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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TV 첫 출연 아나운서의 ‘방송 사고’…상심, 자책, 다시 서기

등록 2023-11-05 09:00수정 2023-11-05 09:51

[한겨레S] 김희수의 3분이면 할 말 다함
실수·실패 이후

인이어 끼지 않고 카메라 앞으로
진행자 입모양 보고 간신히 응대
생방송 전 ‘점검 또 점검’ 몸에 배
과도하게 자책 말고 교훈 얻어야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제 흑역사를 하나 공개하겠습니다. 때는 바야흐로 방송사 아나운서가 되고 1년차 때였습니다. 입사 후 줄곧 라디오 뉴스를 하며 실력을 연마하고 있던 저에게 리포터로 현장에 다녀오라는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아나운서가 되고 처음으로 제 얼굴이 티브이(TV)에 나오는 상황이라서 무척 떨리고, 기대도 되고, 잘해내고야 말겠다는 의지가 충만한 상태, 즉 ‘나는 아나운서로 인정받은 사람이니 무슨 일이든 주어져라, 다 씹어 먹어버리겠다’는 의지로 충만했습니다.

생방송 불 켜지고 갑자기 소리가 싹

당시 강원도 춘천에서 근무하던 저는 지역의 현장을 구석구석 누빈 뒤 드디어 방송에 출연하는 날이 되었습니다. 준비해둔 정장을 꺼내 입고 분장도 곱게 하고 춘천 스튜디오에서 대기하고 있었습니다. 다른 출연자가 준비된 소식을 시끌벅적하게 전하는 걸 지켜보면서 긴장과 흥분 속에서 제 순서가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드디어 제 순서가 돌아왔고 원주 스튜디오에 있는 진행자가 저를 호출했습니다. 그런데 웬걸, 그렇게 시끌벅적했던 스튜디오가 갑자기 소음의 진공상태가 되었습니다.

저를 부르는 진행자의 모습이 모니터용 화면으로는 보이는데 아무런 소리가 들리지 않았습니다. “뭐라고요? 안 들려요!”라고 하소연할 데도 없고, 너무 제가 초보인 게 들통날 것 같아서 그런 말도 하기가 싫었습니다. 멘털이 나갈 듯한 그 짧은 순간에 어떻게든 위기를 탈출해야겠다는 생각에 머리를 짜냈습니다. ‘아! 화면을 통해 진행자들의 입을 보고 있다가 입을 다물면 그때 내가 얘기하면 되겠구나!’ 어차피 준비된 질문과 답이었으니 이렇게 하는 게 그 상황에선 최선이었습니다. 그러고선 말이 언제 끝나는지 진행자의 입만 바라봤습니다. 저를 근심 어린 표정으로 쳐다보던 진행자들도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꼈는지 저에게 질문할 때는 천천히 입 모양을 크게 하는 게 느껴졌습니다.

어찌어찌해서 상황이 끝나긴 했지만, 진행자의 말이 모두 끝난 것을 확인한 뒤에야 제가 답변을 하다 보니 질문과 답변 사이에 공백이 생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나라의 특파원을 연결하면 지리적 한계로 소리가 전달되는 데 시간이 조금 더 걸리잖아요. 원주와 춘천을 연결하면서 지구 반대편에 있는 특파원과 대화하듯이 방송이 나갔다고 보시면 됩니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여튼 출연을 마무리하고 저는 후다닥 음반 자료실로 들어가 구석에 쭈그려 앉았습니다. ‘엄청난 실수를 저지른 것 같은데 앞으로 이 회사를 어떻게 다니나. 내 밑천이 다 드러난 것 같은데 이런 나와 누가 방송을 하려고나 할까. 얼마나 내가 바보 같아 보일까.’ 머리를 쥐어뜯으며 꼬리에 꼬리를 물고 안 좋은 생각을 이어가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바라던 아나운서가 된 뒤 첫 티브이 출연 날에 이런 치명적 실수를 했다니, 도저히 인정할 수가 없었습니다. 왜 제가 출연했을 때 갑자기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은 건지도 궁금해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창피함·자책·분노 등의 복합적인 감정에 몸서리치고 있을 때 아나운서 선배가 제 앞에 나타났습니다. ‘눈물 쏙 빠지게 따끔하게 혼나겠구나’ 잔뜩 소심해져 있는데, 약간 질책을 한 뒤 오늘 한 방송에 대한 모니터를 하자면서 저를 데리고 편집실로 이동했습니다. 편집실로 이동하는 복도에서도 사람들이 나를 비웃는 것 같아 얼굴도 들지 못했습니다. 선배는 편집실에서 한참 동안 의상과 분장의 문제점 등에 대해 애정 어린 조언을 해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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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로움은 책임의 크기까지만

