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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문화일반

80년대 전설적 진혼곡이자 희망가, 노래패 입 통해 ‘민중의 애국가’로

등록 2006-11-05 18:56수정 2007-04-17 11:36

1979년 발표된 서울대학교 노래 동아리 메아리 1집의 1997년 복각판.
1979년 발표된 서울대학교 노래 동아리 메아리 1집의 1997년 복각판.
한국팝의 사건·사고 60년(73) ‘님을 위한 행진곡’과 서울대 노래패 메아리
1980년대는 정치사적으로 불행하고 암울한 시기였다. 광주항쟁으로 상징되는, 이 어두운 시기를 함께 한 노래를 단 하나만 꼽으라면 〈님을 위한 행진곡〉을 들지 않을 수 없다.

거리에 나선 이들에게, 집회의 식순용 (‘애국의례’를 대신하는) ‘민중의례’이면서, 동시에 전의를 다지는 결의가 역할을 했다. 민중가요를 모르는 사람도 한번은 들어봤을 노래여서 ‘사천만 민중의 애국가’라는 말이 과장만은 아닐 것이다.

“사랑도 명예도 이름도 남김없이/한평생 나가자던 뜨거운 맹세”로 시작하는 비장한 단조 행진곡인 이 노래는 〈빛의 결혼식〉이라는 노래굿의 한 부분으로 만들어졌다. 이 노래굿은, 1980년 광주항쟁의 상징적 인물 윤상원과, 1979년 노동운동 현장에서 활동하다 숨진 박기순의 실제 영혼 결혼식(1982년 2월)을 모티브로 만든 문제작이었다. 〈빛의 결혼식〉의 원본 테이프와 〈님을 위한 행진곡〉의 당시 악보는 지난해 한 텔레비전 프로그램에서 공개되어, 이에 대한 소문만 들었던 이들에게는 궁금증을 푸는 계기가 되었을 것 같다.

그런데 이 노래는 어디서 어떻게 만들어졌을까? 영혼 결혼식이 있은 지 몇 달 뒤, 소설가 황석영의 집에서 은밀히 〈빛의 결혼식〉과 〈님을 위한 행진곡〉을 탄생시켰다는 이야기는 ‘그 바닥’에서는 유명한 전설이다. 황석영이 백기완의 시 〈묏비나리〉를 개작해 가사를 만들고, (1979년 제3회 대학가요제 은상 수상작 ‘영랑과 강진’의) 김종률이 곡을 붙인 노래가 바로 〈님을 위한 행진곡〉이다.

극중에서 결혼을 한 두 영혼이 “앞서서 나가니 산 자여 따르라”(당시 구절은 “앞서서 가나니 산 자여 따르라”였다)라고 선동하는 내용인 만큼, 이 노래는 죽은 영혼들을 위한 진혼곡인 동시에, 광주항쟁으로 대변되는, 패배와 좌절을 경험한 이들을 위한 희망가가 되었다. 이후 이 노래는 빠른 격정미와 느린 유장미를 아우르는 넓은 스펙트럼의 단조 행진곡풍 민중가요를 확산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 노래를 포함한 30여분짜리 노래극은 단지 작은 포터블 카세트 녹음기로 녹음한 조악한 산물이었다. 하지만 ‘원시적’이었을지언정 그 속에 내장된 파급력은 가공할 만한 것이었고, 대학가를 중심으로 전국에 퍼지며 ‘비합법’의 무서운 힘을 발휘했다.

그런데 광주에서 만들어진 테이프 속의 노래가 서울까지 퍼진 데에는 대학 노래패들의 힘이 컸다. 1970년대 후반부터 활동하던 서울대의 메아리, 이화여대의 한소리 등이 대표적이다. 애초 메아리나 한소리 같은 동아리들은 운동 지향적이기보다는 낭만적 정서를 지니고 있었다. 말하자면 1970년대 포크 문화의 계승자였는데, (특히 메아리는) 김민기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메아리와 한소리는 1978년 김민기의 〈공장의 불빛〉에서 ‘얼굴 없는 목소리’로 참여한 바 있다.

역으로, 공식적으로 음반에 발표된 적 없는 김민기의 여러 노래들이 메아리의 음반(테이프)에 먼저 담기기도 했다. 가령 1집 테이프의 ‘개판으로 젖히는 거지 뭘’은 나중에 ‘소금땀 흘리흘리’라고 알려진 곡이다. 1979년의 메아리 1집은 음악녹음실이 아니라 봉천동의 한 카페에서 녹음할 수밖에 없었지만, 1980년 여름에 발표된 2집은 (이전에 수 차례 언급한 바 있듯) 이장희가 운영하던 랩 스튜디오에서 녹음됐다. 김민기가 주선한 덕이다.


1980년대 중반이 되면, 노래패의 성향이 바뀔뿐더러 이들 멤버가 다수 참여한 노래를 찾는 사람들(노찾사) 등을 통해 노래운동의 폭도 넓어진다. 메아리 등은 노찾사를 구성하는 여러 갈래 중 하나가 된 셈이다. 훗날 김광석이 부른 〈나의 노래〉나, 노찾사가 부른 다수의 노래들도 이때 이미 발표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들은 정기·비정기적인 여러 공연을 비롯해 노래책 발간, 노래테이프 보급 등을 통해 당시 합법적으로 발표되지 못했던 많은 노래들을 기록하고 확산하는 역할을 수행한 셈이다. 그 이상의 활동은 캠퍼스의 울타리를 벗어나야 했지만.

최지선/대중음악 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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