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김용규의 문학 속 철학산책 /
〈목걸이〉를 통해서 본 ‘허영’의 의미
올해를 보내며 문득 생각나는 작품이 있다. 기 드 모파상의 〈목걸이〉다. 줄거리는 간단하다. 말단 관리지만 착하고 성실한 루아젤과 결혼한 마틸드는 행복하지 못하다. 외모가 뛰어난 마틸드는 말단 관리의 아내로서의 삶이 구차스러워 견딜 수가 없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기쁜 얼굴로 장관의 관저에서 열리는 파티초대장을 들고 온다. 마틸드는 초대장을 내던진다. 입을 파티복과 걸칠 장신구가 없다는 이유에서다. 결국 남편은 예금을 털어 아내의 파티복을 준비하고 아내는 동창인 폴레스체 부인에게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빌려 파티에 참가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빌린 목걸이가 없어진 것이다. 부부는 하는 수 없이 전 재산을 털고 빚을 내어 똑같은 목걸이를 사서 주인에게 돌려준다. 그러고는 빚을 갚기 위해 굶주림과 헐벗음을 견디며 십년을 고생한다. 와중에 마틸드는 고생에 찌든 노파처럼 변해버렸다. 목걸이를 빌려주었던 폴레스체 부인조차 우연히 길거리에서 마주친 그녀를 알아보지 못할 정도다. 놀라운 일은 마틸드가 폴레스체 부인에게 목걸이에 얽힌 지난 일들을 털어놓았을 때 벌어졌다. 폴레스체 부인이 빌려 준 목걸이는 싸구려 가짜였다.
우스꽝스럽고 허망한 이야기다. 그럼에도 인간의 허영심과 그 대가를 이처럼 간단명료하게 보여주는 작품을 나는 달리 알지 못한다. 해를 마감하며 유독 이 작품이 생각난 것은 지금 우리사회에 가득한 허영심들 때문이다. 명품을 사기 위해 갚지 못할 빚을 지거나 범죄까지 하는 사람들의 이야기가 부단히 들렸다. 한동안은 가짜 학력 파문으로 온 나라가 시끄러웠다. 어디 이들뿐이겠는가. 마틸드처럼 허영에 찬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도 적지 않다. 허영이란 본디 ‘자기 분수에 넘치며 실속 없고 겉모습뿐인 영화’를 말하며 그 대가는 수치와 파멸이다. 그래서 예로부터 철학자들은 자족, 겸손과 같은 다양한 교훈으로 허영심을 경계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절제’다. 고대에는 세네카 같은 스토아 금욕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에피쿠로스 같은 쾌락주의자들까지도 절제를 교훈했다. 물론 이유는 달랐다. 스토아 금욕주의자들은 절제를 통해 인간이 ‘신들 위의 신’이 될 수 있다고 가르쳤다. 그러나 쾌락주의자들은 절제를 통해 ‘더 나은 쾌락’을 얻을 수 있다고 말했다. 그 차이를 마르쿠제가 〈행복론〉에서 든 적절한 비유를 빌려 설명하자면 이렇다. 어떤 사람이 파티에 초대를 받았는데 거기에는 매력적인 대화도 있고 고급술도 얼마든지 있다. 그 사람은 술도 좋아하지만 멋진 대화를 더 좋아하기 때문에 술 마시는 것을 절제했다. 그러면 그는 에피큐리언, 곧 쾌락주의자이다. 하지만 만약 그 사람이 예컨대 도덕적·종교적 이유에서 술을 절제했다면 그는 금욕주의자다. 이렇듯 고대에는 모두들 나름의 이유에서 절제를 권고했다.
하지만 오늘날에는 이런 교훈들이 모두 고리타분한 것이 되고 말았다. 경제적 요구가 생산에서 소비 쪽으로 기울어짐에 따라 소비와 쾌락의 윤리가 강요되는 후기산업사회에서 통용되는 유일한 윤리적 구호는 ‘모든 욕망은 충족되어야 한다’이다. 이제 절제는 무취미하고 무능한 사람의 변명이 되었고 허영은 세련되고 유능한 사람의 상징이 되었다. 이것이 오늘날 우리 사회에 허영이 넘치는 이유다. 그래서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나무통 속에서 살았던 시노페의 디오게네스다. 그도 역시 절제를 가르쳤다. 하지만 그 이유는 내세에 신이 되기 위해서도 아니었고, 현세에 더 나은 쾌락을 위해서도 아니었다. 오직 자유 때문이었다. 그는 ‘금욕의 하인’이 되는 것도 싫어했지만 ‘욕망의 노예’가 되는 것은 더 싫어했다. 따라서 그에게는 허영이 전혀 없었다. 그의 철학은 삶을 무겁게 하는 모든 허영들을 버리라는 것이었다. 그래야 비로소 행복해진다는 것이다. 독일의 철학자 슬로터다이크가 〈냉소적 이성 비판〉에 표현한 대로 디오게네스는 케이크 없이도 잘 지낼 수 있을 때에만 케이크를 먹고, 여자 없이도 잘 견딜 수 있을 때에만 여자를 가까이했다. 집이 없어도 잘 살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나무통 속에서 살았고, 옷이 많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기 위해서 단벌옷으로 지냈다. 디오게네스의 고향에 있는 동상 한편에는 그의 가르침에 감사하는 멋진 추모시가 새겨져있다. “시간이 동상을 갉아먹겠지만, 디오게네스여/ 그대의 영광은 영원하리라/ 그대는 인간에게 스스로 만족하는 법을 보여주었고/ 행복의 지름길을 가르쳐주었으니”라고. 허영을 모두 버림으로써 얻은 그의 자유와 행복은 알렉산드로스 대왕조차 부러워했다. 그는 자기가 알렉산드로스가 아니었다면 디오게네스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럼 생각해보자. 마틸드의 비참을 떠올리며, 잠시 생각해보자. 비록 내세를 믿지 않더라도, 설사 쾌락을 미덕이라고 생각하더라도, 왕까지도 부러워한 자유와 행복을 위해서라면 허영이라는 무거운 짐은 이제 벗어버릴 수도 있지 않을까?
김용규 자유저술가·〈철학카페에서 문학 읽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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