 눈물을 흘렸다. 내부의 고통이 폭발한 것처럼 보였다”고 회고했다.
다큐멘터리 영화 <지석> 스틸컷. 부산국제영화제 제공
영화에서 김 프로그래머는 <다이빙벨> 사태 발생 전 마흐말바프 감독과의 대화 중 “영화제는 사람의 일이다. 많은 영화제들이 갈등이 쌓이면서 무너졌다. 하지만 부산영화제는 단단한 우정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걱정하지 않는다”고 웃으며 이야기한다. 결과적으로 아이러니가 된 이 장면은 고인이 생전에 열망했던 이상이자 영화제의 존재 가치를 말해준다.
코로나 팬데믹이 잦아들면서 3년 만에 정상적으로 진행된 올해 부산영화제는 돌아온 관객들과 함께 예년의 활기를 찾은 듯하다. 하지만 예전의 우정은 돌아오지 못했다. 영화제를 키운 대표 인사 중 하나인 김동호 전 이사장은 올해도 영화제를 찾지 않았다. 영화제 쪽에서 추진했던 고 강수연 배우의 회고전은 유족 반대로 이뤄지지 못했다. <다이빙벨> 사태 이후 2015년 ‘구원투수’로 나서 영화제 공동집행위원장을 맡았던 그가 2년 만에 상처만 안은 채 직에서 내려온 탓이다. 김 프로그래머의 말처럼 영화제는 사람의 일이다. 아직 완전히 붙지 못한 부산국제영화제의 틈을 채우는 것도 결국은 사람의 일일 것이다.
김은형 선임기자
dmsgud@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