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곳을 구경한 외부사람은 당신이 처음이오.” 장서 공개를 꺼렸던 이석범 장서가협회장은 일단 기자의 틈입을 허용하자 자신의 모든 것을 공개했다. 40여년 책과 함께 한, 퇴직 교육자의 서가의 책은 발행 시간대(근현대), 분야(한국학)가 일정하여 정갈함마저 느껴졌다. 임종진 기자 stepano@hani.co.kr
15년간 모은 책으로 24년전 모범장서가상 책 불어불어 1만2천권 옛집 옥탑까지 점거
독서일기 묶음 차곡차곡 ‘노트 변천사’ 장서가 기증책 홀대
책의 운명 가슴 아파요 이젠 책선물도 눈치보입니다
독서일기 묶음 차곡차곡 ‘노트 변천사’ 장서가 기증책 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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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책쟁이들/③ 이석범 장서가협회장 책꽂이 앞에 서서 사진기자를 향해 수줍게 웃는 40대 초반의 부부. “서가가 먼지 한점없이 가지런하다”고 설명돼 있다. 82년 10월 <주간여성>에는 대한출판문화협회의 모범장서가상을 받은 이석범(당시 42세, 동구여상 국어교사)씨 집 탐방기사가 실렸다. ‘독서의 계절, 가을… 책모으기 15년에 장서 2천5백권’라는 제목. 기사를 보면, 그는 주머니에 몇백원만 생기면 책방으로 달려갔다. 새책방에서 목록을 확인하고 책은 주로 헌책방에서 구입했다. 아내 보기 미안해 사들인 책들은 직장에 두기도 하고 다른 방에 살짝 감추기도 하고 맡겨두었다가 낱권으로 나르기도 했다. 어려운 살림에 신혼여행도 가지 못했다가 결혼 19년만인 전년 여름 동해로 해수욕을 다녀왔다. 책 욕심에 아내에게 치마 한감, 털 스웨터 한벌 선물하지 못했다. 그로부터 25년이 흐른 2006년 6월. 2천5백여권의 책은 1만2천여권으로 불어나 단독주택 옛집에서 300미터쯤 떨어진 새 아파트로 옮겨졌다. 책의 주인 이석범씨는 예순여섯, 지난해 동구여상에서 교감으로 정년 퇴임했지만, 그가 서있는 배경은 여전히 먼지 한점 없는 서가였다. 4년 전만해도 그는 냉천동에서, 그 이태 전까지는 천연동 구옥에서 27년을 살았다. 남들은 집을 넓힌다, 아파트를 장만한다고 하는데, 그는 그럴 만큼 경제적 여유가 없었을 뿐더러 짐 때문에 이사할 엄두를 못냈다. 원인은 그·놈·의· 책이다. “월급을 봉투째 집에 가져오는 경우는 없었어요. 따로 나오던 수당이나 과외비는 당연히 책값으로 들어갔죠. 생존 이외의 것은 서화를 사는데 들어갔다고 하면 맞아요.” 불어나는 책과 함께 아내의 불만도 조금씩 불어났을 터. “물어보지 마세요. 안 좋아하지는 않지만…, 좋아할 사람이 어디 있겠어요? 나중에 소장품을 팔아 호강시켜 줄라나 모르지만…. 남편 마음이 딴데 가 있는데 무슨 호강을 해요?” 마침 외출했다가 점심을 차려주러 잠간 들른 부인 이종순(65)씨의 말에는 뼈가 들었다. “그대신 술을 안 하니까 술값이라고 생각하고 잘 살았어요.” 눅잦히는 덧말에 굳어졌던 남편의 표정이 비로소 풀렸다. 그놈의 책은 부부간 감정의 골에 완고하게 존재하는 셈. 안방에 시집 3천여권, 작은 방에 국문학 책 3천여권, 거실에 각종 미술 책이 수백권. 쉬엄쉬엄 옮겨온 게 그것이고 나머지는 옛집 옥탑과 지하실에 보관돼 있다. 술값이라 치고 살았다는 아내
“고교때 친구가 읽던 딱지본 삼국지가 부러웠어요. 얼마나 읽었는지 내용을 달달 외더군요. 빌려달랬더니 아버지 핑계를 대며 선뜻 빌려주지 않더라고요.” 여러 번 졸라 허겁지겁 읽었지만 그 허기는 훗날 월탄 삼국지를 읽고서야 끌 수 있었다. 서울맹학교 보통사범과 재학 때, 일정액을 헌책방에 맡기고 빌려읽은 책 정가의 10~20%를 빼나가는 식으로 책을 섭렵했다. 한 여학생한테서 민중서관 한국문학전집 38권을 한권씩 차례로 빌려 모두 독파한 기억이 있다. 운산초등학교 교사를 거쳐 66년 맹학교 교사로 발령받은 그는 점자로 만들어지지 않은 책들을 5년동안 학생들에게 읽어주며 동시에 자신의 독서량도 채웠다. 그가 책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동구여상 교사 시절 국제대와 성균관대 대학원에서 국어국문학을 전공하면서부터. 전공은 물론 자신이 맡은 국어수업과 관련된 책이 시작이다. 국어 교과서에 나오는 시집, 소설집 등 실물을 구해 수업 교재로 활용해 일석이조 효과를 거뒀다. 모으는 재미와 속도가 붙으면서 그는 헌책방계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얼굴이 알려졌다. 홍제동 대양서점 주인 정종성씨는 “교사 재직 때는 토, 일요일이면 꼭 들르곤 했다”면서 “책 외에 그림과 글씨에도 관심이 많았다”고 말했다.
천고마비는 10월‘이었고’ 10월은 독서의 계절‘이었다.’ 독서경연대회가 열리‘었고’, 애서가와 장서가 표창이 ‘있었다.’ 2천권이면 장서가‘였다.’ 신문방송에 그 이름들이 오르내리‘었다.’ 82년 가을 장서가상을 받은 이석범씨 역시 매스컴을 많이 탔다. 추억의 그림자일 뿐인가. 이 사회는 언제까지 껍데기 인터넷에 사로잡혀 책을 과거의 유물 취급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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