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상봉씨
멀티컬처한국 ④ 이국 정취 물씬 나는 개인 박물관
1989년 이른바 국외여행 자유화로 문이 열린 이래, 세계 10위권의 경제교역만큼이나 우리는 다양한 외국 문화를 체험하고 있다. 더불어 남다른 감각으로 자신이 체험하고 수집한 외국 문물을 들여와 소개하고 함께 나누는 공간도 늘어나고 있다. 그 영역도 서구문화권 편향을 벗어나 전세계로 다양해지고 있고, 영리 목적의 겉핥기 수준을 넘어 깊이를 더해가고 있다. 문화와 인식의 경계를 넓혀주는 ‘우리 이웃의 이국세계’로 들어가 보자. 독일 벼룩시장 옮겨놓은 ‘사보’
진귀한 장신구, 갖가지 칼에서
티베트·남미의 문화유산까지
수십년 공력에 사연들 ‘오롯이’ “독일 벼룩시장의 물건들을 보고 문화적 충격을 받았어요. 그때부터 수집을 시작했죠.” 1995년, 카운터테너의 꿈을 안고 혈혈단신 독일로 건너간 한국인 청년은 우연히 독일 슈투트가르트 인근의 벼룩시장에서 ‘골동품 아닌 골동품’들을 보고 눈을 뗄 수 없었다. 한국에서는 볼 수 없었던 독특한 디자인, 실용성, 내구성에 매료된 청년은 그때부터 독일인들이 쓰다 버린 1900년대 초·중반 생활용품들을 하나둘 모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물건 보는 ‘눈’이 부족해 시행착오도 많이 했다. 그럴수록 더욱 공부했다. 도서관에서 책도 뒤지고 전문가들에게 조언을 받기도 했다. 일년 정도 지나자 눈이 뜨이기 시작했다. 부서지고 낡은 가구도 전부 그에게는 ‘예술품’이었다. 그러는 사이 그는 성악 대신 미술 재능을 발견하고 진로를 바꿨다. 2003년, 8년 남짓 유학생활을 마치고 귀국했을 때 그에게는 컨테이너 2개 분량, 수천 점의 수집품이 함께했다. 수집품을 포장하는 시간만 6개월이 걸릴 정도로 어마어마한 양이었다. 청년은 고민에 빠졌다. “이런 좋은 물건들을 혼자 볼 수 없다.” 결국 그는 물건을 사람들에게 공개하기로 마음먹었다. 2006년 6월, 청년은 평소 “강남의 천박한 상업주의”와는 다른 분위기라고 느꼈던 홍대 앞 거리에 작은 둥지를 틀었다. 이름은 유학 시절부터 써온 예명 ‘사보’(SABO)라고 지었다. 일러스트 아티스트 임상봉(40)씨가 운영하는 멀티컬처숍 ‘사보’는 이렇게 탄생했다.
독일에서도 희귀한 골동품들로 가득한 멀티컬처 디자인전시장 ‘사보’의 내부 전경과 수집가인 일러스트 아티스트 임상봉씨.(왼쪽)
지난 11일 오후, 임씨를 만나러 홍대로 향했다. 극동방송국으로 들어가는 홍대 후문 골목, 독일어 인사말이 쓰여 있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개성 있는 외모의 임씨가 반갑게 맞아 주었다. 사방 벽면에 꽉 들어찬 소장품이 예사롭지 않다. 서너 평 남짓한 작은 공간은 그의 작업실이자 소장품을 전시한 박물관이기도 하다. 또 임씨가 손수 끓여 주는 독일차를 마시면서 천천히 소장품을 구경할 수 있는 카페이기도 하다. 현재 전시 중인 소장품은 500여 종. 계절마다 주제를 바꿔 진열한다. 전시품은 바우하우스에서 1930~40년대 제작한 생활 소품에서부터 판톤, 미스 판 데어 로에 등 유명 가구 디자이너들의 작품과 오디오, 독특한 모양의 시계, 요리용 저울, 화장실 거울까지 유럽의 오래된 집안 풍경을 옮겨 놓은 듯하다. 갖가지 샹들리에부터 의자까지 모두 그의 수집품이다. ‘사보’는 어느새 디자인 전문가들 사이에 명소가 됐고 더러는 물건을 사려는 손님들도 제법 많다. 하지만 그는 판매는 하지 않는다. “하나하나 소중한 사연이 있기 때문이다.” ‘수년 전, 그가 우연히 알게 된 레지나 신들러라는 40대의 독일인 여성은 이미 자살을 수차례 시도한 극심한 우울증 환자였다. 레지나는 임씨의 그림을 좋아했다. “당신의 그림을 보면 치유가 되는 것 같다”고 말할 정도였다. 그는 조건 없이 자신의 그림을 주었다. 얼마 뒤 레지나는 “당신의 그림 덕분에 내 우울증이 많이 좋아졌다”며 그를 자신의 집에 초대했다. 그 집에는 유명 가구 디자이너인 베르토이아의 60년대 작품 ‘다이아몬드체어’가 있었다. 그가 그 의자의 가치를 설명하자 레지나는 그림에 대한 답례로 의자를 선물했다.’
그는 요즘 열망해온 개인박물관 개장을 준비하느라 분주하다. 이제는 독일에서조차 희귀한 그의 소장품들을 보고 한 독지가가 공간을 제공해주기로 한 것이다. 독일 지인들의 창고에 맡겨 두고 온 소장품들을 가지러 떠난 그는 “이르면 3월, 제대로 된 박물관 개관 초청장을 보내겠다”고 말했다. 글 이정국 기자 jglee@hani.co.kr 사진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티베트박물관
중남미 문화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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