그리고 음소거 상태의 진실을 알게 됐습니다. 제가 귀 안에 꽂는 ‘인이어 이어폰’을 착용하지 않았던 겁니다! 떨어져 있는 진행자와의 의사소통은 인이어 이어폰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그게 없었으니 진행자가 부르는 소리도, 부조정실에 있는 피디(PD)의 소리도 들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 당시 저는 인이어를 차야 한다는 기본적인 내용조차 몰랐습니다. 쥐구멍이 있다면 찾아 들어가고 싶었습니다. 시청자들이 저를 보면서 또 얼마나 혀를 찼을지 상상하니 이젠 방송사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순간 이 생활을 접고 아무도 모르는 곳으로 잠적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를 떠나면 누가 나를 아나운서로 다시 불러주려나’ 하는 생각에 그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습니다. 한동안은 누가 그때 이야기를 할까 봐, 방송사에서 사람들 마주치는 걸 꺼렸습니다. 지금도 그때 당시 생방송의 기억은 어제 일처럼 생생합니다. 한동안 그때를 떠올리고 싶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그 부끄러움 속에서 헤어났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그냥 생활인으로 버텨낸 것 같습니다.

지금 와서 돌아보면, 인이어를 착용하지 않은 것은 저의 명백한 실수입니다. 충분한 준비를 했다고 하더라도 주변 선배들에게 물어서 혹시 놓친 것은 없는지 몇번을 더 확인했어야 했는데,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게 싫었던 그 당시 알량한 자존심이 불러온 참사였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만약 그때 인이어 착용을 했는지 점검해준 스태프가 있었다면 방송사고는 막을 수 있었겠다는 아쉬움은 남습니다. (물론 스태프들도 아나운서가 기본 중의 기본인 인이어 착용을 깜빡했으리라고 생각하지는 못했겠지만요.) 이런 말씀을 드리는 건 이제 와서 남 탓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방송이나 발표 도중 실수를 했다고 해도 내가 짊어져야 하는 책임의 무게 이상으로 괴로워하지는 말자는 얘기를 하려는 겁니다. 의욕과 실력을 갖췄다고 해도 처음이거나 익숙하지 않은 환경에서 새로운 과업을 수행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무척 어려운 일입니다. 처음부터 성공적으로 업무를 완수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지만, 아나운서인 저를 포함한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그런 환경에서 과업을 어찌어찌 마무리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인정받을 만합니다. 저는 첫 ‘방송 사고’ 이후 생방송 들어가기 전에 점검하고 또 점검하는 습관이 몸에 뱄습니다.

여러분은 타인 앞에서 무언가를 보여주면서 어떤 실수를 하셨나요? 그리고 그 경험에서 무엇을 배우셨나요? ”다행이야.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어.” 요즘 저의 중학생 딸이 아주 잘 쓰는 말입니다. 그렇게 나쁘지 않은 성과가 차근차근 모이면서 여러분의 말하기도 발전해갈 것입니다.

한국방송 아나운서

어릴 때는 목소리가 큰 아이였습니다. 청소년기부터는 목소리가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중년인 지금은 스며드는 목소리이고 싶습니다. 현재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말하기 강연도 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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